글쓰기로 자신을 세운 사람

by 닌자

이별과 시

지금 교통이 편리해졌지만 그래도 강진은 먼 곳이다.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가족과 제자들에게 편지로 소식을 전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그에게는 유독 많은 죽음이 찾아왔다.

정조의 죽음으로 개혁 세력이 무너지고, 정국은 노론 벽파 중심의 보수 정치로 기울었다. 그 와중에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 탄압, 즉 신유박해가 일어났고, 정약용은 서학과의 연루 혐의로 경상도 장기현에 유배되었고, 이후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이때 형 정약종과 자형 이승훈, 조카 등 많은 가족과 지인들이 처형당하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여섯 아들과 세 딸이 있었지만, 결국 살아남은 건 두 아들과 딸 하나뿐이었다.

강진으로 내려온 지 얼마 안 되어 막내아들의 죽음 소식을 접했다.

곁을 지키지 못한 슬픔에 마음이 무너졌다.

둘째 형 정약전과 정약용은 간신히 죽음은 면했지만, 서로 다른 섬에 유배되어 헤어져야 했다.

떨어져 지내는 동안, 형을 그리워하며 시로 마음을 달랬다. 아래 소개하는 시들은 그러한 그리움과 외로움이 깊이 배어 있는 작품들이다.


보은산에 올라 우이도를 바라보며

정약용

나주 바다와 강진이 이백리인데

높고 험한 두 우이산을 하늘이 만들었나

3년 동안 머물면서 풍토를 익히고도

현산이 여기 또 있는 것 미처 몰랐네

사람 눈으로는 오리려 멀리 보기 힘들어

백보 밖의 얼굴도 이미 흐릿하네

하물며 막걸리 같은 안개 짙으니

눈앞의 섬들도 오히려 자세히 보기 어렵다오

한껏 멀리 바라본 들 무슨 소용 있을 건가

괴로운 마음 쓰라린 뱃속을 남들은 모를 테지

꿈속에나 서로 보고 안갯속을 바라보다

뚫어지게 바라보다 눈물 마르자 천지도 깜깜하다오


가을에 형님을 그리워하며

정약용

1.

백발이 어느덧 찾아왔네

하늘이여 어찌하란 말인고

형님 계신 신지도엔 좋은 풍속 많다지만

외로운 섬에 홀로 슬픈 노래 부르시겠지

그곳에 가고자 하나 배 한 척 없네

어느 때에 귀양살이 풀리려나

나보다 나은 저물 오리와 기러기여 푸른 바다 헤엄치며 희롱하는구나


2.

외딴섬은 새알처럼 작은데

하늘은 큰 사람을 실었구나

역시 생은 죽음보다 낫다고 했는데

하필 꿈은 이 어찌 진실이 못되누

푸른 해초 묶어서 끼니를 때고

감시하는 대장과 이웃 삼았다 하네

초가을에 형님이 손수 쓴 편지 받고

이 중춘에야 답자을 띄우노라


3.

멀고 먼 신지섬은

분명히 인간 세상에 있도다

평평히 궁극포(완도)에 연했고

비스듬히 고금도에 맞닿아있네

달이 져도 형님의 소식은 없고

뜬구름만이 형님 계신 곳 갔다 돌아왔네

어느 날 귀양살이 풀려나 조상의 묘소에서

형제가 만나 기쁨을 나눌 수 있을까?

[다산 정약용 263,264 p/ 윤동환/다산문화원기념사업회 ]


유배 16년,

그렇게 오랜 시간 마음을 의지했던 형 정약전마저 세상을 떠난다.

정약용은 그 누구보다 가까웠던 형의 죽음을 맞으며, 참담한 심정으로 통곡했다.


가장 어두운 시간에 피어난 사유

나는 해변가로 귀양을 갔을 때 ‘내가 어려서 학문에 뜻을 두었지만 어언 20년간 세로(世路)에 빠져 다시 선왕의 대도 大道를 알지 못했다가 이제 여유가 생겼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마침내 혼연히 스스로 기뻐하여 육경 六經과 사서 四書,를 취해 깊이 연구하였다.

[ 다산산문선 64p/박석무/ 창비]


정약용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살지 않았다. 그는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앉았다.

그리고 쓰기 시작했다.

특히 육경(역경, 서경, 시경, 춘추, 예기, 악기)과 사서(논어, 맹자, 중용, 대학)를 다시 해석하며 학문을 닦으며 자신의 상처를 보듬었다.

그에게 글쓰기는 단지 지식을 축적하는 작업이 아니었다.

삶의 균열 속에서 자신을 다시 세우는 정신적 재건의 도구였고,

가장 어두운 시절에 꺼내든 희망의 메시지였다.

