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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예찬 Jan 30. 2024

생초보 아저씨의 미술관 도전기-38

내가 경험한 스탕달 신드롬(4-4)

<Dancing at the Moulin de la Galette, 1876>

- Auguste Renoir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자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자리는 진솔한 대화는 사실상 불가능하고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 애들은 잘 크죠?" 같은 가벼운 인사만 반복하다가 온다. 기만 빨린다. 그래서 지인 모임은 서너 명 정도만 모이는 걸 선호한다. 한 테이블이 넘어가지 않아야 잡다한 지방방송 없이 서로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미술작품을 감상할 때는 좀 다르다. (그림은 현실과 달라서 그렇겠지만) 다수가 모여 흥겹게 먹고 마시고 대화하는 장면도 좋아 보인다. 다들 행복하고 넉넉해 보인다. 그런 즐거운 모임에 다녀오면 온갖 스트레스가 사라질 것 같다. 그림은 늘 예쁘고 아름다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상주의의 대가 르느와르의 <Dancing at the Moulin de la Galette>가 대표적인 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책이나 인터넷에서 많이 봤지만 2021년에야 드디어 실물을 영접했다. 다들 알다시피, 오르세 미술관엔 밀레의 <만종>,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 등 우리 장삼이사들에게도 익숙한 작품들이 꽤 많다. 입구부터 도처에 이미 제목 정도는 알고 있던 자잘한(?) 작품들이 걸려 있어서 최우선 목표물에 가기까지는 시간이 꽤 소요됐던 것 같다.


르느와르 <물랑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오르세 미술관.

한참을 지나 <물랑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를 만났다. 생각보다 커서 놀랐다(131.5cm * 176.5cm). 기둥 한 면을 온통 차지하고 있었다. 늘 마음 속 최고 명화 넘버 5안에 들어가는 이 그림을 드디어 실제로 마주했다. 축구경기도 아무리 해설을 맛깔나게 해도 TV로 보는 것과 실제 경기장에 가서 보는 것이 다르듯, 그림도 아무리 상세한 설명이 있어도 사진으로 보는 것과 원본을 감상하는 건 천양지차였다. 



Vincent van Gogh <Moulin de la Galette>. 크뢸러-뮐러 미술관. 

색감부터 달랐다. 작품 전반에 짙은 푸른색이 또렷했다. 아마도 나무 그늘 아래라서 푸른색을 좀 더 진하게 표현했나 보다. 보통 짙은 푸른색은 깊은 바다를 연상시키면서 음울하고 우중충해 보이는데 여기서는 오히려 우아하고 진중해 보였다.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옷과 벤치에 떨어지면서 알록달록 얼룩을 만들어냈다. 마치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중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빛이 난다. Moulin de la Gelette는 몽마르트 언덕 근처에 있던 풍차라고 한다(이 동네에서 생활했던 고흐가 이 풍차를 그린 작품이 있다). 르느와르는 이 풍차가 있는 정원의 무도회장에서 벌어진 파리 보통 시민들의 흥겨운 주말 일상의 순간을 포착했다. 


이 그림이 그려진 무렵을 역사에선 '벨 에포크(Belle Epoque)'라고 부른단다. 프랑스 사회가 급격히 번성했던 19세기 말부터 제1차 대전 발발 전까지의 시기를 일컫는다고. 개인과 나라가 모두 잘 나갔던 태평성대였다. 한 마디로 '배부르고 등 따수우니' 삶이 행복하지 않을 수 없다. 주말마다 무도회장에서 청춘남녀들이 젊음을 불태웠다고 한다. 그림만 봐도 따뜻한 햇빛, 흥겨운 음악, 춤추는 사람들의 리듬, 잔 부딪히는 소리, 도란도란 들리는 대화 소리 등이 느껴진다. 아마도 저 자리에서는 골치 아픈 정치 이야기 대신 모두가 공감하는 가볍지만 즐거운 주제로 이야기 했을 것 같다. 모든 사람들이 활기차고 얼굴에 따뜻하고 여유로운 미소가 보인다.


David Teniers <Peasant Kermis>.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17세기 네덜란드 장르화에도 동네 사람들 파티 하는 작품들이 꽤 여럿 있다. 르느와르 작품과의 차이가 있다면 이 당시 화가들은 마치 사진처럼 세밀하고 정교하게 그렸다는 점이다. 붓이 얼마나 얇았은지 아주 작은 부분까지 대충 칠한 곳이 없다. 


예전에는 이렇게 정밀하게 그려진 그림만 잘 그린 작품이라 생각했었는데 르느와르를 비롯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또다른 매력을 느꼈다. <물랑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도 디테일한 부분까지 정밀하게 그린 건 아니지만 두어 걸음 떨어져 의자에 앉아서 바라보니 그림의 전체적인 윤곽이 오히려 여유로워 보인다. 역시 인상주의 작품들은 약간 떨어져서 봐야 신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영화나 책도 세간의 평이 아무리 좋다 해도 머리를 한참 써야 하는 작품들은 부담스러울 때가 많다. 바쁜 와중에 머리 식히자고 시간내서 보는데 한동안 고민해야 하면 보기가 영 꺼려진다. 심지어 끝까지 이야기 전개를 파악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난해하면 짜증나고 스트레스 받는다. 


르느와르 작품은 그런 부담에서 '완전히' 자유롭다. 작품들이 대부분 밝고 환해서 보기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오고 행복해 진다. 특히 <물랑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는 작품성 자체로도 심쿵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MBTI 극I 성향인 나 조차도 당장 친구들과 맥주 한 잔 같이 하고프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내가 선정한 오르세 미술관 최고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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