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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예찬 Dec 25. 2023

생초보 아저씨의 미술관 도전기-21

기쁘다 구주 오셨네.

<Adoration of the Magi, 1475>

-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유럽 어느 미술관에 가든 항상 볼 수 있는 테마가 있다. 바로 예수님 탄생과 관련한 작품이다. 미술관 유명도에 따라 누구나 다 아는 월드클래스 화가의 작품인지 덜 유명한 화가의 작품인지는 다를 수 있지만,  어디든 이 주제를 그린 작품은 있다. 보통 '동방박사의 경배(Adoration of the Magi)'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신약성경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스토리다.


Botticelli <동방박사의 경배>. 우피치 미술관 원본 촬영.

여러 미술관을 다니면서 이 주제의 그림들을 꽤 여럿 봤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우피치 미술관에서 본 보티첼리의 작품이다. 젊은 여인이  어린 아기를 무릎에 앉고 있고 머리가 허연 한 노인이 아기 예수의 발을 잡고 있다. 다른 한 두명도 뭔가 바치려고 하고 있다. 누가 봐도 동방박사의 경배다.


그런데 성경에 묘사된 장면과는 좀 다르다. 예수님께서 구유(manger)에서 나셨다고 했으니 성경대로라면 짚이 깔려 있는 마구간이 배경이어야 한다. 하지만 허물어져 가는 성벽과 고대 건축물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 베들레햄에는 저런 건축물이 없었을텐데 말이다. 시간적 배경도 그렇다. 성경에는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찾아갔다고 했으니 밤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림은 환한 대낮이다. 밝게 그려야 했던 이유가 있었을까.


자료를 찾아보니 동방박사들의 얼굴은 당시 피렌체를 쥐락펴락했던 메디치 가문의 3대를 그려놓은 거라고 한다. 당대 최고 화가의 작품에 자기 가문 인물들을 그려놓도록 강요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과 금력을 가졌나 보다. 가문의 자랑스러운 얼굴들이 제대로 드러나야 하니 밝게 그리라고 압력을 넣었나? 그랬다면 화가 입장에서도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두어 명 그려주는 대신 이들을 등에 업고 활동하면 편하니까 시키는 대로 했을 가능성이 크다. 생활인의 입장에서 충분히 이해한다. 세상만사 기브앤 데이크(Give and Take) 아닌가. 마리아 뒤에 있는 남자는 요셉인 걸로 추정된다. 완전 노인네로 표현해 놨다. 원래 나이차가 많이 나는 부부였나? 아니면 성령으로 잉태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생물학적으로는 임신이 어려울 수 밖에 없는 노인을 그려놨을 수도 있겠다.


Pieter Bruegel the Elder <The Census at Bethlehem>. 벨기에 왕립미술관 원본 촬영.

당시 우피치 미술관을 나오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 주일학교에선 보통 나사렛 예수님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그럼 베들레햄은 또 뭐지? 그날 저녁 검색해 보고 확실히 알았다. 원래 요셉과 마리아는 갈릴리 나사렛에 살고 있었는데 그 무렵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전국에 호구조사 칙령을 내려 모든 사람은 본적지에 가서 등록하도록 했다. 그래서 다윗의 후손인 요셉도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햄으로 갔고 거기서 예수님을 출산한 것이었다. 이제 깔끔하게 정리가 됐다. 지난 달 벨기에 왕립미술관에 갔을 때 Pieter Bruegel the Elder의 <베들레햄의 인구조사>라는 작품이 그거였구나. 아우구수트스의 명령에 따라 요셉과 마리아가 본적지로 등록하러 간 장면.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게 바로 이거다.  


Rembrandt <The Adoration of the Magi>. 에르미타주 미술관 다운로드.

사실 내가 상상하던 예수님 탄생 장면은 렘브란트 그림과 비슷하다. 러시아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있다는 작품이다. 예수님이 밤에 태어나셨으니 주변이 어두어야 하고 구유에서 태어나셨으니 바닥에 지푸라기들이 깔린 마구간이어야 한다는 시공간적 배경이 딱 맞아 떨어진다. 빛의 대가답게 렘브란트는 빛과 어둠의 대조를 은은하게 표현했다. 이렇게 단색을 사용해서 명암과 농담(濃淡)만으로 그리는 것을 그리자유(Grisalle) 기법이라고 한단다(이런 건 외우자!). 낡은 흑백사진 감성이 충만한 게 분위기 있다. 크리스마스 캐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가사가 딱 맞아 떨어지는 광경이다. 그림 윗쪽 어두운 부분에 헤롯왕이 칼을 들고 무섭게 노려보고 있지만 예수님과 동방박사에게 집중된 밝은 빛에 가려져 있다. 아마도 어둠 속에 있는 지상의 왕 헤롯은 하늘의 왕 예수님을 이길 수 없음을 표현한 게 아닐까 싶다.  


Leonardo da Vinci  <The Adoration of the Magi>.  우피치 미술관 원본 촬영.

보티첼리 그림을 찾느라 하드디스크를 뒤지다 보니 우피치 미술관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동방박사의 경배>도 찍어놓은 걸 알았다. 이런 명화를 직접 봤는지조차 기억도 못하다니. 우피치 미술관을 언제 또 간다고.. 어이쿠 한심한 자여. 좀 알고 다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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