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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예찬 Jan 15. 2024

생초보 아저씨의 미술관 도전기-31

고흐는 극찬했다는데 나는..

<Isaac and Rebecca, known as 'The Jewish Bride', 1667>

- Rembrandt


운 좋게도 세계 유수의 미술관 여러 곳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덕분에 학창시절 미술책에서 도판으로 만났던 유명 작품들을 바로 앞에서 감상하는 호사를 누렸다. 잘 모르는 작품이라도 화가가 월드클래스면 일부러라도 더 유심히 보곤 했다. 그냥 지나쳤는데 나중에 이게 엄청난 명작이라고들 하면 후회할 거 같아서.  


<Isaac and Rebecca, known as 'The Jewish Bride'>.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원본 촬영.

그렇게 일부러(?) 자세히 들여다 본 작품 중 하나가 <이삭과 레베카, 일명 유대인 신부>다. 그 유명한 렘브란트의 작품이니 뭔가 있겠지 하는 경건한 마음으로 그림을 바라봤다. 일단 초견에는 중년 남성이 딸 정도 밖에 안돼 보이는 아가씨의 가슴에 손을 얹고 있는 게 보였다. 변태인가? 옛날 춘궁기 때 가난한 집에 돈 빌려줬다가 못갚으면 딸 뺏어가는 악덕 고리대금업자 '박첨지' 느낌이었다. 이 그림이 대체 뭐가 대단한데 네덜란드 국보 1호인 '야경' 바로 앞에 걸려 있을까 궁금했다.


제목이 Isaac and Rebecca니까 우리말로 하면 '이삭과 리브가'다. 아,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그 부인 리브가 이야기구나. 아브라함이 자기 고향 땅으로 종을 보내 아들 이삭의 신붓감을 찾아오라고 했다는 스토리다. 그런데 이게 왜 명작일까. 내 눈에는 그저 그런데. 그리고 유대인 신부는 또 뭐지?


자세한 내용을 찾아보기 전에 우선 그림을 찬찬히 봤다. 남자에 비해 훨씬 어려보이는 여인이 목걸이, 팔찌, 반지 등을 착용하고 있고 예복 같은 걸 입고 있는 걸로 보아 결혼식 같긴 하다. 모나리자의 미소보다는 살짝 덜하지만 신부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가 있었다. 어린 신부의 수줍은 심정이 드러나 있다고 볼 수 있다. 늙은 남편 얼굴은 인생이라는 긴 강을 건너온 렘브란트 말년 자화상처럼 평안해 보인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남편의 오른팔에 표현된 붓질이었다. 노란색 톤이 전체적으로 환한 팔뚝을 가까이서 보니 물감을 떡칠(?)을 해놨다. 붓질의 흔적이 꿈틀거리기도 했다. 다른 렘브란트 작품들은 대부분 표면이 매끈한데 이 작품은 달랐다. 이 그림을 그린 때가 사망하기 2년 전인데 렘브란트는 말년에 이르러서까지 새로운 기법을 연구했나 보다.


<Isaac and Rebecca Spied upon by Abimelech>. <1600-1700 Dutch Golden Age> p.265

렘브란트가 이 작품에 대한 설명을 남겨놓지 않아서 사람들이 처음엔 무슨 내용인지 몰랐는데 1662년에 그린 '이삭과 리브가'라는 스케치와 구도가 흡사해서 작품명을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1600-1700, Dutch Golden Age>란 책에 따르면, 1833년에 암스테르담의 한 미술 컬렉터(Adriaan van der Hoop)가 이 작품을 살 때 작품 속 여인을 '유대인 신부'라고 한 이후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절대고수의 수준은 범인(凡人)이 이해하기도 어려운가 보다. 위 책에 따르면 고흐는 이 작품을 극찬했다고 한다. 고흐는 '마른 빵 껍데기 한 조각만 먹더라도 이 작품 앞에서 2주간 앉아 있을 수 있다면 내 인생의 10년을 내줄 수 있다(He would give ten years of his life to be allowed to sit for a fortnight in front of the picture with nothing but a crust of dry bread to eat)'라고 했다고. 아마 이 작품이 좋다는 걸 친구에게 말하면서 약간 과장하지 않았을까 싶다. 마치 우리가 뭔가를 바랄 때 'ㅇㅇ만 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어'라고 하는 것처럼. 뛰어난 예술 작품을 감상하다가 갑자기 가슴이 뛰거나 흥분한다는 소위 스탕달 신드롬(Stendhal syndrome)처럼 고흐가 이 작품을 매우 높이 평가한 건 사실인 것 같다. 이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기도 하다. 고흐 작품을 보면 물갑을 두텁게 덧칠한 경우가 많은데 어쩌면 여기서 '떡칠' 기법을 배운 것일 수도 있다.


<내밀한 미술사, 양정윤>에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불규칙적으로 발린 온갖 색의 물감이 광기를 내뿜고 있고, 심지어 막대기나 나이프로 두꺼운 물감층을 긁어낸 자국도 선명히 남아 있다. 음악을 완성하기 위해 인간의 목소리까지도 통합된 우주의 세계로 만들어 버린 베토벤 9번 교향곡처럼 그 무질서한 물감 자국들은 전율을 일으킨다." 미술작품을 감상하면서 베토벤 교향곡을 떠올릴 수 있는 전문가의 수준은 초보자로선 경이롭기만 하다. 같은 재료로 전혀 다른 맛의 요리를 만들어 내는 장인의 솜씨가 바로 이런 건가 보다.


이 작품을 보고 고흐처럼 흥분하지는 않았지만, 생초보 하수이기 때문이 아니라 공감 포인트가 달라서 그런 거라고 믿고 싶다. 사람마다 보고 느끼는 게 다 다른 거니까. 메시만큼 축구 못한다고 좌절하는 사람이 어이없는 거지. 나는 나대로 즐기면 되는 거니까. 그래, <유대인 신부> 나도 훌륭하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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