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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예찬 Jan 09. 2024

생초보 아저씨의 미술관 도전기-28

한 잔 하십시다.

<Merry Drinker, 1628-1630>

- Frans Hals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지만 가끔 즐겁게 한 잔 한다. 많은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마시는 자리보다는 친한 두어 명과 같이 마시는 자리를 선호한다. 이런 오붓한 자리에서 마주 앉은 친구랑 기분좋게 한 잔 주거니 받거니 하는 순간은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Frans Hals <Merry Drinker>.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원본 촬영.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는 환하게 웃으며 내게 한 잔 권하던 친구를 생각나게 하는 그림이 몇 점 연달아 걸려 있다. 우선 Frans Hals의 작품이다. 레이스가 달린 제복을 입고 챙이 넓은 벙거지 모자 같은 걸 쓴 웬 아저씨가 나에게 술을 권하고 있다. 술을 강권하는 못된 꼰대 느낌은 아니다. 오른손으로 '싫으면 안 마셔도 돼'라고 말하는 듯한 제스처를 보이면서 왼손에 든 잔을 건넨다. 선한 눈매의 이 아저씨가 권하는 한 잔은 감사히 받아도 될 거 같다. 가까이서 보면 아무렇게나 후다닥 붓질한 거 같은데 조금 떨어져서 보면 그림에서 생기가 넘쳐 보인다. 붓질이 살아 움직이는 듯 하다. 한 순간을 대충 그린 거 같지만 확실히 "있어" 보인다는 점에서 모네나 르느와르 같은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들이 생각난다.  


Judith Leyster <The Merry Drinker, 1629>.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원본 촬영.

바로 옆에 비슷한 느낌의 그림이 있다. 이 아저씨도 선해 보이기는 한데 표정이나 자세가 '과해' 보인다. 약간 부담스럽다고나 할까. 평범한 일상의 인물이라기 보단 왠지 연극하는 사람(또는 광대) 같다. 하지만 표정은 역시 즐겁다. 앞선 그림과 제목도 같고 분위기도 비슷해서 같은 화가의 작품으로 생각했는데 Judith Leyster란 사람이다. 동료나 사제지간인가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Frans Hals의 제자였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여류화가였다고 한다. 당시 여성으로선 드물게 화가조합의 회원으로 활동했고 자기 스튜디오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Gerard van Honthorst <The Merry Fiddler, 1623>.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원본 촬영.

영국 코미디언 '미스터 빈'을 닮은 아저씨가 커튼을 젖히면서 한 잔 권하고 있다. 왼손엔 바이올린을 든 걸로 보아 바이올린 연주자다. 앞선 두 그림과 마찬가지로 술 드신 아저씨 표정이 선하다. 2차원 평면인데 아저씨가 커튼 밖으로 나올 것 같은 입체감이 신기했다. 설명을 보니 이 화가는 이탈리아에서 오랜 기간 유학을 해서 카라바조의 키아로스쿠로 기법(드라마틱한 빛과 어둠의 대조)을 그림에 활용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얼굴에 내리 쪼이는 환한 빛과 몸통의 어두움이 대조를 이루는 거 같기도 하고. 커튼과 옷의 화려한 색감도 인상적이다. 


Jacques Jordaens <The King Drinks, 1640>. 벨기에 왕립미술관 원본 촬영.

제대로 된 술판이다. 테이블 위에 안주거리로 벨기에 와플도 있고 빵도 있다. 왕관을 쓴 할아버지가 건배사 한마디 하셨는지 옆에서 '승진심사를 앞둔 대리'같은 사람이 소리 지르며 한껏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이에 질세라 할아버지 바로 뒤에 있는 사람은 볼이 터져 나갈 정도로 백파이프를 세게 불고 있다. 오른쪽 옆엔 아이가 응가를 했는지 아주머니가 엉덩이를 닦아 주고 있다. 이미 만취했는지 분위기가 난리도 아니다. 인물들이 다들 통통하고 건강해 보이는 게 왠지 Rubens 냄새도 난다. 이 작품의 진짜 의도가 '이렇게 재미나게 한 잔 합시다'인지 '이렇게 막 나가면 안된다'는 경고인지는 모르겠으나, 질펀하게 놀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자리였을 거 같다.


Jan Steen <The Drunken Couple, 1655-1665>.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원본 촬영.

부부가 완전히 취했다. 아주머니는 신발 한쪽은 벗어던진채 쓰러졌고 아저씨는 '술 더 가져와'를 외치는 거 같다. 얼마나 취했는지 뒤에 있는 사람들이 물건을 훔쳐가는 것도 모를 정도다. 나무벽에 부엉이 그림이 있다. 설명을 보니 17세기 네덜란드에선 부엉이가 멍청함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아마 이렇게 만취되도록 술 마시면서 부엉이처럼 멍청하게 살면 안된다는 교훈을 그린 그림으로 보인다. 


술이 들어간 그림들은 하나같이 재미있다. 술이 개인과 주변 상황을 그렇게 만드니까. 만일 소개한 작품 속으로 들어간다면, 맨 앞 군복입은 아저씨랑은 같이 한 잔 하고 싶다. 사람이 진실해 보이는 게 왠지 살아가는 이야기 편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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