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상예찬 Jan 22. 2024

생초보 아저씨의 미술관 도전기-33

평범한 일상이 가장 아름답다.

<The Milkmaid, 1658-60>

- Johannes Vermeer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 지난 하루를 돌이켜 본다. 오늘 뭐했지? 가끔 한 번씩은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날도 있지만 대부분은 뭘하고 하루를 보냈는지 딱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하루 세 끼 밥 먹고, 낮에 운동하고, 저녁엔 맥주 한 잔하며 유튜브를 보거나 책을 읽었다. 일부러 기록해 놓지 않으면 며칠 뒤엔 생각조차 나지 않을 '별 볼일 없는' 순간의 연속이다. 이렇게 무색무취하게 평범하게 사는 게 맞나?


그런데 요즘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상황을 보면 이 하찮은 일상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내가 아침에 평온하게 시리얼에 우유를 부을 수 있을까. 점심에 계란 두 알 넣어서 얼큰하게 끓인 라면을 먹을 수 있을까. 저녁에 맥주 한 잔? 언감생심이다. 


우리가 매일 누리는 평범한 일상이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라 삶의 가장 크고 중요한 테마임을 발견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17세기 네덜란드 장르화가들이다. 이전에는 그리스/로마 신화, 종교, 역사적 영웅의 활약상이 회화의 주요 테마였으나,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처음으로 보통 사람들의 일상이 핵심 주제로 부각됐다. 화가가 숨겨놓은 복선이나 상징없이 일상의 한 순간을 스냅사진 찍듯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 당시에 네덜란드에서 장르화가 발전한 것은 네덜란드가 칼뱅주의 신교를 받아들인 것과 관련이 있다. 이제 과거와 달리 회화가 종교에 예속되지 않아 화가들이 종교화 이외에 다른 전문분야를 찾아 나서야 했고, 신교가 세속적 가치도 중시하다 보니 일상생활의 아름다움을 강조한 장르화가 만개할 수 있었다. 


Johannes Vermeer <The Milkmaid>.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어떤 여인이 식탁 위 그릇에 우유를 따르고 있다. 복장으로 봐서는 귀부인 느낌은 없고 하녀같다. 부엌에서 풍기는 느낌상 그리 '있는 집' 같지도 않다. 벽 뒤에 못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고 오른쪽 아래엔 온전해 보이지 않는 타일이 벽에 붙어 있다. 식탁 위에 있는 음식들이나 벽에 걸린 바구니와 식기도 서민스럽다. 다만 눈길을 끄는 것은 파란색 치마 색깔이 선명해서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다. 이 그림에는 어떤 상징도 복선도 없다. 한 여인이 우유를 따르는 일상적인 장면이 주는 아름다움과 감동은 이미 신화나 성경 속 주인공을 넘어섰다.  


Pieter de Hooch <A Mother delousing her Child's Hair known as a 'Mother's Duty'>.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정갈한 디자인에 깨끗하게 정리된 네덜란드 전통 가옥에서 엄마가 아이의 머리에서 이를 잡아주고 있다. 지금 50대인 나도 국민학교 시절 엄마가 참빗으로 머리를 빗어주며 서캐를 골라내곤 했으니 17세기엔 오죽 했을까. 집안 살림 뿐만 아니라 아이들 위생도 전적으로 엄마가 챙겨주는 게 당시의 미덕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 또한 화가가 특별한 의미를 그림 속에 숨겨놓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보는 이 장면을 있는 그대로 표현했고 그 자체로 편안하고 아름답다. 

 

Jan Steen <The Drunken Couple>.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17세기 장르화가들은 평온한 일상 뿐만 아니라 도덕적 교훈을 담은 작품도 남겼다. 부부가 '술이 떡이 되도록' 마셔서 인사불성 상태다. 특히 부인은 정신을 잃고 뻗어버린 상태다. 그러다 보니 뒤쪽 도둑들이 물건을 훔쳐가는 것도 모르고 있다. 화가는 벽에 붙어 있는 부엉이 그림으로 술 취한 부부에게 경고하고 있다. 당시에 부엉이는 가장 멍청한 동물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즉 도둑이 든 것도 모를 정도로 술에 취해 살지 말라는 교훈이다. 


Jan Steen <Couple in a bedchamber>. Hague Bredius Museum.

Jan Steen은 성적 타락을 경고하는 작품도 남겼다. 딱 보기에도 성매매 업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미 술을 잔뜩 먹었는지 코가 빨간 늙수그레한 남자가 여성의 치마를 들어 올리려 하고 있다. 여성의 복장이나 표정, 아무렇게나 벗어제낀 빨간 스타킹과 슬리퍼로 보아 이 여성은 직업여성인 것 같다. 수백년 전 네덜란드에도 이 직업을 가진 여성과 업소를 찾는 남성은 많았을 터, 얀 스틴은 작품을 통해 성적 타락을 경고하고 있다. 


David Teniers <Peasant Kermis(Festival)>.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가정 내 여성의 역할이나 주색(酒色)에 대한 교훈 이외에도 당시 사람들의 놀이문화 또한 장르화를 통해 알 수 있다. 동네 잔치가 벌어졌다. 사람들이 모여 먹고 마시며 놀고 있다. 검은색 옷을 입은 남자가 드럼통 위에 올라서서 백파이프를 불고 있고 남녀 몇 쌍이 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왼쪽 하단에 있는 남자는 대낮에 벌써 만취했나 보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해 아내가 부축하고 있다. 보기만 해도 흥겹다. 네덜란드에서 옛날 놀이문화나 복식(服飾)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런 그림들이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겠다. 


청년기에는 폼나는 무언가를 성취해야만 잘 사는 것이라 생각했다. 직장에서도 남들보다 더 인정받고 더 빨리 승진해야 제대로 사는 것 같았다. 세속적 성공 외에 다른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르화를 보면서 삶의 우선순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목표를 위해 열심히 달려가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일상의 소소한 행복도 결코 그에 못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훨씬 더 값진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50년 이상 살아보니 '인생 별 거 없더라'는 선배들의 말이 조금씩 와닿는다. 요새는 아침에 일어나 시리얼에 우유를 붓고, 아이들 아침을 챙겨주고, 저녁에 간식거리를 사다주고, 밤에 와이프랑 맥주 한 잔 하는 일상만큼 소중한 것이 없다. 


17세기 네덜란드 장르화가들이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의 한 중년 남성에게 인생을 가르쳐줬다. 거창한 미래만 쳐다보지 말고 평범한 일상의 매순간을 즐기라고.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작가의 이전글 생초보 아저씨의 미술관 도전기-3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