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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예찬 Jan 24. 2024

생초보 아저씨의 미술관 도전기-35

내가 경험한 스탕달 신드롬(4-1)

<Rape of Proserpina, 1621-22>

- Gian Lorenzo Bernini


스탕달 신드롬(Stendhal Syndrome) 이라는 게 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미술품이나 예술작품을 보았을 때 그 위대함과 아우라에 압도되어 순간적으로 이성이 마비되고 신체적으로도 이상을 느끼는 증상을 말한다. 빈센트 반 고흐도 렘브란트의 <유대인 신부>란 작품 앞에서 이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멋진 예술작품 봤다고 정신이 혼미해진다는 게 사실일까? 괜히 고상한 척 하려고 무한한 감동을 받은 것처럼 거짓말 하는 것은 아닐까? 내 경험을 이야기하면, 어느 정도 진짜다.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몇 번 있다. 정신과 육체에 이상한 증상이 올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압도적으로 탁월한 작품 앞에서 그저 '미쳤다'라는 말만 되뇌이며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 이 느낌은 설명이 불가하다. 직접 느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귀한 감정이다.


Bernini <Rape of Proserpina>.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Borghese Museum)에서 그런 '유사' 스탕달 신드롬을 느꼈다. 바로 17세기 바로크 시대 조각가 베르니니의 작품들을 만났을 때였다. 이 <페르세포네의 납치>라는 작품은 제우스와 데메테르(대지의 여신) 사이에서 태어난 딸인 페르세포네가 지하세계의 신 하데스에게 납치되어 지하세계로 끌려가는 장면이다. 베르니니 작품들이 Must-See라는 이야기를 전날 듣고 미리 그리스 신화를 읽어본 게 다행이었다.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머리엔 왕관을 쓰고 턱수염과 구렛나룻이 덥수룩한 '상남자'가 가녀린 한 여인을 끌어 안고 있다. 그런데 여인이 손으로 남자의 얼굴을 밀치고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치는 것으로 보아 강제로 안겨있는 상황이다. 여인은 끌려가지 않으려 반항하고 있다. 남자는 '아무리 용을 써봐야 소용없어'라는 식의 의기양양한 얼굴이고, 여자는 '제발 나를 놓아줘'라고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애원하는 표정이다. 둘의 얼굴만 봐도 상황을 금방 이해할 수 있다. 곰브리치 <서양미술사>에 '얼굴 표정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베르니니를 능가할 사람은 별로 없을 정도다'라고 언급되어 있는 걸 보면 전문가들도 비슷하게 평가하나 보다. 남자의 가슴과 허벅지 근육도 웬만한 보디빌더 뺨칠 정도로 남성성을 부각시켰다. 또 여인을 강하게 끌어 당기는 오른팔의 근육과 힘줄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Rape of Proserpina> 일부 확대.


<Rape of Proserpina> 얼굴 부분 확대.

이 작품의 압권은 남자가 잡고 있는 여인의 왼쪽 허벅지와 눈물이다. 수제비 반죽에 손을 꾹 눌렀을 때 그 자국이 남는 것처럼, 남자의 손가락 힘에 허벅지 피부가 쑥 들어갔다. 밀가루 반죽도 아니고 단단한 대리석인데 이게 가능하다니!! 납치 순간의 재현도 완벽해서 마치 카메라 셔터 1/10,000 스피드로 찍은 것 같다. 게다가 납치되지 않으려고 온갖 힘을 쓸 때 흘러나오는 눈물까지 표현했다. 보는 내내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사람의 능력이 이 정도까지라니. 실물을 본 사람은 누구나 수긍할 것이다. 이건 말도 안되는 작품이라는 것을.


Bernini <Apollo and Daphne>.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감동에 젖어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던 또 하나의 작품이 바로 <아폴로와 다프네>이다. 이 작품 역시 그리스 신화의 한 장면이다. 


아폴론은 괴물뱀 피톤을 활로 쏴죽이고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 자부했다. 자기 혼자 잘난 맛에 살면 될 것을, 하필 능력자 큐피드를 건드리는 대실수를 저질렀다. 작은 활을 메고 다니는 큐피드를 조롱했던 것이다. 상처받은 큐피드는 아폴론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했다. 즉 아폴론에겐 황금화살을 쏴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바로 사랑에 빠지게 하고, 아폴론이 사모하는 숲의 요정 다프네에겐 납화살을 쏘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증오하게 만들었다. 


아폴론은 다프네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지만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는 아폴론을 증오하면서 전력을 다해 도망갔다. 아폴론에게 잡히기 직전 아버지인 강의 신 페네이오스에게 호소해서 자신의 외모를 바꿔서라도 이 지긋지긋한 녀석을 떼내달라고 했다. 예쁜 외모를 바꿔달라고까지 할 정도면 아폴론이 얼마나 싫었다는 걸까. 결국 아버지는 딸의 간청을 받아들여 그녀를 월계수 나무로 만들었다. 신화 스토리에 맞추고자 했는지, 그리스어로 월계수를 다프니(Δάφνη)라고 한단다.


<Apollo and Daphne> 일부 확대.

베르니니는 아폴론의 손길이 다프네에게 닿을락 말락 하는 순간을 묘사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나뭇잎으로 바뀌고 팔은 가지로 변해가고 있다. 또 그녀의 발은 뿌리와 하나가 되어 가는 중이다. 도망가는 다프네와 그녀를 잡으려 손을 뻗치는 아폴론의 동작이 다이나믹하다. 납화살의 효능이 제대로인지 아폴론이 싫어 죽겠는 그녀의 짜증나고 두려운 눈빛이 생생하다. 이 작품 역시 최고급 DSLR 카메라로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한 것같다. 아폴론의 매끄러운 몸매와 다프네의 여성스럽고 부드러운 피부도 완벽히 표현했다. 몸 좋은 모델들이 바로 앞에서 연기하는 것을 사진찍은 듯하다. 돌을 깎아서 사람의 감정을 이렇게 표현할수 있다고?? 볼수록 감탄을 연발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상 스탕달 신드롬이었다.


세계 유명 미술관 여러 군데를 가보고 수많은 명작들을 감상했지만 정신줄 놓고 한동한 멍하니 바라보기만 한 건 베르니니의 이 작품들이 처음이었다(감사하게도 그 후 세 번이나 더 그런 감정을 경험했다). 로마에 가신다면 꼭 보르게세 미술관에 가보실 것을 추천한다. 

* 단, 그리스 신화 관련 부분은 꼭 읽고 가시길!


p.s.) 작품의 예술성과 별개로, 두 작품 모두 스토리상 안타까운 점이 있다. 하데스나 아폴론이나 왜 굳이 여인을 납치하고 스토킹을 했을까. 이성에게 사랑에 빠졌으면 데이트 신청을 하고 거절당하면 그냥 물러섰어야지. 신들이 모양 빠지게시리. 더구나 아폴론은 다프네가 나무로 변한 이후에도 여전한 사랑의 표시로 월계수를 쓰고 다니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어이쿠, 그건 사랑이 아니라 범죄야. 이 양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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