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 공부하면서 좌절할 때마다 생각하곤 한다. 옛날옛적 지구 저 편에서 바벨탑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만 받지 않았더라면 지금 온 인류가 같은 말을 하고 있을텐데. 그러면 우리가 영어공부 하느라 스트레스 받을 일은 없을텐데.
바벨탑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기독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그 내용은 거의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16세기 플랑드르 화가 Pieter Bruegel에게도 이 스토리는 임팩트가 컸나 보다. 성경에 단 9절로(창세기 11장 1절-9절) 짧게 언급된 내용이지만 무한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미술사에 길이 남을 대작을 남겼다.
구약 창세기에 따르면, 시날(지금의 이라크) 땅 사람들이 벽돌과 역청을 사용해 도시를 건설하고 하늘까지 닿는 망대를 세우기로 다짐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를 보시고 똑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인간들의 언어를 섞어 놓았다. 이로 인해 서로 뜻이 통하지 않자 사람들은 도시 건설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내용을 두고 보통 하나님처럼 세상을 자기 발 아래 두고 싶은 인간의 욕심과 오만에 하나님이 분노하신 것으로 해석한다.
빈 미술사 박물관에서 원본 촬영.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에 갔을 때 <바벨탑> 원본을 접했다. 스토리를 원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첫눈에 알아봤다. '아, 이게 그 유명한 브뢰헬의 바벨탑이구나'하고. 전체적으로 맑은 가을날의 푸르스름한 기운이 느껴졌다. 원뿔 모양의 탑이 구름을 뚫고 하늘로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탑을 빙 둘러서 꼭대기로 올라가는 경사로가 있고 내부에도 위로 오르는 계단이 있는 것 같다. 탑이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 있어 조만간 무너질 듯 불안해 보인다. 보통 건물을 지을 때 아래에서부터 한층씩 짓는 게 맞을텐데 여긴 아래와 위를 동시에 짓고 있다(이래도 되나?). 탑을 중심으로 한 쪽은 바다이고 다른 한 쪽은 마을이다. 좌측 하단에는 왕으로 보이는 사람과 군인들이 보이고 하층계급으로 보이는 사람 몇 명이 왕에게 무릎을 꿇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각 층마다 인부들이 작업하는 모습이 보이고 기중기같은 기계들도 있다. 르네상스 화가들도 인정했다는 플랑드르 화가들의 정교함의 끝판왕이다. 이번에도 우리 초심자들이 늘 하는 표현을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 '진짜 잘 그렸네!'
궁금한 점이 몇 개 떠올랐다. 첫째, 성경에 바벨탑의 모양에 대해선 언급이 없는데 브뢰헬은 어떻게 이 그림을 그렸을까. 탑이라는 걸 생각하면 길다란 직육면체도 있고 원통형도 있었을텐데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원추형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탑 외부 아치형태는 어디서 온 걸까. 콜로세움 짝퉁 냄새가 나기도 한다. 둘째, 성경에 언급된 시날 지역은 지금의 이라크라는데 탑 주변에 보이는 경치는 유럽이다. 아마 브뢰헬 자신이 살던 지역이겠지. 이건 어떤 의미일까. 셋째, 그림 좌측 하단에 있는 왕은 누구인가.
이제 자료와 책을 찾아볼 시간이다. 최근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바벨탑은 원래 피라미드 모양이었다. 하지만 당시엔 모양을 언급한 제대로 된 기록이 없었기 때문에 브뢰헬이 이 작품을 그리기 전에 로마를 다녀온 적이 있어 거기서 보고 온 콜로세움을 모델로 그렸다는 설이 있단다. 충분히 설득력 있다. 탑 주위가 유럽 느낌이 나는 건 내 예상이 맞았다. 16세기 안트베르펜을 그린 거라 한다.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 6, 양정무>에 따르면, 16세기 안트베르펜은 자본주의 세계의 중심이었다. 이 시기에 희망봉을 통한 무역로가 개발되고 곧바로 신대륙도 발견되면서 무역의 규모가 크게 확대되어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새롭고 거대한 시장으로 성장했다. 한마디로 세계에서 '내가 제일 잘 나가'를 시전하기에 충분했다. 따라서 브뢰헬은 풍요로운 안트베르펜 사람들이 앞으로 오만해지면 신의 심판을 받아 옛날 로마처럼 멸망할 수 있음을 경고하기 위해 그렸다는 설이다. 오, 이것도 그럴싸 하다. 또 그림에 나오는 왕은 바벨탑 건설을 지시한 니므롯(Nimrod)왕이며 왕 앞에 사람들이 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은 이 스토리가 결국 동방(Orient)에서 유래되었음을 알려주는 상징이라고 한다. 당시에 유럽에선 높은 사람 앞에서 한쪽 무릎만 꿇었고 양쪽을 다 꿇는 건 동방의 풍습이었기 때문에 그걸 표현한 거라나.
성경의 다른 스토리들도 마찬가지이듯 바벨탑에 대해서도 많은 화가들이 그렸다고 한다. 어제 브뤼셀 왕립미술관에서도 Joos De Momper와 Frans Francken이란 화가가 그린 또 다른 바벨탑을 만났다. 익숙하지 않아서인가, 왠지 바벨탑은 브뢰헬이 원탑인 거 같다(네덜란드 로테르담에도 브뢰헬이 그린 또다른 바벨탑이 있다).
Pieter Bruegel the Elder의 <바벨탑> (좌), Joos de Momper & Frans Francken의 <바벨탑> (우)
브뢰헬은 보통 순박한 농민들의 생활을 그리는 풍속화가로 유명하지만 이 작품은 약간 결이 달랐다. <농부의 결혼식> 같은 다른 작품들 감상할 때처럼 보기만 해도 즐겁고 행복한 게 아니라 뭔가 궁금증을 유발했다. 단순히 성경에 나오는 탑 하나 그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렇게 많은 내용이 담겨있는 작품이었다. 바벨탑 덕분에 조금 더 유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