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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예찬 Feb 28. 2024

생초보 아저씨의 미술관 도전기-49

과거를 후회한다고 모든 게 리셋되면 아니되오.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773>

- Pompeo Batoni


2018년 빈 미술사 박물관에 다녀온 적이 있다. 피터 브뢰헐(Pieter Brueghel) 작품들이 많이 있다는 것만 알고 갔는데 생각지도 않은 '금은보화'들이 많이 있었다. 여러 명화들 중 보자마자 제목을 예상할 수 있는 작품을 마주했다. 노년의 아버지가 헐벗은 젊은 아들을 껴안고 있는 그림, 교회 주일학교 때부터 수도 없이 들었던 '탕자의 비유'다.


누가복음 15장 내용을 보면, 한 노인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작은 아들은 나중에 받을 유산을 미리 달라고 아버지를 졸랐다. 돈을 받아낸 작은 아들은 집을 나갔고 술과 여자로 돈을 탕진했다. 결국 먹을 게 없어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에게 사죄를 했고, 아버지는 그를 용서하면서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였다는 이야기다.


Pompeo Batoni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빈 미술사 박물관.

바토니는 아버지가 아들을 용서하며 끌어 안고 옷을 덮어주는 장면을 그렸다. 아버지는 화려한 옷과 보석으로 장식한 반면, 아들은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해 맨등을 드러낸 대조적인 모습을 그렸다. 두 사람이 정반대의 삶을 살아왔음을 보여준다. 배경이 검고 아버지에게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데다가, 특히 옷의 보색대비(빨간색과 초록색)로 인해 아버지에게 바로 눈길이 가게끔 그렸다.


약간 비현실적인 건, 아들이 먹을 게 없을 정도로 고생한 것치고는 머리 모양도 단정하고 몸도 너무 좋다. 피트니스 클럽에서 일정 기간 만든 몸처럼 보인다. 아버지도 차림새가 과할 정도로 화려하다. 돈 많은 노인과 몸 좋은 젊은이로 인해 현실과 괴리가 느껴질 정도다. 


Rembrandt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에르미타쥬 미술관 다운로드.

보통 '탕자의 비유' 그림은 러시아 에르미타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렘브란트 작품이 더 유명하다. 여기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은 좀 더 현실적이다. 아버지도 아들도 차림새가 서민적이다. 바토니 작품 속 탕자는 그리스/로마시대 귀족같은 머리 스타일을 한 반면, 렘브란트 작품에선 거의 민머리에 가깝고 옷도 누더기다. 신발도 다 떨어졌는지 지저분한 맨발이 그대로 보인다. 아버지와 아들의 자세와 표정에서 애틋한 내면의 감정이 묻어나온다.


'탕자의 비유' 의 주 테마는 아들의 후회와 아버지의 용서이지만, 사실 나는 형에게 더 마음이 간다. 바토니 작품에는 아버지와 작은 아들만 나오지만, 렘브란트 작품에는 등장인물이 세 명 더 나오는데 그 중 맨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이 형이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아버지가 동생을 환대하는 것에 대해 형이 불만을 표시하는 내용이 나온다. 한마디로 나는 그동안 아버지 말 잘 듣고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왜 망나니 동생을 그렇게까지 챙겨주냐는 것이다. 그림 속 형의 얼굴 표정에도 불만이 가득하다. 


형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 계신데 유산을 먼저 달라고 한 것부터가 동생은 싹수가 노란 녀석이다. 게다가 그 돈을 갖고 튀어서 술과 여자로 모두 허비해 버렸다. 한마디로 구제불능 양아치다. 그동안 아버지 말 잘 들어온 범생이 형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다. 아버지 생각이 짧았다. 돌아온 동생을 위해 송아지를 잡기 전에 먼저 큰 아들에게 양해를 구했어야 했다. 온갖 나쁜 짓 다 해놓고 나중에 반성했다는 이유로 모든 게 리셋되면 되겠나.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은 억울할 수 밖에 없다.


Pieter Aertsen <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y>.  벨기에 왕립미술관.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도 비슷하다. 예수님을 접대하기 위해 언니 마르다는 집안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만 듣고 있었다. 언니 혼자 일하게 놔두고 동생은 놀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때도 예수님은 일하는 언니보다 설교 듣는 동생을 더 칭찬하셨다. 이 부분도 이해하기 어렵다(생초보 아저씨의 미술관 도전기-12 참조). 탕자의 형이나 언니 마르다나 매우 억울했겠다. 예수님도 참, 왜 그렇게 말씀을 하셨을까.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이라는 명화를 봐도 후회와 용서라는 주테마보다 불공정한 상황을 겪은 당사자들에 마음이 간다. 일상에서 공정하지 않게 일이 처리되는 경우를 많이 봐서 그런가 보다. 명화고 뭐고 이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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