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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예찬 Jan 14. 2024

생초보 아저씨의 미술관 도전기-30

고흐 자화상, 보는 내가 불안불안

<Self-Portrait with Grey Felt Hat, 1887>

- Vincent van Gogh


아마 쉰 살쯤 됐을 때였던 것같다. 여행가서 사진을 찍을 때 웬만하면 프레임 속에 나를 담지 않기 시작했다. 간혹 인증샷을 남기더라도 카메라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찍었다. 그래야 얼굴 주름이 적나라하게 나오지 않으니까. 내가 기억하고 싶은 내 얼굴과 휴대폰에 찍힌 얼굴이 너무 달라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인물자신이 있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자기 얼굴을 수십 점이나 그린 화가들이 있다. 가장 유명한 두 거장이 바로 고흐(Vincent van Gogh)와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다.


(좌) <Self-Portrait as a Painter, 1887-1888>, (우) <Self-Portrait with Grey Felt Hat, 1887>.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고흐 미술관에 다녀왔다. 1층에 자화상만 십여 점이 연달아 걸려 있었다. 고흐가 평생 약 35점의 자화상을 남겼다고 하니, 이 미술관에만 절반쯤 소장되어 있는 셈이다.


잘 알다시피 고흐 자화상은 사진을 보듯 정교하거나 깔끔하지는 않다. 모델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대략적인 느낌만 알 수 있을 정도다. 그의 많은 작품에 나타나는 특징처럼 붓질이 거칠고 물감이 겹겹이 두텁게 쌓여 있다. 차분하고 안정적이지 않고 왠지 격정적이고 불안하다. 평온하지 않은 정신상태와 극심한 감정 기복이 느겨진다. 이런 퀄리티라면 고객이 돈 주고 초상화를 맡길 것같지 않다.


(좌) 34세 때 초상화(내셔널 갤러리), (우) 63세 때 초상화(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렘브란트는 판화까지 포함하면 수십 년에 걸쳐 약 100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고흐와 달리 그림 톤이 차분하다. 오랜 기간에 걸쳐 그려왔기 때문에 세월의 흔적이 작품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롤러코스터를 타듯 격변했던 시간의 조각들도 작품에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한창 잘 나갈 때는 누구도 부럽지 않을 자신감과 패기가 넘치는 얼굴이지만, 노년에는 세상 모든 번민과 부귀영화에 대한 열망을 다 내려 놓은 편안한 모습이다. 마치 세상의 모든 걸 이미 다 누려서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는 얼굴이다.


고흐의 작품이 인물을 생긴 그대로 그리지 않은 무책임한 자화상이라면, 렘브란트 자화상은 지극히 사실적이다. 초라해 보일 수도 있는 노년의 얼굴조차 그대로 오픈했다. 어찌 보면 상남자 스타일이다. '그래, 나 이제 망했어. 근데 뭐 어쩔 건데!' 하는 식으로 본인의 주름진 얼굴을 정직하게 드러냈다.


이 대목에서 궁금한 점 하나가 있다. 고흐나 렘브란트는 왜 이렇게 자화상을 많이 그렸을까. 우선 모델을 살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흐는 동생한테 돈 받아 쓰는 처지였는데 모델을 고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렘브란트도 '야경' 이후 커리어가 나락으로 빠졌으니 비슷한 입장이었을 것이고.


또 하나 추정할 수 있는 건, 나 자신만큼 내 말을 잘 듣는 모델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화가가 원하는 자세를 모델이 제대로, 장시간 취하지 못했겠지. 남 때문에 속 썩느니 자기가 스스로 모델이 되는 길을 모색했을 수도 있다. 또 돈 받고 남의 얼굴을 그리자면 고객의 요구를 들어줘야 할테니 내가 하고 싶은대로 그리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얼굴이야 내 맘대로 창의적인 시도도 해볼 수 있으니 그 과정에서 실력도 향상됐을 것이다.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다양한 버전의 자화상을 감상할 수 있게 됐다.


(좌) 윤두서 자화상(출처: 한겨레신문), (우) 영화 <관상> 포스터

우리나라 자화상도 고흐나 렘브란트 못지 않은 역작이다. 바로 윤두서 자화상이다. 호랑이처럼 무서운 눈빛으로 정면을 쏘아보며 그림을 보는 사람을 압도해 버린다. 렘브란트 자화상에서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생생하게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윤두서 자화상도 이에 못지 않게 사실적이다. 영화 <관상> 포스터에서 윤두서 자화상을 패러디했던 송강호 배우 얼굴이 갑자기 떠오른다.


전문가들의 예술적 판단과는 별개로, 고흐의 자화상은 왠지 보는 내가 불안하다. 뭔가 사건이 터지기 직전의 긴박한 상황같다. 고흐가 귀를 자르고 자살을 시도했던 감정 기복이 그림에서 느껴지는 듯하다. 게다가 사실적이지도 않고.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깔끔하고 정확하게 생긴 그대로, 세월의 변화마저 얼굴에 그대로 녹인 렘브란트 작품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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