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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예찬 Feb 11. 2024

생초보 아저씨의 미술관 도전기-46

오늘 현재, El Greco 작품이 마지노선.

<The Vision of Saint John, 1608-14>

- El Greco


미술감상 초보자들은 깔끔하고 정확하게 그려진 그림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섬세한 붓질을 통해 사실적이고 정교하게 그린 작품이라야 잘 그린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며칠 전에 포스팅했던 Alexandre Cabanel의 <비너스의 탄생> 같은 그림이 그러하다.


물론 거칠게 물감을 덕지덕지 '처바른' 인상주의 작품들도 좋아한다. 내 수준에서 아직은 납득하기 어려운 작품만(예를 들어 Jackson Pollock의 액션 페인팅 같은) 아니면 최대한 이해하려 노력한다. 2024년 2월 현재,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작품성을 흔쾌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지노선이 아마 엘 그레코(El Greco)의 작품이 아닌가 싶다.


El Greco <The Vision of Saint John>. Metropolitan Museu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엘 그레코의 <The Vision of Saint John>을 처음 봤을 때 너무 이상했다. 직전에 르느와르의 화사하고 행복한 작품들을 보고 왔는데 이 작품은 보자마자 분위기가 어두컴컴하고 음침했다. 인체 묘사가 정상이 아니었다. 사람의 몸을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뜨렸다. 서양인의 머리통이 아무리 작다 해도 10등신이 말이 되나. 이건 부자연스러움을 넘어 기괴할 정도였다. 이 작품을 그린 시기가 17세기 초반이라면 르네상스 이후인데 비례와 균형, 그리고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르네상스에 비해 오히려 실력이 퇴보한 느낌이었다.


설명을 보니 신약성경 요한계시록 내용이라고 했다(6장 9-11절). 그 자리에서 검색해 읽으면서 그림을 찬찬히 살펴봤다. 맨 왼쪽 푸른 옷을 입고 하늘을 향해 두 팔 벌리고 있는 사람이 성 요한이다. 벌거벗은 채 뭔가 절실하게 하늘을 향해 갈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다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다. 이들은 하늘이 내리는 구원의 선물인 흰 두루마기를 기다리고 있다. 엘 그레코는 최후 심판날의 무시무시한 광경임을 감안해서 이렇게 무섭게 그렸나 보다.마치 옛날 드라마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분위기다. 음산한 분위기야 그렇다 쳐도 사람은 왜 저렇게 비현실적으로 그렸을까(저런 체형을 가진 사람이 어디 있냐!).


(좌)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뉴욕 현대미술관.

참고로 전문가들은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이 엘 그레코의 <The Vision of Saint John> 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 증거가 피카소 작품 속 세 여인이 엘 그레코 작품 가운데 있는 세 명의 천사에서 따왔다고 하는데..글쎄..그런 같기도 하고 아닌 같기도 하고. 솔직히 잘 모르겠다.


엘 그레코가 활동하던 시기는 르네상스 황금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즉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같은 천재들의 포텐이 터졌던 시기 직후라는 이야기다. 워낙 잘 나갔던 선배들이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을 것같은 업적을 세워놓았으니 후학들은 그림 그릴 용기가 없었을 수도 있다. 원래 하던대로 하면 아무리 해도 쟁쟁한 선배들을 따라가기 어려웠을테니 말이다.


그래서 새로운 방식으로 승부를 걸었던 측면이 있다고 한다. 정통파 대신 변칙을 택했다고나 할까. 르네상스 미술의 금과옥조였던 비례성을 포기한 셈이다. 그림 속 성 요한처럼 인물들이 부자연스럽게 가늘고 길게 늘어진 형태를 띄었고 포즈도 과장되게 그렸다. 르네상스 이후 생겨난 이러한 사조를 매너리즘이라고 한단다(외우자).


이 그림이 세상에 나왔을 때 욕을 많이 먹었을 것도 같다. 왜냐하면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에 뒤이어 나왔는데 인물 형태도 이상하고 색채도 음침한 '괴상망칙한' 그림이었으니까. '이거 뭐하자는 거야!' 라는 소리를 충분히 들을 만 했다. 엘 그레코 작품들은 수백년간 인정받지 못하다가 21세기에 들어와서야 명예회복을 했다고 한다. 곰브리치 <서양미술사>에 의하면, 엘크레코의 미술이 재발견되고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현대 미술가들이 모든 미술작품에 '정확성'이라는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지 말라고 가르쳐 준 1차 대전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했다고 한다.


(좌) <View of Toledo>, (우) 현재 톨레도 시내 전경

엘 그레코는 분위기가 음산한 그림을 그리는 데 일가견이 있나 보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The Visio of Saint John> 옆에는 그가 그린 풍경화 <View of Toledo>가 걸려 있다. 보통 풍경화라고 하면 녹음이 우거진 나무,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 널찍한 들판과 그 위에서 풀 뜯어 먹고 있는 소나 양..뭐 이런 풍경이 우선 떠오르는데, 엘 그레코의 풍경화는 완전 다르다. 작품 속의 Toledo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럼 분위기가 불길하기 짝이 없다.


일단 하늘이 어둡고 번개가 치는 듯 하다.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기세다. 초록의 들판도 고즈넉한 여유가 느껴지지 않는다. 왠지 사람들은 이미 죽거나 사라지고 좀비들만 득시글대는 미래세계 같다. 이 작품 또한 르네상스 거장들과 다른 화풍으로 가겠다는 의도인지, 아니면 고흐 말년 작품들처럼 엘 그레코도 정신적으로 불안해서 이렇게 그린 건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에게 익숙한 평화로운 풍경화와는 거리가 멀다. 신기한 것은 Toledo란 도시는 시간이 멈춘 듯 엘 그레코 때와 지금의 모습이 전체적으로는 매우 비슷하다.


화풍이 매우 독특해서 처음엔 많이 어려웠다. 이후 설명을 읽고 공부를 한 결과 이젠 엘 그레코까지는 이해가 가능해졌다. 앞으로 시간이 더 지나면 엘 그레코의 특이함을 넘어 어느 수준까지 가슴으로 이해하고 즐길 수 있을까. Jackson Pollock이 물감을 처뿌려놓은 걸 예술작품이라고 충분히 이해하고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는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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