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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예찬 Jan 11. 2024

생초보 아저씨의 미술관 도전기-29

This is Sparta!!

<Leonidas at Thermopylae, 1814>

- Jacques Louis David


오랜만에 영화 <300>을 봤다. 워낙 유명해서 이미 많은 이들이 알겠지만, 기원전 480년 크세르세스 1세의 페르시아 제국 군대가 테르모필레 계곡에서 레오니다스의 그리스 연합군과 벌인 전투를 그린 내용이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제라드 버틀러(Gerard Butler)의 열연이 압권이다. 특히 스파르타에게 굴복을 요구하는 건방진 페르시아 사신에게 "This is Sparta!!"라고 외치며 구덩이에 차넣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국가 안위를 책임지는 일국의 왕이 이 정도 배포는 있어야지. 


(좌) 레오니다스 조각 (스파르타 박물관), (우) 레오니다스 동상 (스파르타 시내)

루브르에 가기 몇 해 전 그리스 스파르타에 간 적이 있다. 영화 속 감동을 현지에서도 느껴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과거 영화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레오니다스의 웅혼한 기상은 온데간데 없었다. 옛날에 금송아지 깨나 키우던 스파르타는 역사 속에서만 존재하는 나라였다. 박물관과 거리에 있는 레오니다스 조각과 동상만이 여기가 스파르타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다비드 <테르모필레의 레오니다스>. 루브르 박물관 원본 촬영.

여러 해가 지난 후 루브르 박물관에서 레오니다스를 다시 만났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작품 속에서. 스파르타에서 본 조각/동상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스파르타에 있는 레오니다스는 임전무퇴 정신으로 똘똘 뭉친 용맹스러운 군인의 모습이었지만 다비드 작품 속에선 미남 정우성 배우가 영화에 출연한 것같은 느낌이었다. 무슨 장군이 이렇게 '깎아놓은 밤'처럼 매끈한지. 예상보다 훨씬 컸던 그림 크기에(3.95*5.31m) 놀랐던 기억도 난다. 영화까지 봤기 때문에 스토리를 추리하는 부담이 없어서 좋았다. 


정중앙에 있는 인물이 당연히 레오니다스겠지. 주인공 대우를 제대로 해줬다. 가장 멀끔하게 잘생기고 위엄있어 보인다. 다른 병사들이 다이나믹한 움직임을 보이는 반면,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존재 자체로 안정감을 준다. 주인공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건지, 레오니다스의 몸이 가장 하얗게 빛난다. 왼손에는 창과 방패를 들고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있다. 언제든 출정할 준비가 되어 있는 듯하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군사력 제일주의 스파르타의 왕이라면 그간 전투를 수도 없이 했을텐데 몸이 어찌 이리 매끈하기만 한지. 칼자국 같은 거 몇 개 그려줬으면 더 사실적이었을텐데(신고전주의는 인체를 이상화한다는 비판이 많다고 한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 봤다. 뒷쪽 바위에 글씨를 새기는 병사가 있다. 현장에선 잘 안보였는데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당시 어떤 시인이 전투가 끝난 후 썼다는 비문 내용이라 한다. 내용은 "여길 지나가는 나그네여, 스파르타 사람들에게 가서 전해 주시오. 당신의 법을 받을어 우리들 여기에 잠들었노라고." 라고 한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내던진 군인들을 위한 헌사다. 다비드는 이 문구를 그림 안에 새겨 넣음으로써 감상자의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한 거 같다. 그 뒤에 세 명의 병사가 월계관을 받들고 있는 건 승리에 대한 갈구를 표현한 게 아닐까 싶다(그러고 보니 오른쪽 나무에도 월계관이 걸려 있다). 


레오니다스 오른쪽엔 두 남자가 끌어 안고 뽀뽀(또는 귓속말?)하고 있다. 설명을 보니 두 사람은 부자지간으로 추정되는데 살아서 돌아갈 수 없음을 알고 서로 작별인사하는 거라고 한다. 저 뒤 계곡 길에는 마차에 짐을 싣고 머리에는 물동이를 이고 피난가는 사람들의 행렬도 보이고, 나무 뒤에 있는 두 병사는 진군나팔을 불고 있다. 레오니다스 옆에는 출정을 위해 신발끈을 조이는 젊은 병사도 보인다. 역시 대단한 화가다. 한 작품 안에 감상 포인트를 이렇게 여럿 남겨 놓았다. 물론 내가 못찾아서 그렇지 그 외에도 더 있을 것이다. 


신고전주의의 태두(泰斗) 다비드의 작품답게 그림이 깔끔하다. 보는 사람이 불안하지 않게 구도가 안정적이다. 레오니다스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이 완벽하다. 또 왼쪽 벽에 글씨를 새기고 있는 병사와 오른쪽 나팔 부는 병사간에도 균형이 잡혀 있다. 내용도 드라마틱하거나 붓질이 꿈틀대는 느낌도 없다. 신고전주의는 그리스/로마 문명을 동경한다더니, 배경에 있는 건물 양식이나 사람들의 복장이 모두 그리스식이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그리스 시대 전투 장면임을 알 수 있다. 


다비드는 왜 이 그림을 그렸을까. 곰브리치 <서양미술사>에 따르면, 프랑스 대혁명은 역사적 사건에 대해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프랑스 혁명가들은 스스로를 새로 태어난 그리스와 로마 시민으로 자처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다비드는 그리스 역사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모티브로 해서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한 것 같다. 이 그림이 완성된 1814년이면 유럽 국가들이 힘을 합쳐 나폴레옹의 침략에 대항하던 시기였으므로 다비드는 유럽 국가들을 페르시아 대군에, 프랑스를 스파르타 300명에 비유했다고 볼 수 있다. 


다비드의 그림을 보면 왠지 MBTI 유형 중 극T의 느낌이 난다. 항상 정돈되어 있고 깔끔해서 보기에도 편하다. 예술을 지나치게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사용했다는 일부 비판이 있을 수 있겠으나, 그의 재능은 모든 비판을 억누를 정도로 압도적이다. 


그림 속 멋진 레오니다스가 "This is Sparta!"를 외치는 모습을 다시 한 번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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