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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예찬 Jan 05. 2024

생초보 아저씨의 미술관 도전기-26

루벤스보다 못한 게 뭐야.

<Old Woman Reading, 1626-1633>

- Jan Lievens


초등학교 시절 차범근 아저씨의 분데스리가 활약상부터 최근 메시의 월드컵 우승까지 수십 년간 축구를 봐왔다. 이제 수많은 스타 플레이어들을 비교하면서 누가 어떤 면이 더 나은지 자신있게 말할 정도는 된다. 그러다 보니 축구를 모르는 분들이 유명한 선수들 실력이 다 그게 그거다 라고 퉁치면 답답할 때도 있었다. '아니 저 차이가 왜 안보일까?' 하고. 하지만 요새는 그 분들을 이해한다. 미술 전문가들이 나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하실테니까.


네덜란드 레이든(Leiden)에 있는 한 미술관에서 17세기 몇몇 작품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동 시대 플랑드르 지역 챔피언급인 루벤스나 렘브란트 뺨칠 정도로 작품들이 훌륭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이 두 사람의 그림인 줄 알았다. 그런데 설명을 보니 Jan Lievens 라는 화가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재야의 숨은 고수였나? 


(좌) 얀 리벤스 <Old Woman Reading>, (우) 루벤스 <Old Woman and Boy with Candles>

첫번째 그림을 보면 할머니가 책을 읽고 있다. 책에 걸쇠가 달려 있는 걸로 보아 매우 중요한 책, 즉 성경인 걸로 추정된다. 할머니의 진지한 표정은 물론 얼굴 주름살과 손등의 핏줄까지도 매우 사실적이다. 조금 멀리 떨어져서 보면 사진을 찍어 놓은 것 같다. 수백년 전 네덜란드 교회에서 성경책 읽고 있는 집사님이 진짜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왼쪽에서 비치는 빛과 그 반대편의 그림자의 조화가 이 할머니를 연극 무대의 주인공처럼 만들고 있다. 카라바조 냄새가 난다.


두번째 루벤스의 그림에 나오는 할머니도 비슷하다. 할머니가 들고 있는 촛불이 빛과 어둠을 명확히 갈라 놓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유학하고 온 티를 팍팍 내고 싶어서였는지 얀 리벤스 작품보다 카라바조 느낌이 더 강하다. 여기서도 할머니의 조심스러워 하는 눈빛과 밭고랑 같은 주름살이 매우 사실적이다. 


(좌) 얀 리벤스 <Head of an Old Man>, (우) 렘브란트 <Lamenting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할아버지들 표정이 슬프다. 첫번째 얀 리벤스의 그림을 보면 다른 물건이나 배경은 없이 할아버지 얼굴만 있다. 뭔가 큰 걱정거리가 있어 보인다. 사진을 찍어도 더 이상 정확한 표정을 그릴 수 없을 정도로 수심에 가득찬 얼굴을 훌륭하게 표현해 냈다. 이마의 주름살과 눈밑 다크서클은 물론 턱수염까지 한 올 한 올 제대로 그렸다. 이보다 더 잘 그릴 수 있을까. 


두번째 렘브란트 작품에 나오는 할아버지는 성경에 나오는 예레미야 선지자다. 낙심하고 슬픈 표정으로 두꺼운 책에(아마 성경) 기대고 있다. 왼편 저 뒤쪽에는 불길이 보인다. 검색해 보니 구약 열왕기하에 나오는, 바빌론이 예루살렘을 함락한 내용이라고 한다. 현재의 명성은 렘브란트가 크게 우위에 있지만, 난 얀 리벤스 작품이 주름살이 더 사실적이고 슬픈 표정도 더 잘 표현한 것 같다. 


(좌) 얀 리벤스 <Pilate Washing his Hands>, (우) Matthias STOM <Pontius Pilate Washing his Hands>

교회에서 사도신경 암송할 때마다 부르던 친숙한 이름,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 그림이다. 빌라도는 로마황제의 명을 받은 당시 유대지방 총독으로,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언도한 후 군중들 앞에서 손을 씻으며 본인은 책임이 없음을 강조한 사람이다. 두 작품 모두 고위급 인사로 보이는 사람이 손을 씻고 있고 뒤에는 한 남자가 끌려가고 있다(Matthias STOM 작품엔 십자가까지 등장함). 교회 문턱을 좀 드나든 사람이면 어떤 내용인지 바로 알 수 있다. 


얀 리벤스의 빌라도는 죄책감 없이 당당해 보이는 반면, 마티아스 스톰의 빌라도는 눈빛에서 약간의 미안함이 느껴지는 듯하다. 마치 "아 몰라..일부러 그런 건 아냐..난 책임없어.."라고 하는 듯한. 17세기 초반 플랑드르 지방은 카라바조의 영향력이 강했나 보다. 이 두 작품들도 연극 무대를 보는 듯 명암이 대조가 명확하다. 


얀 리벤스에 대해 찾아보니 이 분 대단한 분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림 신동으로 불렸고 같은 레이든 출신인 렘브란트랑 암스테르담에서 한 스승 밑에서 같이 도제생활을 했다.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렘브란트와 작업실도 같이 썼던 사이다. 나이도 겨우 한 살 차이니 친구처럼 지내며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던 선의의 경쟁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당시 고위층에게 실력을 인정받아 수도 헤이그에서도 성공하고 나중에 영국 왕실에도(청교도 혁명으로 목이 잘린 찰스 1세 때) 초대받아 왕성하게 활동했다고 한다. 


당시 활약상이나 지금 남아 있는 작품들로 볼 때 얀 리벤스도 충분히 렘브란트나 루벤스와 비슷한 실력이었을텐데 아쉽게도 후세의 명성은 차이가 많이 난다. 초보자가 보기엔 실력이 비슷해 보이는데 선수들 눈에는 확연히 다른가 보다. 


그 차이를 구별할 줄 알아야 전문가(적어도 애호가)가 되는 거겠지.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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