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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예찬 Jan 18. 2024

생초보 아저씨의 미술관 도전기-32

고흐(Gogh)따라 삼천리

평소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 곳이나 위대한 인물의 흔적이 있는 장소에 방문하는 걸 좋아한다. 서울에서도 하루 날을 잡아 '옛 ㅇㅇ터'라고 쓰여진 곳들을 찾아다닌 적이 있고, 영화 <명량>을 보고 나서는 아산 현충사와 진도 울돌목 전투현장을 다녀오곤 했다.


네덜란드에서도 여행 컨셉은 그대로 가져갔다. 주로 유명 화가들이 살던 곳을 찾아가 그들의 흔적을 느껴보고자 했다. 오늘은 17세기 Dutch Golden Age이후 3백여 년 만에 네덜란드가 배출한 월드클래스 화가 Vincent van  Gogh가 네덜란드에서 살았던 자취를 따라가 본 기억들을 공유하고자 한다.  


(좌) 고흐 생가터에 세워진 고흐 기념관, (우) 1853년 3월 30일 여기서 태어났음을 알려주는 석판.

고흐의 '예술적 포텐'이 터진 때는 프랑스로 간 이후이지만 위대함의 씨앗이 뿌려진 곳은 고국 네덜란드다. 1853년 준더트(Zundert)란 동네에서 개혁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천재는 평범함을 거부하는지, 고흐는 초등학교까지는 잘 마쳤으나 이후 Secondary school 시기에 자퇴를 하고 가방끈을 여기서 끊어버렸다.


(좌) 고흐 아버지가 사역한 교회. 광장 이름이 빈센트 반 고흐 광장이다, (우) 광장에 있는 고흐와 테오 동상,

준더트란 곳은 네덜란드-벨기에 국경지방 작은 마을이었다. 고흐가 태어난 곳이 아니었더라면 인근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모를 것 같은 평범한 동네다. 어디에나 다 있는 마트 두 개와 식당들, 동네 사람들이나 이용할 만한 가게들 외에는 특별히 볼만한 것들이 없었다.


생가터에는 고흐 기념관이 들어섰고 거기서 도보 1-2분 거리엔 고흐 아버지가 사역했던 작은 교회가 있었다. 준더트에서 16살까지 살았으니 이곳 골목골목을 뛰어다니고 이 교회를 내 집 삼아 수시로 들락거렸을 것이다. 교회 앞 작은 광장엔 고흐와 동생 테오의 동상이 있었고 광장 이름도 '빈센트 반 고흐 광장'이었다. 고흐가 태어난 동네라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이 충만할테니, 관련된 모든 것에 고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충분히 이해된다.  


(좌) 구필화랑이 있었던 건물, (우) 건물 입구에 있는 동판. 1869-1873까지 고흐가 근무했던 Goupil&Cie 라고 쓰여 있다.

우리로 치면 중3-고1 정도 되는 나이에 자퇴하고 집에 있으니 어느 부모인들 맘이 편했을까. 그것도 장남인데. 결국 화상(畵商)을 하던 큰아버지 주선으로 고흐는 헤이그 미술상인 구필화랑(Goupil & Cie)으로 보내졌다. 구필화랑은 헤이그 중심가에 있는 3층짜리 주상복합 건물에 있었다. 지금은 건물 1층이 옷가게로 바뀌었지만 입구엔 고흐가 1869년부터 1873년까지 근무했다는 동판이 붙어 있다. 건물 위층에 사는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 세계 미술사에 획을 그은 사람이 4년간 지냈던 건물에 내가 살고 있다니, 내가 자는 이 공간이 약 150년 전 고흐가 왔다갔다 했던 곳이라고!! 미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루하루가 감개무량하지 않을까.


고흐는 헤이그를 떠난 후 구필화랑 런던지점과 파리지점에서 근무를 했고 벨기에 보리나주(Borinage)라는 탄광지역에서 전도사로도 활동하는 등 방황을 거듭했다. 자신에게 세기적인 예술가 기질이 있음을 발견하지 못한 채.


(좌) <Still Life with Bible, 1885>, (중) 작품의 모델이었다는 성경책, (우) 교회 옆건물 벽면 모습.

