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플랑드르 사람들의 먹거리.
<Four Elements : Earth, 1569>
- Joachim Beuckelaer
어릴 때 엄마랑 같이 시장에 가는 걸 좋아했다. 당시 시장에는 없는 게 없었다. 고등어 한 마리 살 때도, 돼지비계 한 덩이 살 때도, 추리닝 바지와 말표 운동화 한 켤레 살 때도 시장에 가면 다 해결됐다. 오늘날은 대형마트 등장 이후 소규모 동네 시장들은 사실상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많이 불편하겠지만 가끔은 그 시절 시장이 그립기도 하다.
미술관에 다니다가 옛날 우리네 '시장 감성'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들을 여러 곳에서 만났다.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비슷하다 싶어 화가 이름을 보니 Joachim Beuckelaer 라는 사람이다. 16세기 플랑드르 화가로 시장과 부엌 묘사에 특화된 사람이라고 한다.
뭘 그린 것인지 누구나 한눈에 알 수 있다. 시장에서 채소와 과일을 사고 파는 장면이다. 물건들이 관람자 앞으로 쏟아질 것처럼 쌓여 있다. 매우 사실적으로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어서 어떤 채소와 과일인지 알기 쉽다. 지금 우리가 먹는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빨간 외투를 입은 손님이 상인에게 양배추 하나 달라고 하는 장면 같다. 등장인물의 생김새와 복장만 다를 뿐이지, 70-80년대 우리나라 시장과 큰 차이 없어 보인다.
설명을 보니 화가가 작품 안에 성경 스토리도 넣었다고 한다. 좌측 상단에 보면 두어 명이 나귀를 타고 돌다리를 건너는 모습이 보인다. 요셉이 꿈속에서 헤롯왕이 예수님을 찾아 죽이려 한다는 천사의 이야기를 들은 후,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하는 내용이라 한다(마태복음 2장). 종교개혁이 막 시작된 시기라 아직은 종교화의 영향이 남아 있었나 보다. 정물화 안에 종교적인 내용도 포함시켰다.
<Four Elements : Earth>는 4개의 그림 연작 중 하나다. 나머지는 Water, Fire, Air라는 제목으로 불리며 그림 4개가 다같이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다. 나머지 세 작품도 구도는 비슷하다. 전면에 수산물(Water), 조류와 육류(FIre), 가금류와 알(Air)이 풍성하게 있고 당시 시장의 분위기와 상인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들에도 뒷쪽에 조그맣게 성경 내용이 숨어 있다고 한다. <Water>에는 고기잡이의 기적(누가복음 5장), <Fire>에는 마르다와 마리아(누가복음 10장), <Air>에는 탕자의 이야기(누가복음 15장)가 그것이다.
8년 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Fish Market>을 봤을 땐 그저 재미있는 그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 땐 누구 작품인지도 몰랐지만 옛날 유럽의 시장 모습과 사람들의 표정이 진짜 생생해서 한참을 들여다 봤다. 선반 위에 있는 생선들도 사진을 찍어놓은 것처럼 디테일해서 신기했다. 16세기 네덜란드 사람들이 다녔던 시장을 바로 앞에서 구경할 수 있어서 재미있었고 생선가게 상인과 장바구니 들고 있는 소비자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작년 말 벨기에 왕립미술관에 갔을 때도 Beuckelaer의 작품이 있었다. 멀리서 실루엣만 봐도 알 수 있었다. Beuckelaer 그림이구나! 판매 품목만 다를 뿐, 시장 풍경을 그린 다른 그림들과 유사했다. 한 캔버스 안에 채소와 과일들을 어떻게 저렇게 오밀조밀하게 또 정교하게 그려 넣었을까. 음식 연구가들 교재로 쓰여도 충분할 거 같다.
Joachim Beuckelaer는 고모부이자 당시 플랑드르 지방 정물화의 대가였던 Pieter Aertsen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한다. Aertsen의 <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ia>를 보면 얼핏 봐도 느낌이 비슷하다.
이 작품은 신약성경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스토리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같이 한 마을에 들렀을 때 마르다라는 여인이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다. 언니 마르다는 손님 접대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바쁜데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다(즉, 일 안하고 탱자탱자 노는 상황). 언니가 예수님에게 동생 일 좀 하라고 말해 달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하셨다. "너 일하느라 바쁜 건 아는데, 마리아는 더 좋은 것(설교 듣는 것)을 선택한 거야." Beuckelaer가 고모부 화풍을 많이 배운 거 같다. 느낌이 진짜 비슷하다.
Beuckelaer 작품에는 여러 장르가 섞여 있다. 평범한 시장 사람들의 일상을 그린 점에선 장르화(또는 풍속화)라 볼 수 있고, 물건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사실적으로 그린 걸 보면 정물화라고도 볼 수 있다. 또 작게나마 성경의 내용이 들어가 있으니 종교화의 성격도 있다. 그림이 각각의 독자적인 분야로 발전하기 이전 버전이라 여러 특징이 혼재해 있나 보다.
타임머신을 타고 수백년 전 플랑드르 지방에 다녀온 느낌이다. 당시엔 저런 음식을 먹고 저런 모습으로 살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