酒神 바쿠스.
<The Adolescent Bacchus, 1597-1598>
- Caravaggio
애주가는 아니지만 가끔 와인을 한 잔 마신다. 네덜란드엔 저렴한 와인이 많은데다 다행히 입맛도 싸구려라 마시는 데 별 부담은 없다. 어제 저녁 와인 한 잔 옆에 놓고 전에 미술관에서 찍은 사진 파일을 들추던 중, 요상한 표정을 한 어떤 청년이 떠올랐다. 바로 카라바조의 <청년 바쿠스>다. 참고로 그리스 신화의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로마 신화에선 바쿠스라고 한다.
먼저 바쿠스의 출생과 포도(주)와의 연관성을 간단히 적어 본다. 바쿠스는 제우스와 테베의 공주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멜레가 제우스의 부인 헤라의 함정에 빠져 죽을 때 제우스는 뱃 속의 아이(바쿠스)를 몰래 자신의 허벅지에 넣어 빼돌리고 나중에 요정들에게 시켜 아이를 키우도록 했다. 이 때 그가 살던 굴 앞에 포도나무를 심어 헤라의 눈을 피하게 했다. 바쿠스는 이 포도를 먹고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포도주 만드는 법을 알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술의 신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 청년이 와인이 가득 든 잔을 관람자에게 내밀고 있다. 명암법의 대가 카라바조 작품답게 어두운 배경을 뒤로 하고 빛이 인물과 테이블에 강하게 비치고 있다. 상당한 팔 근육, 포동포동한 볼살, 풍성한 머리숱이 눈에 띈다. 잘 먹고 자란 건강한 청년의 모습이다.
특이한 점이 있다. 눈빛이 매우 몽환적이다. 술에 취해 눈빛이 게슴츠레해진 건지 모르겠으나 동성애자 느낌도 난다. 어떤 자료에선 이 작품의 모델이 카라바조의 친구라고 한다. 모델 살 돈이 없어서 친구를 한 번 불렀나 보다. 친구가 정통 이탈리안이 아닌지 얼굴이나 머리색이 동양적인 느낌도 좀 있다. 설명을 보면 테이블에 있는 과일이 상해 있는 것이 성적 쾌락에 대한 경고나 청춘의 유한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와인과 포도가 등장하긴 하지만 酒神이라고 하기엔 포스가 약하다.
카라바조가 그린 또 다른 바쿠스도 생각났다. 보르게세 미술관에 있는 <병든 바쿠스>다. 주세페 체사리(Giuseppe Cesari) 공방에서 꽃과 과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정물화가로 활동할 당시 그린 그림이라 한다. 정물화 전문답게 포도를 정성스레 그리기는 했다.
인물의 얼굴과 입술이 창백하다. 바쿠스라는 제목이 없었다면 그냥 정신이 좀 오락가락하는 사람이 머리에 화환 두르고 포도들고 장난치는 느낌이기도 하다. 오른쪽 상반신을 드러내고 하체도 상당히 벗은 채로 포도를 만지작거리며 관람자를 유혹하는 것 같다. 아쉽지만 누군가를 유혹하기엔 외모가 심히 부족해 보인다. 이 작품에 <Self-Portrait in the Guise of Bacchus>라는 또 다른 제목이 있는 걸 보면 아마 카라바조 자화상인가 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제목만 바쿠스이지 酒神 느낌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어보인다.
미술관에서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진정한 바쿠스가 뭔지를 보여주는 두 작품이 있다. 바로 귀도 레니의 <Drinking Bacchus>과 루벤스의 <Bacchus>이다.
귀도 레니 작품에선 바쿠스가 통통한 어린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엔 포도넝쿨을 뒤집어 쓰고 한손으로 머리통만한 와인병을 병나발 불고 있다. 앗! 동시에 오줌도 싸고 있다. 젊은 시절 주변에서 이런 사람 한 두명 본 거 같다. 주변인 신경 안쓰고 술을 계속 원샷하고 아무데나 오줌누는 진상 끝판왕. 아이 모습이니까 약간 귀여운 걸로 커버치고 넘어간다
루벤스가 그린 바쿠스는 귀도레니의 꼬마가 어른이 된 버전 같다. '부어라 마셔라'가 뭔지 제대로 보여준다. 가운데 앉은 바쿠스는 체격도 육중하다. 술 잘 드실 거 같다. 여인이 따라주는 와인을 받고 있는데 잔도 보통 큰 게 아니다. 750ml 짜리 한 병 다 들어가겠다. 여인 옆에선 Satyr가 와인 한 통을 원샷하고 있다. 바쿠스 오른쪽 아래에선 한 아이가 떨어지는 와인을 받아 마시고 있고, 왼쪽 아이는 시원하게 오줌을 갈기고 있다. 酒神이 마시는 자리는 이 정도는 해줘야지! 이태백의 시 '장진주(將進酒)'에 나오는 구절 '마땅히 한번 술을 마시면 삼백잔은 마셔야지'와 딱 어울리는 바쿠스라 할 수 있다. 화풍이 누가 봐도 루벤스(또는 루벤스 공방) 그림 같다. 인물들이 대부분 포동포동하고 붓질이 살아서 춤추는 것 같다.
바쿠스 하면 크레타의 공주 아드리아네를 아내로 삼은 스토리, 뭐든 만지는 족족 금으로 바꾼다는 미다스왕(Midas)와 관계된 이야기 등도 있지만, 와인과는 크게 관계없으니 패스한다.
와인 한 잔 마시다가 난데없이 그리스/로마 신화까지 다시 들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