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이라 믿었던 것들

by 닌자

금수저로 태어난 정약용수저로 태어난 정약용금수저로 태어난 정약용

정약용은 모든 것을 갖춘 채 청년 시절을 보냈다.

지금으로 말하면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난 셈이다.

조선 후기, 그는 8대에 걸쳐 옥당을 배출한 압해 정 씨 명문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 집안은 조선에서도 손꼽히는 학문 가문으로,

왕의 곁에서 나라의 글과 법을 다루던 인물들을 다수 배출해 왔다.


형제들 모두가 뛰어난 재능을 지녔고,

어린 정약용은 자연스레 학문과 관직의 길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자라났다.


어릴 적 마마에 걸렸을 때,

어머니는 밤낮으로 곁을 지켜며 아이를 살려냈다.

하지만 약용이 아홉 살 되던 해,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이후 정약용은 큰 형수와 계모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 정재원은 영조 38년(1762), 임오년에 소과인 생원시에 합격했다.

공교롭게도 그 해는 정약용이 태어난 해이자,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한 해이기도 하다.

약용이 태어나기 한 달 전,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세자의 비극은 이후 조선 사회에 길고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런 시대적 격량 속에서 태어난 약용은

자연스럽게 아버지에게서 경서와 사서, 고문을 익히며,

학문적 기반을 다져나갔다.

문집을 읽고 글을 짓는 일은 그에게 일상이었고,

어린 시절부터 지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다.

4세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고,

7세에는 처음으로 오언시를 지었으며,

15세에는 한 살 위인 홍 씨와 혼인하였다.

16세에는 성호 이익을 마음의 스승으로 삼아 실학에 뜻을 두었고,

배운 바를 실천하는 삶을 결심하였다.

그리고 22세 되던 1783년, 자신도 생원시에 합격하여 학문적 재능을 드러냈다.


둘째 정약전은 정약용보다 네 살 위 형으로,

정조 2년(1778년)에 대과에 급제하자 온 가족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 무렵 정약용은 첫딸을 잃는 슬픔과,

2년을 기다려 얻은 아들의 탄생으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둘째 정약전은 일찍부터 실용적 지식과 과학에 관심이 많았고,

천주교의 평등 정신에도 강한 매력을 느꼈다.


셋째 정약종은 처음엔 도교에 경도되어 있었다.

그러다 가장 늦게 서학을 접했지만 끝내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었다.

이처럼 세 형제는 각자의 방식으로 ‘질문하는 삶’을 살아냈고,

이는 정약용의 내면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정약용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네

멀고 가까움을 지세가 다른 탓이지


위의 시는 그가 7세에 지은 한시로

그는 단지 공부만 잘했던 소년이 아니라,

사물과 자연을 느끼고 사유할 줄 아는 감수성 깊은 아이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21세 때,

형 정약전과 함께 봉은사에 머물며 지은 한시는 그의 내면 풍경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절에서 잠을 자며

정약용

활짝 갠 가을 하늘 끝없이 높고

얼기설기 산과 들 밝고도 멀어

새벽엔 단장 끌고 강물 건너고

구름 낀 산속에서 저녁에 쉬네

울창하게 우거진 숲 속 나무들

둘러보며 답답한 마음 푸는데

그윽한 곳 행랑채 활짝 트이어

유유자적 즐기기 충분하구나

우리의 아름다운 아가위 꽃이

안팎의 집안 간에 서로 비치어

너그럽게 대하고 격려도 하니

가슴속에 정성이 일어나 누나

[형제, 유배지에서 꿈을 쓰다/ 우현옥/토토북]


한 폭의 풍경화처럼 펼쳐지는 이 시에는,

그의 섬세한 감성과 깊은 사유가 오롯이 담겨 있다.

자연과 삶을 어루만질 줄 알았던 그의 맑은 시선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고요히 전해진다.

어쩌면 그의 이런 시선이 훗날 그가 법과 제도를 넘어서

사람과 삶을 향한 질문을 놓지 않았던 밑바탕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빛나는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정약용이 밟고 선 무대는 그 자신이 아닌 권력이 설계한 무대였기에.


정조와의 만남

이런 그의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본 이는 정조였다.


생원시에 합격하여 임금님을 뵙다.(1783)


남색도포 단정히 입고 대궐로 들어가자

통례通禮들이 안내하여 섬돌 아래 늘어섰네.

옥피리 소리 바람에 날리며 신선 의장대 옮기자

빛나는 일산 깊은 곳에 임금님 앉으셨네.

연회에서 은술잔 은총 두루 받았고

백패 白牌에다 붉은 모자 가슴에 안고 머리에 쓰네.

임금 말씀에 대답하고 뒷걸음쳐 물러나니

궁중엔 버들 도성의 꽃 정말로 늦봄일세.

[사암 정약용 전기/ 정해렴지음/ 창비 ]


정약용이 정조와 만남의 감동은 그가 남긴 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계묘년 22세, 1783년 경의과 진사 시험에 합격하면서 태학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학문적 역량도 점차 두각을 드러냈고, 수려한 문장력은 정조의 눈에 띄게 되었다.

