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 가면 평소 이름이라도 들어본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우선적으로 찾지만 생판 처음 들어보는 화가를 만나기도 한다. 사실 유명 미술관에 작품이 걸릴 정도면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분들일텐데 생초보이다 보니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웬만하면 초면이다. Guido Cagnacci라는 분의 작품도 빈에서 처음 만났다.
Guido Cagnacci <Cleopatra's Suicide>. 빈 미술사 박물관.
빈 미술사 박물관에 갔을 때 <Cleopatra's Suicide>이란 작품을 봤다. 제목을 보기 전에는 그냥 피부색 하얀 반라의 여인이 의자에 앉아 자는 걸로만 알았다. 그런데 뒤에 서 있는 한 여인이 눈물을 훔치고 있고 초록치마 여인은 매우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다. 아, 누가 죽었구나. 자세히 보니 뱀이 오른쪽 팔을 휘감고 있다. 가만있자, 뱀한테 물려 죽은 여인이 누구던가.
클레오파트라가 떠올랐다.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한 후 로마로 끌려가 망신당하지 않으려고 자살했다는 그 여인이다. 어두운 배경과 대비되면서 그녀의 피부는 더욱 희고 부드럽게 빛나지만 그럼 뭐하나, 죽었는데. 한 때 케사르, 안토니우스와 연합하며 세계를 호령한 신적인 존재였지만그림에서 보이는 마지막 모습은 처연했다.
이 그림을 봤을 때만 해도 내게 클레오파트라는 불쌍하게 자살한 여인일 뿐이었다. 몇년 후 벨기에 안트베르펜 미술관에서 클레오파트라를 다시 만나고 나서야 그녀의 전성기 아우라를 느낄 수 있었다.
Alexandre Cabanel <Cleopatra, 1887>. 안트베르펜 미술관.
안트베르펜 미술관에 있는 <클레오파트라>에는 그녀의 피도 눈물도 없는 강력한 권력이 잘 나타나 있다. 작품 속에서 그녀는 편안한 자리에 앉아 시녀의 부채질을 받으며 앉아 있다. 저 아래에서는 사형수에게 독약의 효능을 실험하고 있다. 사형수 한 명은 이미 죽어서 들려 나가고 있고 또 한 명은 독약으로 인해 괴로워 하고 있다.
일설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는 언젠가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예견하고 사형수들에게 독약을 먹여가며 유사시에 덜 힘들게 죽을 방법을 미리 연구했다고 한다. 작품 속 그녀는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형수를 바라보면서도 전혀 감정의 동요를 느끼지 않는 것 같다. 바로 앞에 있는 애완용 표범마저도 완전히 무심한 표정이다. 이렇게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야 최고 권력의 지위에 오를 수 있는 건가 보다.
달도 차면 기울듯, 한 때 권력의 정점을 찍었어도 때가 되면 시드는 법이다.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한 후 남편 안토니우스는 자살했고 클레오파트라 자신은 로마로 끌려가 개선 행렬의 도구이자 노리개로 쓰이게 될 것을 직감했다. 망신당하고 구질구질하게 목숨을 부지하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집트 여왕으로서 마지막 자존심은 지켰다. 이 부분 리스펙한다.
클레오파트라 그림을 보면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인생의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닫는다.
p.s.) 클레오파트라는 동양의 양귀비나 초선 등과 함께 역사상 최고의 미녀라고 불린다. Guido Cagnacci가 이왕이면 좀 더 예쁘게 그렸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그림에서 마주한 클레오파트라는 역대급 미녀라고 하기엔 너무도 평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