그는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1881년 봄 가족들이 있는 Etten이란 지역으로 이주했다. 에텐은 고흐가 사실상 화가로서의 길에 들어선 곳이다. 당시 행정관청에 등록한 주민등록 사본을 보니 자기 직업을 Artist라고 적어놨다. 에텐의 농촌에서 고흐는 농민들의 실제 생활상을 보면서 자신이 앞으로 뭘 그려야 할 지 결정했다고 한다. 아마 나중에 누에넌(Nuenen)에서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린 심정적 기초가 여기에서 다져진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가 사역한 교회 안에는 고흐가 그린 성경책 모델이었던 성경이 전시되어 있었고, 옆 건물 벽엔 고흐와 테오가 주고받은 편지 사본과 자화상 사본이 그려져 있었다. 이 동네 역시 고흐의 자취가 있는 곳임을 만천하에 자랑하려는 듯했다.


(좌) 고흐와 시엔이 살던 집 터에 새로 지어진 아파트, (중) 고흐가 살았던 집이라 쓰여진 동판, (우) 시엔을 그린 <Sorrow>.

에텐에서는 그리 오래 지내지 않았다. 사촌 누이를 사랑하는 문제로 아버지와 싸우고 집을 나왔기 때문이다. 1881년 크리스마스날 고흐는 전에 구필화랑에서 근무했던 헤이그로 왔다. 헤이그에서는 당시 잘 나가던 화가였던 사촌매형 안톤 모베(Anton Mauve)로부터 그림을 배우면서 실력을 키워나갔다.


그 유명한 화가가 매형이면 그림이나 진득하게 잘 배우면 좋았을 것을..고흐는 갑자기 사고를 쳤다. 이듬해인 1882년 초 시엔(Sien)이라는 한 여인을 만났는데 그 여자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게 문제였다. 전직 성매매녀에다 5살짜리 애가 딸린(게다가 임신 중) 사람이었다. 가족이나 친구라면 누구든 당연히 반대했을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사랑의 불이 붙은 상태이니 누구의 조언도 먹히지 않았다. 결국 고흐는 그녀의 가족과 동거를 했고 1년 반쯤 후에 헤어졌다.



(좌) 누에넌 교회, (중) 고흐의 <Congregation Leaving the Reformed Church>, (우) 광장에 있는 <감자 먹는 사람들> 동상.

몇달 간 방황하다가 고흐는 1883년 12월 다시 부모님이 계신 누에넌(Nuenen)으로 갔다. 방황하던 사람들이 결국에 돌아갈 곳은 부모와 가족인 셈이다. 여기서 그린 작품 <Congregation Leaving the Reformed Church in Nuenen>의 모델이 된 교회를 직접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쯤에서 자리잡고 그림을 그렸단 말이지..' 하는 생각을 하며 150년 전의 천재를 다시 한 번 떠올렸다. Zundert와 Etten이 그러했듯, Nuenen도 고흐로 먹고 사는 동네였다. 기념관이 있는 건 물론이고, 광장에 고흐 동상과 <감자 먹는 사람들> 동상도 있었다.


고흐는 동생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는 게 찜찜했나 보다. 누에넌에 머물던 시절 처음으로 자기가 그린 작품들을 보낼테니 파리에서 팔아서 쓰라고 제의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파리의 미술품 구매자들은 색감이 화려한 작품을 선호할 때라 어두컴컴한 느낌의 고흐 작품은 좋아하지 않았다고. 약 2년에 걸친 누에넌 생활을 마치고 고흐는 1885년말 안트워프 미술아카데미로 갔고 이후 다시 네덜란드에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에는 파리로, 아를로, 정신병원으로, 오베르쉬아즈로..


고흐는 주로 프랑스에서 작품활동을 했다. 그의 대작 <해바라기>, <밤의 카페 테라스>, <별이 빛나는 밤> 등도 다 프랑스에 있을 때 그린 것들이다. 그런 이유로 고흐가 프랑스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손흥민이 EPL에서 맹활약을 한다고 그가 잉글랜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격이다.


프랑스에서 그의 재능이 만개하긴 했지만 결국 고흐의 위대함은 고국 네덜란드에서 비롯되었고 그의 자취는 여전히 네덜란드 곳곳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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