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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예찬 Jan 02. 2024

생초보 아저씨의 미술관 도전기-25

방심하면 한 방에 훅 갑니다.

<Samson and Delilah, 1609-10>

- Pieter Paul Rubens


순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를 많이 본다. 항상 새로운 자극을 추구하다가 절제하지 못해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다. 주로 술, 도박, 마약이 엮여있다. 도파민이 주는 쾌감에 꽤 큰 비용을 지불하는 셈이다. 여기에는 '별 일 없겠지', '나는 괜찮을 거야' 같은 방심과 오만함이 그 기저에 있다. 


오랜만에 옛날 팝송들을 듣는데 한 곡이 유달리 더 잘 들렸다. Tom Johns의 <Delilah, 딜라일라>라는 곡이다. 바람 피우는 여자친구를 두고 속끓이는 남자의 심경을 노래하는 내용인데 오늘 내가 꽂힌 건 가사가 아니라 제목이었다.  사실 이 딜라일라는 성경에 나오는 <삼손과 데릴라> 스토리의 그 데릴라다. 편안하게 노래 듣다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톰 존스 노래에서 성경 속 삼손과 데릴라로, 또 몇해 전 영국여행으로.


<Samson and Delilah>. 런던 내셔널갤러리 원본 촬영.

2018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루벤스의 <삼손과 데릴라> 작품을 본 적이 있다. 천하장사처럼 덩치 좋은 남자가 웬 여자에게 안긴 채 잠을 자고 있고 어떤 사람이 가위로 머리카락을 자르려 하고 있다. 저 뒤에는 군인들이 기다리고 있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건 삼손과 데릴라 이야기다! 어릴 적 주일학교 때부터 하도 들어서 수십 년이 지나도록 잊을 수 없는 스토리였다. 


전체적으로 루벤스 냄새가 진하게 났다. 전체적으로 그림에 활력과 생동감이 넘친다. 또한 데릴라의 체형이 풍만했다. 루벤스 그림들에 나오는 여인들 보면 마른 사람들은 거의 없더라. 아마 당시 플랑드르 지방에선 이런 체형을 가진 여인이 미인으로 통했나 보다. 벨기에 안트워프 성당에 걸려 있는 <십자가에서 내리심>에서 루벤스가 예수님을 몸짱으로 표현했듯이 여기서도 삼손의 몸이 장난 아니다. 등 근육이 살아 움직인다. 삼손이 천하장사임을 적절하게 표현한 것 같다. 나중에 알고 보니 루벤스가 이탈리아에 유학을 다녀왔다고 한다. 이때 다빈치의 해부학과 미켈란젤로의 근육묘사를 제대로 배웠나 보다. 저 뒤에 있는 비너스와 큐피드 조각상도 '나 이탈리아 다녀온 사람이야~' 하고 외국물 먹은 티를 낸 것 같다. 

 

삼손은 곧 지옥문이 열릴 줄도 모르고 이 와중에 오른손으로 데릴라의 아랫배를 만지고 있다(어이쿠 인간아..). 데릴라의 눈빛은 은화 1100개에 삼손을 팔아버린 죄책감과 삼손에게 닥칠 운명에 대한 아련한 연민이 동시에 묻어나는 듯 하다. 이발사는 왠지 당시 '청담동 헤어샵' 프로를 데려온 느낌이다. 혹시라도 낯선 손길에 삼손이 잠을 깰까봐 오른손엔 가위를 들고 왼손으로 조심조심 머리카락을 들어올리고 있다. 데릴라 옆 노파는(an old procuress) 이발사가 실수하지 말도록 불빛을 비춰주고 있다. <The National Gallery Companion Guide>란 책의 설명에 따르면, 원래 성경에는 이 노파가 안나오는데 포주 노파를 그림으로써 데릴라가 몸을 파는 여자였음을 표현했다고 한다. 노파도 촛불을 들고 있고 벽난로에서도 불빛이 비치고 저 뒤 군인들도 촛불을 들고 있어서 방이 전체적으로 밝다. 이렇게나 밝은데 정신줄 놓고 잠에 취한 삼손을 보면 그대는 당해도 싸다. 


(좌) Rembrandt의  <삼손과 데릴라>, (우) Jan Lievens의 <삼손과 데릴라>.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다운로드.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도 렘브란트와 얀 리벤스의 <삼손과 데릴라> 그림이 있다. 여기선 데릴라를 좀 더 악녀로 그린 느낌이다. 루벤스 작품은 데릴라가 삼손을 팔아 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머리카락 잘리는 삼손을 바라보는 눈빛이 애처로운 반면, 여기선 적극적 동조자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자유 기법(단색조의 색을 사용하여 그 명암과 짙고 옅음으로 그리는 방식)으로 그린 렘브란트 작품에선 데릴라가 이발사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을 하고 있다. 얀 리벤스 그림에서는 데릴라가 가위를 미리 준비했다가 이발사에게 직접 건네주고 있다. 이발사들은 왠지 초짜처럼 임무수행에 자신이 없어 보인다. 삼손이 깰까봐 두려워 하는 느낌이다. 성경을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그래도 루벤스 작품이 좀 더 현실적인 것 같다. 삼손을 팔아 넘기고 거액을 챙기긴 했지만 인간적으로 좀 미안해 하는 데릴라의 눈빛이 더 와닿는다.  


삼손에겐 데릴라에게 비밀을 털어놓기 전에 세 번이나 기회가 있었다. 데릴라가 자꾸 괴력의 비밀을 물어볼 때 의심을 갖고 대비했어야 했다. 인생은 실전이다. 항상 주의하고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순간의 욕정을 이기지 못하면 바로 지옥행이다.  특히 도파민이 분비되는 현장에선.  


p.s.) 그런데 머리카락이 사라져 힘을 못쓰는 건 삼손만이 아니다. 현대인들도 머리가 빠지면 힘이 처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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