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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예찬 Jan 27. 2024

생초보 아저씨의 미술관 도전기-37

내가 경험한 스탕달 신드롬(4-3)

<Terrace of a cafe at night, 1888>

- Vincent van Gogh


학창시절 그림 그리기에 완전 젬병이었다. 매주 겨우 1시간 있는 미술시간도 지겹기만 했다. 나중엔 그림이라면 아예 질색을 하기까지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외국에 살 기회가 있을 때에도 미술관은 근처에 사진찍으러 갈 때 외엔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살던 중 약 10년 전 서울역 간이서점에서 기차 시간 기다리며 어떤 책을 만지작 거리다가 이 작품을 만났다. 이후 내 삶에 그림이 들어왔다.


김선현 <그림의 힘> p17 도판.

제목이 <밤의 카페 테라스>라고 했다. 화가는 그 유명한 빈센트 반 고흐. 그 무렵 고흐에 대해선 지극히 상식적인 조각 지식들 몇 개만 알고 있었다. 평생 동생 등쳐먹고 살았다느니, 술 마시다가 귀를 잘랐다느니, 정신병으로 권총 자살을 시도했다느니 하는. 주변에 있으면 상종도 하지 않을 것 같은 비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인 막장인생이 이런 작품을 그렸다고? 언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설명을 읽기 전에 그림부터 한동안 들여다 봤다. 일단은 까페의 노란색 차양 아래 테이블에 앉아 맥주 한 잔하며 멍때리고 싶었다. 노천 까페이니 밖에 지나다니는 사람들 구경도 하면서. 당시 회사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잠시 쉴 틈이 필요해서 그런 생각이 들었나 보다. 원래 시끌벅적한 걸 안좋아하지만 저런 까페라면 옆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도 흥겨웠을 것 같다. 모든 테이블이 만석이었다면 좀 답답했을텐데 다행히 앞쪽은 자리가 비어 있어 있다. 보는 사람도 왠지 여유롭다. 술을 잘 못하는 체질이지만 저런 아름다운 분위기라면 생전 처음으로 맥주 1000cc도 거뜬히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늘과 별도 아름다웠다. 밤인데 하늘 색깔이 파랬다. 나중에 고흐의 다른 작품들을 보니 밤하늘을 검정색 대신 이렇게 파란색을 사용한 게 여럿 있더라. 아이디어가 신선했다. 나는 어릴 때 미술시간에 하늘을 그릴 때면 낮엔 무조건 하늘색, 밤엔 검정색으로 처리했는데. 별 모양도 특이했다. 보통 우리가 별이라고 하면 다섯 개의 각이 있는, 월드컵 우승국 유니폼에 새겨진 별을 떠올리는데 당시 고흐는 그냥 물감을 꾹 찍어 눌렀다. 오히려 이게 더 신선했다. 


자갈로 된 길바닥(cobbled street)도 운치있었다. 중세유럽 마차가 다니던 좁은 골목길 바닥이 상상되는 길이었다. 자갈길 색깔이 어디는 노란색이고 어디는 보라색인 것도 특이했지만 나름 예뻤다. 


크뢸러-뮐러 미술관 입구.
<Terrace of a cafe at night> 원본. 

도판으로 이 작품을 만나고 5년 후, 나는 네덜란드 크뢸러-뮐러 미술관에서 진품을 마주했다. 오랜동안 가슴에 품고 늘 기억저장고 맨 앞에 모셔둔 마음의 보물을 바로 1미터 앞에서!!  Messi의 플레이를 보기 위해 수천 킬로를 날아온 열성 팬이 마침내 눈앞에서 그를 만나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마음이 쿵쾅거렸다. 내가 어느 정도 흥분했다는 걸 스스로 느꼈다. 내 인생에서 세번째로 느낀 '유사 스탕달 신드롬'이었다. 아마 그 강도는 앞선 두 경우(베르니니 조각, 미켈란젤로 천장화)보다 더 했던 것 같다.


책에서 봤던 것보다 밤하늘의 파란색과 카페 차양의 노란색과 카페 앞 나무의 진한 초록색이 훨씬 선명했다. 색깔들의 대조가 더욱 완연해 보였다. 나중에 책을 찾아보니 고흐는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 밤은 낮보다 색채가 더 풍부해서 강렬한 보라색, 파란색, 초록색으로 채색되어 있다고 썼다 한다. 이 천재는 애초에 밤은 검정색이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나 보다. 


저런 환상적인 분위기의 카페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매일 밤 들를 것 같다. 와이프와 같이 노란색과 보라색이 섞인 자갈길을 걷다가 까페에 들어가 노란색 가스등 아래에서 0% 맥주 한 잔씩 하는 장면, 상상만 해도 천상의 행복이다.


<Terrace of a cafe at night> 일부 확대.

사진상으로는 잘 몰랐는데 실물을 보니 두터운 붓질도 상상 이상이었다. 카페앞 나뭇잎도 초록색 물감 덩어리였고, 하늘의 별도 두께가 느껴질 정도로 두텁게 찍어 발랐다(유화에서 이렇게 물감을 두텁게 바르는 기법을 Impasto 기법이라고 한단다. 이 정도는 외우자). 별은 마치 팝콘을 튀겨 놓은 것 같았다. 별을 저렇게 표현할 생각을 하다니, 역시 천재의 창의력은 일반인의 상상력을 뛰어 넘는다. 


고흐 전시실 입구.

크뢸러-뮐러 미술관은 고흐 미술관 다음으로 그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이라고 한다. <밤의 카페 테라스>는 고흐 작품만 모아 놓은 방 입구에, 그것도 같은 벽에 걸려 있는 다섯 작품 중 정중앙에 걸려 있다. 아이돌 기획사에서도 가장 잘 예쁘고 인기있는 멤버를 센터에 세우듯, 이 작품도 가장 인기있는 작품이라는 걸 미술관측에서 아는 것 같다. 고흐 작품 전시실을 두어 바퀴나 돌았지만 아쉬웠다. 미술관을 떠나기 전에 다시 이 작품 앞에 서서 한참을 바라봤다. 파란 하늘과 팝콘 같은 별, 짙은 초록색 나뭇잎들, 노란색을 뿜어내는 카페 차양과 가스등, 보랏빛 자갈길을 눈에 발랐다. 


기념품샵에서 무려 50유로를 주고 나무 액자로 장식된 카피본까지 하나 사왔다. 5년 전 이 그림을 서울역 책방에서 처음 봤던 순간을 떠올리면서, 나에게 세번째 '유사 스탕달 신드롬'을 느끼게 해준 고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네덜란드에 오시는 분들은 고흐 미술관만 가면 신발 한 짝만 신는 것이다. 크뢸러-뮐러 미술관도 꼭 가보시길 강력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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