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실내 스케이트장이 있어서 스케이트 타고 싶으면 계절에 관계없이 언제든 탈 수 있다. 수십년 전 내가 어릴 적에는 변두리 논에 물을 얼려 스케이트장으로 만든 곳에 가서 입장료를 내고 탔다. 너무 옛날 이야기 같지만 심지어 한강에서도 탔던 기억이 난다. 성인이 되고난 후 롯데월드 실내 스케이트장을 몇 번 이용하긴 했으나 '맛'이 나질 않았다. 방울달린 털모자 쓰고 목도리 칭칭 감고 두꺼운 장갑끼고 칼바람 맞으며 야외에서 타는 바로 그 맛! 그 맛을 다시 누리지 못한 채 수십 년을 보내다가 최근 명화를 통해 간접경험이나마 할 수 있었다. 17세기 네덜란드 겨울풍경의 대가라 일컬어 지는 Hendrick Avercamp의 작품이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서 원본 촬영.
꽁꽁 얼어있는 수로 위에 사람들이 많이 있다. 당시엔 집안도 어차피 난방이 안됐을테니 다들 밖으로 나온 거 같다. 수로가 저 정도로 얼 정도면 엄청 추운 날씨였을 것이다(나중에 자료 찾아보니 저 당시가 小빙하기였다고..). 살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칼바람이 불었을 수도 있다. 지평선 저 멀리에는 눈보라가 부는 거 같다. 하지만 사람들이 추위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게 아니라 겨울을 충분히 즐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스케이트 타는 사람도 보이고 골프채 같은 걸 휘두르는 사람도 있다. 말이 끄는 빨간색 썰매도 있다. 어쩌면 부자들의 대체 교통수단일 수도 있다. 삼삼오오 서서 대화하는 사람들도 있고, 얼음 위에서 발라당 넘어진 사람도 있다. 전체적으로 즐거워 보이는데 더 코믹한 상황도 보인다. 작아서 자세히 보아야 보이는데 왼편 건물 창문과 그 뒤 나무 위에서 엉덩이를 까고 응가를 하는 사람도 보인다. 저 당시는 지금보다 화장실 사정이 더 안좋았을테니 저렇게 아무렇게나 볼일을 보곤 했나 보다.
부분 확대.
전체적인 느낌이 두번째 포스팅 그림이었던 Pieter Bruegel의 <아이들의 놀이>와 유사하다. 넓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있고 유쾌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으며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는 뷰까지 매우 비슷하다. 둘이 뭔 관계가 있나? 사전정보 없이 감상을 했으니 이제 설명문과 자료를 찾아봤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서 발간한 <1600-1700 Dutch Golden Age>라는 책을 보니 'Winter Landscape with Skaters is indebted to Pieter Bruegel the Elder and his Flemish followers for the panoramic view(이 작품은 파노라마 뷰에 대해서 피터 브뢰헬과 그의 플랑드르 제자들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라고 쓰여 있다. 오우, 맞췄다!! 이렇게 또 연결이 되는구나. 은근 짜릿하다. 그림이 흐릿해서 잘 안보이는데 책에 의하면 왼쪽 집 벽에 안트베르펜 지방의 문장(Coat of arms)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아마도 그 지역 사람들이 이 그림을 사주거나 후원해 준 것에 감사하는 의미로 화가가 그려넣었을 수 있다고.
그림에 나온 것처럼 추운 겨울에 얼음 위에서 사람들이 재미있게 놀고 스포츠를 즐기는 DNA가 그대로 내려왔나 보다. 네덜란드는 전통적으로 스피드 스케이팅 강국이다. 동계올림픽 때마다 오렌지 유니폼을 입은 덩치 큰 선수들이 메달을 휩쓸고 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까지 네덜란드가 올림픽 스피트 스케이팅에서 딴 메달 갯수가 전세계에서 1위라고 한다(그것도 2위와 차이가 엄청 나는 압도적 1위라고). 얼마나 스케이트를 좋아하는지 네덜란드에는 Elfstendentocht라고 하는 세계적인 스케이팅 행사가 있다. 번역하면 Eleven Cities Tour다. 네덜란드 북쪽 프리슬란드 지방 11개 도시의 운하를 따라 약 210km를 스케이트를 타고 달려 결승점에 골인하는 경주다. 참가자들의 안전을 감안하여 경기가 열리는 조건이 매우 까다롭다. 기온이 영하 4.2도 아래로 일정기간 지속되어야 하고 전 구간의 얼음이 15cm 이상 얼어 있어야 한단다. 이런 조건이 갖추어지면 조직위가 대회 개최를 선언하고, 이로부터 48시간 후에 대회가 열린다. 이렇게 갑자기 열리니 참가를 원하는 사람들은 날이 추워지면 늘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스케이트 마니아였던 필립스 회장은 1997년 대회 때 미국 휴스턴에 있다가 대회 개최 소식을 듣고 바로 날아와 참가했다고 한다. 1909년 제1회 대회가 열린 후 1997년을 마지막으로 총 11회가 열렸는데 이후엔 지구온난화로 인해 날이 기온이 내려가질 않아 더는 열리지 못하고 있다고.
프리슬란드 주도에 있는 대회 기념비와 우승자 명단(좌), 선수들이 지나가는 수로 위 다리(중), 다리에는 역대 참가자사진이 타일로 붙어 있다(우).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앞으로 겨울만 되면 어릴 때 논에서, 강에서 스케이트 타던 아련한 기억이 오버랩되면서 Avercamp의 이 그림이 생각날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