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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예찬 Feb 07. 2024

생초보 아저씨의 미술관 도전기-43

사이프러스 나무에 꽂힌 남자. 빈센트 반 고흐.

<Wheat Field with Cypresses, 1889>

- Vincent van Gogh


요새 시간이 날 때마다 여러 미술관에서 찍은 명화 사진들을 다시 보는 게 취미다. 그저께는 런던 내셔널 갤러리 사진, 어제는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사진, 오늘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사진..뭐 이런 식이다. 명화감상 복습 타임이자 사실상의 시간여행이다. 그림 하나하나 볼 때마다 그 때 느꼈던 감정이 생각나기도 하고, 당시엔 몰랐지만 지금은 알게 된 지식을 떠올리며 스스로 대견해 하기도 한다. 


오늘은 2016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찍은 사진들을 쭉 훑어봤다. 그 때는 미술 관련 책 한 권도 본 적 없는 그야말로 백지상태였지만, 수백점의 명화들을 둘러보며 무한한 감동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교과서에서나 보고 말로만 듣던 화가들의 작품을 실제로 보면서 어찌나 신기했던지. 


(좌) <Wheat Field with Cypresses>, (우) <Cypresses>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는 고흐의 작품들도 꽤 여러 점 전시되어 있었는데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그림은 두 개였다(이 때 사이프러스 나무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다). 처음엔 옛날 국민학교 운동장에 있었던 미루나무인 줄 알았다. 모양도 비슷한데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조각 구름이 걸려 있네'라는 동요 가사처럼 위 작품 속 나무 위에도 구름이 걸려 있길래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고흐 작품 대부분이 그렇듯 두 작품 모두 물감을 덕지덕지 두텁게 발랐다. 


고흐는 사이프러스 나무를 꽤 여러 점 그렸다. 메트로폴리탄 외 다른 유명 미술관에도 이 그림은 웬만하면 있었던 것 같다. 하늘로 곧게 뻗어 올라간 사이프러스 나무의 외관이 멋있긴 한데, 고흐는 뭐에 그리 꽂혀서 여러 작품을 남겼을까.


워싱턴 D.C. Washington Monument.

일단 고흐는 사이프러스 나무를 사랑했다. <반 고흐, 영혼의 편지>에 보면 고흐는 다음과 같이 예찬하고 있다.  '사이프러스 나무들은 항상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것을 소재로 해바라기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 사이프러스 나무를 바라보다 보면 이제껏 그것을 다룬 그림이 없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다..(중략)..사이프러스 나무는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처럼 아름다운 선과 균형을 가졌다. 그리고 그 푸름에는 그 무엇도 따를 수 없는 깊이가 있다' 라고.


고흐가 비유한 오벨리스크는 고대 이집트에서 태양 신앙의 상징으로 세운 뾰족탑을 말한다. 워싱턴 D.C.에도 그 모양을 딴 Washington Monument가 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도 주인공이 마지막에 애인에게로 달려가는 장면에 이 기념탑이 나온다. 사이프러스 나무를 보고 어떻게 오벨리스크를 떠올렸을까. 천재는 다르다.


사이프러스 나무를 그림의 소재로 좋아한 것은 물론, 어쩌면 자신의 죽음과 연관지어 생각했을 수도 있다. <네덜란드/벨기에 미술관 산책, 김영숙>에 따르면, 사이프러스 나무는 기독교 종교화에서는 전통적으로 순교, 혹은 죽음을 상징한다. 유럽 공동묘지에 이 나무가 유난히 많이 보이는 것도 바로 그 이유라고 한다. 그렇다면 고흐는 자신의 병세가 심각함을 몸으로 느끼면서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죽음과 연관이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에 꽂힌 것이고. 


(좌) <Cypresses and Two Women>, (우) <Cypresses with Two Female Figures>.

고흐 작품 속의 사이프러스는 거의 비슷한 느낌이다. 불꽃 모양으로 생긴 것이 소용돌이치며 타오른다. 임파스토 기법(물감을 두텁고 거칠게 칠하는 방식)으로 격렬하게 터치해서 물감의 두께가 확연히 느껴질 정도다. <서양미술사, 곰브리치>는 고흐의 붓놀림이 자신의 격앙된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동의한다. 소용돌이치며 하늘로 올라가는 나무를 보면 그의 불안한 정신상태가 보인다. 사이프러스가 나오는 작품들은 전부 생레미 요양병원에 있을 때 그렸다고 하니 그럴 만 하다.


특히 고흐 미술관에 있는 <Cypresses and Two Women>과 크뢸러-뮐러 미술관에 있는 <Cypresses with Two Female Figures>가 불안한 심경의 끝판왕인 것 같다. 구도와 배경이 비슷한 위 두 작품은 아예 나무에 불이 붙은 것 같다. 물감 자체가 타오르는 느낌이다. 마치 불안감을 이기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직전일 것 같다.  


(좌) <The Starry Night>, (우) <Wheat Field with Cypresses>.


그래도 뉴욕 현대미술관에 있는 <The Starry Night>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있는 <Wheat Field with Cypresses>에 나오는 사이프러스 나무는 양반이다. 파란색과 흰색이 섞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아있는 진한 초록의 사이프러스 나무가 상대적으로 편안한 느낌이다. 특히 <The Starry Night>은 Don McLean 노래의 'Starry Starry Night~' 하는 가사가 들리는 듯 하다. 이 두 작품에서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하늘로 곧고 높게 뻗어나가는 게 죽음보다는 오히려 삶에 대한 희망과 가까워 보인다.


감사하게도 고흐의 사이프러스 나무 여러 작품을 오리지날로 감상할 기회가 있었다. 진짜 고흐 작품은 오리지날로 봐야 한다. 물감이 두텁게 덧칠해진 강렬한 붓놀림을 눈앞에서 보면 그림을 그릴 당시 고흐의 불안한 마음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복사판은 아무리 잘 만들었어도 짝퉁이다.


내일 당장 고흐미술관으로 달려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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