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전에 즐겨 시청했던 드라마가 있다. 전광렬님 주연의 <허준>이다. 개인적으로 사극을 좋아하는데 완벽한 고증까지는 아니더라도 역사책에서 활자로만 보던 인물과 상황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이 드라마에서 의구심을 가졌던 대목이 하나 있었다. 바로 허준이 스승 유의태(이순재 분)의 시신을 직접 해부하던 장면이다. 스승이 제자에게 인간의 오장육부를 확인하고 기록하게 하는 장면이 감동적이긴 했으나, '신체발부 수지부모'를 강조한 유교사회에서 시신해부가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허준이 활동하던 때와 비슷한 시기 지구 반대편 네덜란드에서는 실제 시신해부를 관람하는 것이 대중들 사이에서 유행이었다. 이와 관련된 작품이 헤이그 Mauritshuis Museum에 있는 <니콜라스 박사의 해부학 강의>이다. 이 작품은 다빈치의 <인체해부도>처럼 해부 자체가 메인은 아니다. 해부학 강의를 공개적으로 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워낙 유명해서 렘브란트의 작품인 정도까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림 사이즈가 커서(169.5cm * 216.5cm) 서너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찬찬히 훑어봤다. 초심자가 늘 그러하듯 처음 보고 든 생각은 "거 참 잘 그렸네"였다. 그런데 이 대작을 잘 그렸다는 한마디로 끝내면 너무 없어 보인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봤다. 셜록 홈즈가 사건 현장을 살펴보듯 매의 눈으로(?) 샅샅이 훑어봤다.
Mauritshuis Museum에서 원본 촬영.
음..이건 단체초상화구나. 우리도 동호회나 친목모임에서 단체로 사진을 찍듯이 이 작품도 특정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단체사진과는 느낌이 매우 달랐다. 보통 단체사진은 두어 줄로 늘어서서 경직된 표정으로 차렷자세로 모두 정면을 바라보는데 이 그림은 인물들의 자세가 뻣뻣하지 않고 매우 자연스럽다. 마치 몰래 스냅사진을 찍은 것 같다. 표정도 매우 사실적이다. 캐리커처처럼 전체적으로는 대충 그리고 대신 특징을 콕 집은 게 아니라 사진처럼 아주 정교하다. 역시 난 피카소 작품보다는 이런 그림을 볼 때 '잘 그렸다'는 생각이 들더라.
가운데 있는 아저씨는 어쩌면 시체에서 약품 냄새가 날 수도 있을텐데 가까이 다가가서 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오른쪽 볼이 벌겋다. 신기한 걸 구경해서 상기된 건지, 맨 정신에 시체를 볼 수는 없어서 술 한잔 걸치고 온 건지는 모르겠다. 맨 오른쪽 아래에 무슨 책이 있다. 아마 관련된 책을 펼쳐 놓고 해부를 해 나가는 걸로 추정했다(당시 가장 유명했던 해부학 교과서라고 한다). 시신이 매우 깨끗한 걸로 보아 니콜라스 박사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 부하직원들이 시체 닦는 잡일을 다 해놓았나 보다. 회사에서도 회의를 하기 전에 직원들이 미리 책상 정리하고 자료랑 커피 갖다 놓으면 나중에 부장님이 등장하시는 것처럼. 또 가운데 시신 중심으로 빛이 강하게 비치는 걸로 보아 명암의 대가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거 같기도 하다. 모든 인물들을 워낙 사실적으로 실감나게 잘 그려서 보는 사람이 실제 해부학 강의에 직접 참가한 느낌을 준다. 일단 여기까지가 그림을 보고 생각한 점들이다.
아무 정보없이 나만의 시각으로 작품을 보고난 후 책과 자료를 찾아봤다. 그럴 때마다 내가 보고 느낀 것이 전문가들의 해석과 어느 정도 일치할까 하는 궁금증이 있다. 물론 전문가들의 의견이 절대적인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의 시각과 비슷하게 맞아 들어가면 완전 헛다리 긁는 건 아니란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한다. 자료에 따르면 이 작품은 렘브란트가 그린 첫번째 집단초상화다. 당시 네덜란드는 공화정 체제하에서 각종 조합이나 민병대 등 시민들의 자율적인 조직이 발달했고 집단의 결속력을 다지는 차원에서 집단초상화를 그리는 게 유행이었다. 렘브란트가 이 집단초상화를 너무도 잘 그려서 평이 좋아 이후 주문이 폭주했다고 한다(그럴 줄 알았어!). 자연스럽고 사실적으로 그린 이 그림이 얼마나 멋있는가. 나 같아도 렘브란트에게 맡겼을 거 같다. 이후 밀려드는 주문으로 인해 돈방석에 올랐다고 한다. <The Greatest Golden Age Book : Dutch Painting>이란 책을 보니 당시 암스테르담 외과의사 조합이 매년 Theatrum Anatomicum이란 극장에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해부 실황을 보여준 그림이 있다. 지금 시각으로는 기괴하고 반인권적이지만 그 땐 그랬나 보다.
암스테르담의 한 극장에서 시체해부 실황을 대중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이 작품은 렘브란트의 초기작이지만 그의 역량을 여실없이 보여줌으로써 커리어를 정점에 올려준 효자품목이다. 곰브리치 <서양미술사>에서도 렘브란트에 대해 '네덜란드가 낳은 최고의 화가이며 네덜란드 미술 모든 분야에서 당시 어떤 화가도 감히 그와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할 정도로 무려 8페이지나 할애해서 극찬하고 있다. 예전에도 '관광객' 모드로 렘브란트의 다른 작품을 본 적은 있지만 '감상자' 모드로 진지하게 그의 작품을 본 건 처음이다. 절대고수 곰브리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