그는 단지 고전을 읽고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백성의 삶과 법과 제도, 마을의 행정과 지리, 죄와 형벌의 문제까지 깊이 고민하고 분석했다.

그렇게 탄생한 책들이 바로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다.

이 세 권의 책은 조선의 제도 개혁과 행정, 사법을 아우르며, 학문이 삶과 제도로 이어진 실천적 사유의 산물이었다.

그가 남긴 방대한 저술은 다산학술재단이 2012년에 발행한 [정본 여유당전서] 총 목록과, 신 조선사에서 발행한 [여유당전서] 및 [사암선생연보]를 토대로 정리해 보면,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를 비롯해 시, 산문, 편지, 단상, 수필, 각종 잡문 등 다양한 성격의 글들은 ‘시문집 및 잡찬(255권)’으로 분류된다.

여기에는 제도 개혁을 위한 실용서부터 일상에서의 성찰, 시대에 대한 비판까지, 정약용의 폭넓은 사유와 실천이 담겨 있다.

또한 다산은 육경과 사서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을 담은 주석서들을 남겼다.

『논어고금주』, 『맹자요의』, 『중용강의』, 『대학공의』 등은 모두 ‘경례집(247권)’으로 분류된다.

이러한 주석들은 단순한 해설을 넘어서, 고전을 당대 현실과 삶의 문제에 비추어 새롭게 재해석한 치열한 지적 기록이었다. 이처럼 정약용의 저술은 단순한 학문을 넘어, 조선의 미래를 위한 사유의 지도이자 실천의 도구였다.

그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성찰했고,

무너진 삶의 방향을 다시 세우고, 백성과 나라를 위한 길을 설계해 나갔다.


처음에 내가 역을 탐색하고 예를 연구했는데 다른 여러 경서에 손을 대면서 하나의 깨달음에 신명 神明이 통하고 저절로 알아지는 듯하여 누구에게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많이 있었다.

[다산산문선 80p/ 박석무/ 창비]

정약용은 자신이 지은 주역사전과 상례사전을 특별히 아꼈다.

주역사전 초고를 흑산도 유배 중이었던 형 정약전도 받아 들고 학문적 깊이에 감탄했다.

정약전은 형이자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유배지에서 둘은 끊임없이 학문에 관한 서신을 주고받으며, 사유의 길을 함께 걸었다.

그렇게 완성한 주역사전은 정약용 스스로 “하늘의 도움을 얻어 지은 책”이라 불렀다.

밤낮으로 글을 쓰는 동안 왼쪽 팔이 마비되고 시력도 나빠졌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토록 공들인 두 책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빛을 보지 못할까 두려웠던 그는,

아들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 불안을 담담히 고백했다.


주역을 재해석한 정약용

나는 예법에 관한 경전공부를 귀양살이의 굴욕과 쓰라림 속에서도 하루도 거른 적이 없다. 의리의 정밀하고 오묘함은 마치 파의 껍질을 하나하나 벗기는 것과 같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128p/ 박석무/ 창비]

정약용은 유배지에서도 매일같이 경전을 탐독했다.

특히 [주역]을 깊이 있게 연구하며, 점술적 해석이 아닌 철학적, 실천적 사유의 원천으로 삼았다.

‘역경(易經)’은 흔히 ‘주역(周易)’이라고도 불린다.

‘역(易)’은 변화를, ‘경(經)’은 근본이 되는 길을 의미한다.

‘주역’이라는 명칭은 ‘두루 주(周)’와 ‘변할 역(易)’이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세상의 모든 것을 두루 꿰뚫는 변화의 이치를 담은 철학서다.


또한 주역해석에는 대표적인 두 갈래가 있는데, 상수역과 의리역이다.

상수역은 점술이나 자연의 원리 위주로 해석하는 접근이고,

의리역은 인간과 사회의 가치 질서를 중심으로 읽는 해석이다.

정약용의 해석은 의리역의 정밀하고도 오묘한 해석에 깊은 감탄을 보이며

그 속에서 삶의 통찰을 발견했다.

원래 『주역』은 고대에 하늘의 뜻을 묻는 점서로 시작되었지만,

시대를 지나며 우주의 원리와 인간 삶의 흐름을 담은 철학서로 자리 잡았다.

그 안에는 끊임없이 변하는 자연과 인간 세계의 순환과 질서가 담겨 있다.

결국, 세상에 고정된 것은 없다.

주역은 바로 그 끊임없는 변화를 읽어내는 지혜를 담고 있다.

만물은 생성과 성장, 수렴과 소멸의 단계를 반복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도, 권력도, 명예도 영원하기를 바란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가진 것을 놓지 않으려 애쓰며,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 서로 다툰다.