그렇게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은 자연스레 정조의 개혁 인재 그룹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던 중 갑진년(23세, 1784년) 4월,

그는 이벽을 따라 두마협으로 배를 타고 내려가다 처음으로 서교에 대하여 듣고 한 권의 책을 보았다.

[ 다산산문선/ 박석무 역주/ 창비]

하지만 당시 잦은 경연참여와 정조와의 면담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에,

서교에 깊이 마음을 쏟을 여유가 없었다고 한다.


정조 13년(1789) 기유년,

정약용은 성균관에서 치러진 반제(泮製) 인일제에서 수석을 차지했고,

창덕궁 희정당에서 정조를 알현하게 되었다.

정조는 그를 바라보며 한참 말이 없다가 갑자기 물었다.

“너는 문과 초시에 몇 차례나 합격했느냐?”

“네 차례나 초시에 합격했사옵니다.”

“네 번이나 초시에 합격하고도 아직 급제하지 못했으니,

도대체 언제, 어떻게 급제할 수 있겠느냐!”하시고는

그만 물러가거라고 했다.

그 말은 꾸짖음처럼 들렸지만,

어쩌면 정조의 실망이 아니라 간절한 기대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정약용은 제술 시험에서도 수석을 차지했고,

3월 10일 전시(殿試)에서는 갑과 제2인으로 문과에 급제하게 된다.

관례에 따라 종 7품 의릉 직장에 임명되었고, 이는 곧 정약용이 공식적인 관료의 길에 들어선 것을 의미했다.

[사암 정약용 전기/ 정해렴지음/ 창비 ]


이후 정조는 그를 더욱 아꼈다.

4월부터는 초계문신에 선발되어 임금에게 직접 『대학』 강의했으며,

5월에는 용양위 부사정으로, 이어 승정원 가주서로 발탁되며 점차 정조 개혁 인재 그룹의 중심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9월 하순에는 한강에 배다리를 설치하는 기술적 사업에 참여해 이를 성공시켰고,

이후 수원화성의 설계와 축성에 참여하며,

기중가와 유형거를 제작하여 공사의 효율을 높였다.


이로써 그는 단지 문장가나 학자가 아니라 실무 능력을 갖춘 실학자로서 신뢰를 얻게 되었다.

정조는 그에게 개혁의 꿈을 맡겼고, 정약용은 그 기대에 응답했다.

법률을 바꾸고, 제도를 고치며, 조선의 미래를 설계하는 사람.

그는 성공이라 불릴 수 있는 거의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을까?


빛이 꺼진 순간

그토록 탄탄했던 기반은

정조의 느닷없는 죽음과 함께 순식간에 무너졌다.

정치는 자기편이 아니면 언제든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지금도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가 꾸려온 꿈과 쌓은 신뢰는

‘반역자 가족’이라는 낙인 하나로 한순간에 무너졌다.


1801년 40세의 다산은 신유옥사를 당해 감옥에 갇히고, 국청이 열려 국문을 받는 최악의 순간이었다. 함께 갇혔던 친형 정약종, 자형 이승훈, 선배 이가환, 권철신 등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겨우 목숨을 유지한 다산과 형 정약전은 먼 귀양살이를 떠나야 했다.

[다산산문선/박석무 역주/ 창비 ]


이로 인해 그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사람들은 등을 돌렸다.

그의 이름은 궁궐의 기록 속에서 지워졌다.

젊은 날의 정약용은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그의 성공은 한순간에 무너졌고,

남은 것은 오롯이 ‘자신’이란 존재 하나뿐이었다.

그런 그의 마음이 고요히, 그러나 깊게 전해진다.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 속에서 그는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성공이란 결국, 타인이 정해준 틀 위에 서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시기 정약용에게 지식은 힘이 되지 못했고,

정치는 진심을 저버렸다.


돌이켜 보면,

지금 우리의 20~30대도 정약용의 젊은 날과 닮아있다.

대학과 취업, 직장과 연봉, 팔로워와 인맥 등,

모두가 ‘성공’이라 불리는 무대를 향해 달린다.

나 역시 그게 정답인 줄 알았다. 그래서 앞만 보고 달렸다.

하지만 그 무대는

나에게는 번아웃을 안겨주었듯이

화려하게 빛났지만, 언제 꺼질지 모를 불안한 무대 위에 서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조용히 스스로에게 묻는다.

우리가 성공이라 믿고 쫓는 그것은

정말로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일까?

정약용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금수저로 태어나 초년의 ‘성공’을 통과했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깊어졌던 순간은

세상에서 가장 찬란했던 때가 아니라,

가장 외롭고 실패했던 바로 그 시간이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너무 쉽게 성공을 돈과 자리 또는 성과나 결과로만 말하곤 한다.

그러나 진정한 성공은,

긴 시간 묵묵히 버텨낸 끝에서 비로소 마주하는 단단한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시,

정약용의 삶은 오늘의 우리에게 묻는다.

그것만으로 충분한가?

그 기준은 정말 내 것인가?

누군가 설계해 놓은 성공을 향해 달리다가,

어느 순간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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