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초보 아저씨의 미술관 도전기-9

권력형 성범죄는 언제나 없어질까.

by 일상예찬

<Susanna and the Elders>

- Jacques Jordaens


어릴 때부터 눈치가 빨랐던 거 같다. 주변 상황에 뭔가 특이한 점이 보이면 이를 좀 빠르게 캐치했다.


어제 브뤼셀에 있는 벨기에 왕립미술관에 갔을 때도 나의 '눈치력' 덕에 그냥 지나칠 뻔했던 몇몇 명화들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그날도 Old Masters 작품 위주로 쭉 보고 있었는데 왠지 컨셉이 비슷해 보이는 작품들이 셋이나 보였다. 젊은 여인이 나체로 있고 그 옆에서 음흉한 표정을 한 늙은 남자 두 명이 여인의 나신을 몰래 보고 있는, 심지어 겁탈하려는 듯한 자세의 그림이었다. 역시 대가들답게 잘도 그렸다(괜히 성경 핑계로 여인의 누드를 그린 건 아닌가?). 늙은이 두 명의 표정이 아주 야비해 보이는 게 완전 호색한 같다. 그리스-로마 신화인가? 아니면 성경 내용인가? 뭔가 스토리가 있는 작품 같았다. 보통은 책이나 자료를 나중에 찾아보는데 이건 영 감이 잡히지 않아 제목을 먼저 봤다. 세 그림 모두 <Susanna and the Elders>였다. 같은 내용을 여러 화가가 그린 거구나. 그렇다면 중요한 스토리인가 보다. 뭔가 있는 거 같더라니까! 내 눈치가 맞았다.


Jacques Jordaens 작품. 벨기에 왕립미술관에서 원본 촬영.


Jan Massys 작품. 벨기에 왕립미술관에서 원본 촬영.


Cornelis Schut 작품. 벨기에 왕립미술관에서 원본 촬영.


그러면 Susanna가 누구지? 내가 아는 수잔나는 모짜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여주인공 뿐인데. 검색을 해보니 카톨릭과 동방정교의 성경 다니엘서 13장에 나오는 여인이란다(개신교 성경에는 다니엘서가 12장까지 밖에 없다. 그래서 내가 몰랐구나). 다니엘서 13장에 따르면 수잔나는 바빌론에 사는 요아킴의 아내였는데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요아킴 집에 드나들던 재판관 둘이 평소 수잔나에게 음심을 품고 있던 차에 더운 여름날 수잔나가 홀로 목욕을 할 때 수잔나를 범하려 했다. 수잔나가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자 재판관들이 간통혐의로 모함을 해서 수잔나는 사형을 당할 위기에 몰렸다. 그 순간 다니엘 선지자가 나타나 그녀의 결백을 증명해 주고 늙은이들을 응징했다는 내용이란다.


재판관이라는 권위를 내세운 일종의 권력형 성범죄를 나타낸 작품이었구나. 다니엘서 13장 내용을 몰랐으니 명작을 보고도 그냥 넘어갈 뻔 했는데 그나마 눈치 덕분에 제대로 감상할 기회를 얻은 셈이다. 역시 신화나 성경을 다룬 작품들은 약간 공부를 해야 하는 허들이 있긴 하다.


자료를 보니 벨기에 왕립미술관에서 만난 세 작품 외에도 같은 주제로 꽤 많은 화가들이 작품을 남겼다. 그 중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라는 여류 화가의 그림이다. 이 분은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당시로선 매우 드문 여류화가였는데 17세 때 아버지의 지인이자 동시에 자신의 그림 스승이었던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한 아픔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본인의 경험을 고스란히 작품에 투영했다고. 성경 내용이면서 동시에 당시에도 실제로 이런 일들이 빈번했을테니 화가들도 작품을 통해 실상을 고발했을 것이다.


젠틸레스키 작품(그림출처 : 구글)


과연 수백년이 지난 지금은 이 주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졌는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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