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쟤는 일 안하고 놀았다니까요..
<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y, 1655>
- Johannes Vermeer
베르메르를 참 좋아한다. 몇해 전 사무실 탁상달력 뒷면에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라는 그림을 본 게 이 화가를 처음 만난 계기였다. 이후 관심을 가지고 다른 작품들도 찾아보니 잔잔한 일상의 행복을 예찬하는 그림들이 대다수였다. 의미심장하고 거창한 주제 보다는 바로 옆에 있는 소소하고 평범한 것이 행복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내 인생관과 정확히 일치했다. 이후 베르메르는 내 최애 화가 중 한 명이 되었고 어느 미술관에 가든 그의 작품이 있는지부터 챙겨봤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17세기 네덜란드 일반 가정의 평범한 생활을 그린 것들이지만 초창기에는 종교화도 그렸다. 그 중 하나가 이 작품이다. 책에 있는 도판으로만 보다가 올해 초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서 있었던 베르메르 특별전에서 원본을 감상하는 행운을 누렸다. 다른 작품들과 달리 크기도 매우 컸다(베르메르 작품 중 사이즈가 가장 크다고 함). 처음 봤을 때 무슨 내용인지 몰랐다. 오른쪽 남자는 딱 봐도 예수님 같은데 여인 두 명은 누군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전직 '선데이 크리스찬' 출신이라 큰 거 몇 개 말고는 아는 없으니. 설명을 보기 전에 그림부터 찬찬히 들여다 봤다. 한 여인은 예수님 발 밑에 쪼그리고 앉아 예수님을 쳐다보고 있다. 마치 좋아하는 아이돌을 바라보는 극성팬의 얼굴이다. 다른 여인은 빵을 식탁 위에 올려 놓고 있는데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뭐라고 이야기하는 거 같다. 무슨 이야기지?
제목을 봤더니 <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y, 마르다와 마리아 집에 오신 예수님>이다. 내용을 검색해 봤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스토리다. 내용인 즉슨, 예수께서 제자들과 같이 한 마을에 들렀을 때 마르다라는 여인이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다. 마르다는 손님 접대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데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다. 한마디로 언니는 열심히 음식장만 하는데 동생은 놀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열받은 언니가 예수님에게 말한다 "동생 놀고만 있는데 일 좀 하라고 말씀해 주세요". 이에 대해 예수님은 "너 일하느라 바쁘고 정신없는 건 아는데, 마리아는 더 좋은 것(즉 설교 듣는 것)을 선택한 거야"라고 결론을 내주셨다. 아, 테이블에 음식을 놓는 여인이 언니 마르다였구나. 그리고 마르다가 예수님한테 '한소리' 듣는 거구나. 일은 언니 혼자 다 하는데 존경하는 예수님께서 놀면서 설교만 듣고 있던 동생을 더 칭찬하셨으니 언니 입장에서는 얼마나 황당하고 속상했을까.
같은 주제의 작품을 지난 주 브뤼셀 왕립미술관에서도 봤다. Pieter Aertsen이라는 화가의 <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ia>란 작품이다. 앞선 베르메르의 그림에선 언니 마르다가 차분하고 소심한 표정으로 묘사됐는데, 여기선 좀 다르다. 굳게 다문 입술과 눈빛에서 깊은 '빡침'이 느껴진다. 왼손엔 음식거리가 가득든 바구니를 들고 있고 오른손엔 대걸레 자루를 바닥에 세워 들고 있는 자세가 뭔가 열받은 상태라는 게 느껴진다. 반면 동생 마리아는 '대체 뭐가 문제인데'라는 눈빛으로 언니를 바라보고 있다. 예수님만 없으면 대걸레 자루가 날아다닐 듯한 일촉즉발의 상황같다. 아마도 화가는 언니의 짜증에 심정적으로 동조하지 않았을까 싶다.
비신앙인의 시각에서 나는 손님맞이 준비하느라 고생하는 언니를 토닥여 주고 싶다. 옆에 정신없이 바쁜 언니를 보면서도 자기 할 일 안하고 예수님 앞에서 신앙심 깊은 척(?) 하는 동생은 완전 밉상이다. 이런 상황은 직장을 다녀본 사람은 누구나 경험이 있을 것이다. A라는 직원은 일 하느라 하루 종일 분주한 반면 B는 늘 여유롭다. 담배 피우러 나가면 기본이 30분이고 수시로 옆 부서에 놀러다니며 노닥거린다. 심지어 열심히 보고서 쓰고 있는 사람에게 가서 "쉬엄쉬엄 하세요. 건강이 우선입니다"라고 깐족대기까지 한다. 그렇게 여유있게 살지만 높은 분이 부르면 제일 먼저 달려간다. 전혀 재미있지 않은 아재개그에 박장대소하고 음치 고성방가에도 환하게 웃는 낯으로 탬버린을 열심히 친다. 결국 B가 '더 좋은 것'을 택한 것으로 인정받는 때가 많다. 지극히 평범한 전직 직장인의 시각에서 이 부분은 예수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언니를 더 칭찬해주시고 달래주셨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내용과 별개로 이 작품은 얼핏 보면 베르메르가 그린 거 같지 않다. 보통 그의 작품에는 왼편에 있는 창으로 햇살이 비치고 있고 벽에는 지도나 그림 같은 장식이 있으며 바닥에는 왠지 동양풍의 타일이 있는데, 여기선 등장인물 세 명에게만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마르다 등 뒤로 문이 보이지만 흐릿하다. 초기 작품이라 그런 건지 성경 내용이라 인물들만 강조하기 위해 그런 건지 모르겠다.
베르메르의 대작을 보면서 내용이나 예술적인 표현방식 대신에 갑자기 마르다의 빡침에 동조하고 오래 전 분노를 상기하다니, 역시 난 어쩔 수 없는 쌩초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