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초보 아저씨의 미술관 도전기-6

예수님이 이렇게 돌아가셨구나.

by 일상예찬

<십자가에서 내리심, The Descent from the Cross, 1611-1614>

- Peter Paul Rubens


어린 시절 교회를 다녔다. 덕분에 성경 관련 내용에 익숙하다(물론 잘 안다는 건 절대 아니다). 유년부 1학년 때인가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외운 적이 있었다. 어릴 때 했던 것은 평생토록 기억에 남는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군대 관등성명 대듯이 줄줄 나온다. 사도신경 암송할 때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부분을 참 궁금해 했던 기억이 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또 십자가에서 내려지실 때 상황은 어땠을까 하는. 신약성경 곳곳에 관련 구절들이 있다고 해서 어린이 성경으로 읽어봤지만 상황이 머릿 속에 잘 그려지진 않았다.


수십 년이 지나 궁금증이 상당 부분 해소됐다. 벨기에 안트베르펜 성모마리아 대성당에서 루벤스가 그린 <십자가에서 내리심>을 접했을 때. 어머니는 극형을 받고 죽은 아들을 보고 거의 실신했겠구나..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 주신 후부터 예수님을 따른 막달라 마리아도 저렇게 슬퍼했겠구나..아리마대 출신 요셉은 예수님 시신을 저렇게 수습했구겠구나..등 어린 시절 활자로만 접했던 상황을 눈 앞에서 접하니 감격스러웠다. 어릴 때 애청한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 마지막에 주인공 네로가 파트라슈와 함께 어떤 성당을 방문했다가 한 그림을 보고 죽어간 장면이 있었던 걸 기억하는데(당시엔 그게 어떤 그림인지 몰랐다), 알고 보니 그게 이 그림이었다!

그림 출처 : 중앙일보


흥분을 가라앉히고 관람객 모드로 찬찬히 그림을 들여다 봤다. 일단 차분하고 잔잔한 느낌은 아니다. 화려하고 역동적이다. 붓터치가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이런 걸 책에서는 바로크 스타일이라고 한다). 내용을 떠나 구도 자체가 좀 불안해 보인다. 아마도 우상단에서 좌하단으로 이어지는 대각선 구조라서 그런가 보다. 중앙에 있는 예수님 몸에 집중적으로 빛이 비친다. 강한 명암의 대비로 유명한 이탈리아 카라바조의 느낌도 난다. 나중에 찾아보니 루벤스가 이탈리아 여행을 막 다녀온 후에 그린 그림이라 한다. 그럼 당연히 카라바조 영향을 받았겠지. 뭔가 맞춘 듯 해서 약간 뿌듯했다. 예수님 몸이 축 늘어진 모습이 사실적이다. 성경에(요한복음 19:34) 로마 군인 하나가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고 쓰여 있던데 그림에도 오른쪽 옆구리가 핏자국으로 흥건하다. 사다리 아래에 있는 통이 예수님 핏물 받는 통이라고 한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고행을 거친 예수님이라면 비쩍 마르고 왜소한 모습이 더 현실적이었을텐데 루벤스는 근육질 몸짱으로 표현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극적인 효과를 강조하는 바로크풍을 고수하느라 그랬을까.

안트베르펜 성모마리아 대성당에서 원본 촬영.


등장인물을 살펴봤다.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그 자리에서 성경의 관련 구절들을 검색해 봤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던 당시 옆에 있던 사람들은 제자 요한, 어머니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등이고 나중에 시신을 내릴 때는 아리마대 출신 요셉과 요셉을 도왔던 니고데모가 왔다. 이들 중 성모 마리아와 제자 요한은 바로 알아봤다. 성모 마리아는 보통 푸른옷을 입고 나오니 예수님 왼쪽에서 숨진 아들을 보고 울부짖는 푸른 옷의 여인이 성모 마리아겠지. 또 사도 요한은 보통 붉은 옷을 입고 다니는 걸로 나오니 사다리 아래에서 예수님을 안고 있는 청년이 요한이다. 바닥에 두 여인이 보이는데 아마 오른쪽에서 예수님 발을 잡고 있는 울고 있는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로 보인다. 성경에 그녀가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씻어준다는 내용이 나오니 그것과 연결해 보면 이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 아닌가 싶다. 맨 왼쪽 여인은 잘 모르겠다. 위에서 세마포를 잡고 물고 있는 사람들은 일꾼으로 보이고, 그 아래 두 사람(왼쪽 빨간모자 쓴 사람, 오른쪽 검은 옷 입은 사람)이 아마도 시신을 수습하러 온 요셉과 니고데모 아닌가 싶다.

* 프랑스 Lille 시립 미술관(Palais des Beaux Arts)에도 같은 주제의 루벤스 그림이 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비슷한데 등장인물이(하얀 두건을 쓴 할머니) 한 명 더 나온다.

Lille 시립미술관에서 원본 촬영.


늘 그러듯이 '선감상 후공부' 차원에서 나중에 자료를 찾아봤다. 이 그림은 Tryptic이라고 해서 병풍처럼 양 날개를 접을 수 있는 삼단폭 제단화이다. 폈을 때 보이는 왼쪽 패널은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세례자 요한을 임신 중인 사촌 엘리자벳을 방문하는 모습이라 하고, 오른쪽 패널은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를 성전에 바치는 광경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임신-출생-사망의 모든 단계가 하나의 제단화에 다 나온다. 고수들은 단순히 그림만 '잘' 그리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전체적인 컨셉까지 장착해야 하는 가 보다. 오른쪽 패널에는 이 그림을 의뢰한 안트베르펜 화승총 사수 조합 책임자를 구경꾼 중 한 명으로 그려줬다고 한다. 후원자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루벤스 화끈하다. 수백년 대대로 내려오는 명화에 얼굴을 넣어주다니!


공부까지 해 가면서 작품 감상하는 건 상당히 귀찮은 일이나, 이번엔 어릴 때 외워둔 사도신경과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 덕분에 더 빨리 이해할 수 있었다. 따로 공부 안하고도 80점은 받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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