정약용은 인생의 가장 큰 변화의 정점에서 이 진실을 마주했다.

유배라는 몰락 속에서 그는 자신의 처지를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서 사유의 재건을 시작했다.


[주역]은 점사를 기록하고 있는 책으로서 64괘와 384 효라는 기호의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주역]의 괘는 일종의 그림문자(pictogram)인 동시에 일종의 기호(sign)이다.

[다산 정약용의 주역사전 기화학으로 읽다 145p/ 방인/ 예문서원]

그러나 정약용은 하늘의 뜻을 묻는 점서가 아니라,

삶의 원리와 방향을 비추는 실천적 철학서로 주역을 읽어냈다.

그는 변화 속에서 인간이 마주하는 수많은 국면과 그 안에서의 태도와 시점, 방향을 모색하는 도구로서 주역을 재해석했다.


[역]은 음 陰과 양陽이 서로 섞여서 이루어진 6획 괘 卦로 구성되어 있다. 총 64괘다. 괘는 6 효 爻로 이루어졌으니 총 384호다. 이 괘와 효에 괘사 卦辭와 효사 爻辭가 달려 있다.

괘란 인간사의 일들과 상황이고 효는 그 일들과 상황 속에서의 다양한 시점 時點이다” 64개의 괘에 인간이 처한 여러 가지 상황을 상징하고 괘사는 괘가 상징하는 상황에 대한 전체적인 진단과 방향을 담고 있다.

[정이천 주역 14~15p/ 심의용 옮김/ 글항아리]

괘는 인간이 맞닥뜨리는 다양한 상황을, 효는 그 안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시점과 태도를 상징한다.

정약용은 주역을 단순한 점술서로 전락시킨 해석 태도를 비판하며,

주역이야말로 삶의 방향을 비추는 철학의 거울로 여겼다.

그는 갑자년 (1804년)부터 10여 년 동안 온 힘을 다해 주역을 공부했지만, 놀랍게도 “단 하루도 어떤 일을 점쳐본 적이 없다”라고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힌다.


공자는 점치는 것 외에 별도로 ‘단전’과 ‘대상전’을 지었으미,‘주역’을 어찌 점치는 책일 뿐이겠습니까?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267p/박석무/창비 ]


조선은 성리학이 국가 이념으로 자리 잡은 사회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성리학은 점점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의 학문으로 굳어졌고,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실사구시의 태도를 지닌 새로운 학문, 실학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정약용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주역을 점술이 아닌 삶의 철학으로 읽으며, 당대의 고정된 해석을 비판했다.


그 도의 성격이 이와 같은데도 후세에 [주역]의 이치를 말하는 사람들은 오직 큰 것만을 존귀하게 여겨서 유현하고 고원한 것에만 힘쓸 뿐이다. 뿐만 아니라 자질구레하고 비근한 뜻을 마치 은하수의 끝없음처럼 풀이하려고 하니, 이것이 [주역]의 도리가 어두워진 까닭이며, 성인의 평범하고도 실제적인 가르침이 고원하고 기묘하거나 신기하고 영적이거나 환상적인 법으로 귀착되어 도저히 깨달음으로 이끌 도리가 없게 된 까닭이다.

[다산 정약용의 주역사전 기화학으로 읽다 298p 재인용/ 방인/ 예문서원]


정약용은 후대 학자들이 주역을 고상하고 신비한 것으로만 해석하려 한 탓에,

그 본래의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지혜가 흐려졌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비판은 단지 이론적인 지적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주역을 통해 백성의 삶과 제도를 성찰했고, 고통 속에서도 방향을 찾으려 했다.

이러한 태도는, 고전을 삶의 현실 속에서 새롭게 해석하고자 했던 성호 이익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허례허식을 걷어내고 실질을 중시하는 성호의 학문은, 정약용이 실천적 철학으로 주역을 읽어내는 데도 깊은 밑거름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주역』은 여전히 어렵고 심오한 학문으로 여겨지며,

점술서로만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정약용은 주역이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실천적 철학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주역을 점서로만 이해하는 것은 성인의 참된 가르침을 왜곡하는 일이라며 비판했다.


정약용에게 글쓰기는 단지 생각을 옮기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난 속에서도 자신을 다시 세우고, 시대의 어둠을 뚫고 나아가는 사유의 행위였다. 그는 유배라는 몰락의 자리에서 『주역』을 다시 읽었고, 거기서 삶의 길을 찾았다. 그 길은 신비가 아니라 실천이었고, 예언이 아니라 성찰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써 내려간 문장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묻고 있다.

변화의 흐름 속에서, 당신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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