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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예찬 Jan 07. 2024

생초보 아저씨의 미술관 도전기-27

감자 먹는 사람들.

<The Potato Eaters, 1885>

- Vincent van Gogh


점심 때 갑자기 감자튀김이 먹고 싶어 맥도날드에 다녀왔다. 어릴 적에는 감자를 통으로 삶아서 껍질 벗기고 젓가락으로 푹 찍어서 먹었지만, 패스트푸드 등장 이후엔 감자는 프렌치 프라이로만 먹는다. 원래 모습은 흙이 덕지덕지 붙어 있고 지저분해 보이지만 감자튀김으로 탈바꿈하면 이만한 효자 음식이 없다. 나는 가끔 간식으로나 감자를 먹지만 옛날 유럽의 가난한 농부들은 허구헌날 날 이것만 주식으로 먹었을 것이다.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The Potato Eaters>. 고흐 미술관 원본 촬영.

워낙 유명한 그림이라 원래부터 알고는 있었다. 그러다가 고흐 미술관에서 원본을 영접했다.  어두침침한 집에 다섯 식구가 모여 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밖이 어둡고 집 안에는 작은 램프 하나 있는 걸로 보아 저녁인가 보다. 허름한 식탁 위엔 감자와 시커먼 음료수 뿐이다(미술관 설명을 보니 값싼 커피 대용품인 chicory라고 함). 그래도 감자를 막 삶았는지 아직 김이 모락모락난다. 다른 식구들 식사하는 동안 맨 오른쪽 여인은 치코리를 따르고 있다. 가족들 먼저 먹이려는 옛날 우리네 엄마들 모습이다. 가족들이 다 모였는데 고된 노동 끝이라 그런가 사람들 얼굴이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옷차림도 칙칙하고 표정도 어둡다. 돈 맥클린(Don McLean)의 노래 'Vincent' 가사처럼, 남루한 옷을 입고(the ragged men in ragged clothes) 고통으로 힘들고 주름진 얼굴(weathered faces lined in pain)이다. 화려한 색감이 잘 표현된 <해바라기>나 <밤의 카페 테라스> 같은 고흐의 다른 작품들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대비된다.


Jozef Israels <Peasant Family at the Table, 1882>. 고흐 미술관 다운로드.

고흐는 왜 이렇게 우중충하게 그렸을까. <반 고흐 미술관 소장 걸작선>이란 책에 따르면, Jozef Israels의 <Peasant Family at the Table, 1882>란 작품을 보고 영감을 얻었을 수 있다고 한다. 이 또한 농민 가족이 식탁에 둘러 앉아 식사를 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 가족들은 왠지 그리 고생스러워 보이진 않는다. 왼쪽 창에서 밝은 빛이 비춰서인지 많이 어둡지 않다. 식탁 위에도 접시가 여럿 있는 걸로 보아 그래도 먹고 살 만한 집인가 보다.


작품 속 인물들 초상화. 고흐 미술관 원본 촬영.

반면 고흐는 농민들을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위 책에 의하면, 고흐는 희미한 조명 아래 감자를 먹고 있는 농민들이야말로 자기 손으로 땅을 갈아 먹을 것을 수확한다는 걸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그림 속 농민 가족의 얼굴을 껍질 그대로의 지저분한 감자 색채로 칠했다고 한다. 옆에 있는 초상화를 보니 이 작품에 나오는 모델 가족(De Groot Family)의 얼굴이다. 둘 다 모델들처럼 인위적인 표정을 지은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앞을 바라보고 있다. 인상이 선량하고 성실해 보인다.


<The Potato Eaters>. 크뢸러-뮐러 미술관 원본 촬영.

이 작품을 나중에 크뢸러-뮐러 미술관에서 또 만났다. 고흐 미술관에 있던 걸 대여해 준 것이라 생각했다. 어, 그런데 설명을 보니 별개의 작품이었다. 이것이 첫번째 작품이고 전에 고흐 미술관에서 봤던 것이 두번째 작품이란다(꼼꼼하게 보지 않고 대충 넘겼으니 알 턱이 있나). 인터넷 검색으로 고흐 미술관 소장품을 띄워놓고 둘을 비교해 보니 비슷하긴 했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커피잔 수가 다르고, 등장인물의 표정이 조금씩 다른 정도였다. 물론 두 그림 모두 우중중한 분위기는 같았다.


(좌) 누에넌 고흐 기념관 습작, (우) <The Potato Eaters> 조형물.

고흐의 초기 작품 중에서 가장 대박이 난(?) 이 작품은 고흐 아버지가 목사로 재직했던 누에넌(Nuenen)이란 도시에서 탄생했다. 이곳에 있는 고흐 기념관에는 <감자 먹는 사람들> 최종본을 그리기 전 고흐가 연습했던 습작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 동네 공터에는 작품 내용을 동상으로 설치해 놓았다. 도시 곳곳에 고흐의 흔적들이 묻어 있었다. 고흐가 나중에 프랑스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지만 역시 그의 예술적 뿌리는 네덜란드가 맞다.


직장에 다닐 때는 잦은 야근으로 인해 가족들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할 때가 많았다. 요샌 잠시 쉬고 있는 중이라 가족들과 늘 저녁을 같이 먹는다. 호텔 만찬이나 오마카세와는 차이가 많이 나지만 가족들 다 같이 모여 밥, 국, 김치, 계란 후라이 정도만 놓고 먹어도 나는 대만족이다(애들은 싫으려나..). 작품 속 농민들은 겨우 감자에 싸구려 커피만 먹었지만 그래도 우린 훨씬 좋은 거 먹으니 행복하다.


다만 농민들의 '노동'을 강조한 작품을 보고 나니 노동을 쉬고 있는 지금 은근 찔린다. 쉼을 멈추고 조만간 다시 노동하러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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