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간을 초월한 '가난'이라는 존재
지난 주 오랜만에 중편소설을 한 권 읽었다. '먹고사니즘'에 치이다 보니 평소 주로 읽는 게 자기계발서나 돈 관련되는 책이었는데, 모처럼 마음 먹고 세계문학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책을 들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이다.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또 가난 때문에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소위 '없이 사는' 남녀가 주인공이다.
수십 년전 내가 어릴 때가 생각났다. 그 땐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다.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서 선생님으로부터 혼나는 친구들도 여럿 있을 정도였으니. 도스토예프스키 <가난한 사람들>의 문학사적 의미와는 별개로 좁고 누추한 하숙방에 살고, 떨어진 신발을 수선할 돈도 없고, 다 낡아빠진 옷을 계속 입어야만 하는 주인공의 곤궁한 삶을 생각해 봤다. 그리고 이와 유사하게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 몇 점을 떠올렸다. 각 작품이 제작된 시공간은 다르지만 작품 속 인물들은 당시 역사의 주변부에 존재했던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봐서 한꺼번에 묶어봤다.
1. Honore Daumier의 <The Third-Class Wagon>
1860년대에 그려진 작품이다. 당시 산업혁명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기차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묘사했다. 제목이 말하는 3등 열차는 아마 당시 프랑스에서 가장 값이 싼 칸이었을 것이다.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맨 앞열에 보인다. 왼쪽에 있는 엄마는 젖먹이 아기를 안고 있고, 그 옆 할머니는 바구니 안에 일용할 양식이 들어있는지 바구니를 두 손으로 꼭 쥐고 멍때리고 있다. 할머니 옆에는 손자로 보이는 소년이 피곤에 쩔어 잠을 자고 있다. 뒷쪽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초라한 옷차림도 있고 중절모에 양복을 입은 나름 그럴싸한 사람들도 있다. 좁은 공간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서 가는 싸구려 칸에 타 있는 걸로 보아 승객 대부분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노동자들로 추정된다.
앞열 인물들도 그렇고 그림 전체의 어두운 색깔도 그렇고 그냥 기분이 꿀꿀하다. 특히 할머니의 무표정한 얼굴과 눈빛이 영 안타깝다. 마치 수십 년간 '이 모양 이 꼴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고, 옆자리 손주도 이 밑바닥 생활을 반복할 수 밖에 없을 것을 예상하며 절망하는 듯하다. 이 그림에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2. Vincent van Gogh의 <Potato Eaters>
그림 속 방 안에 광원이라고는 작은 램프 하나 뿐이다. 전체적으로 어둡다. 다섯 명의 농민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감자를 먹고 있다. 등장인물들의 얼굴도 투박하고 옷도 우중충하고 손도 거칠다. 고깃덩어리 하나 있으면 좋으련만, 먹을 것은 감자 뿐이다. 이 작품 또한 누가 봐도 '없는 집' 식탁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그림은 오노레 도미에의 <3등열차>와는 느낌이 다르다. 가난한 집이지만 사람들 얼굴에서 절망보다는 자존감이 보인다. 피곤에 쩔어 있다기 보다는 하루 일과를 보람차게 마치고 집에 와서 가족들이 대화를 나누며 평범한 식사를 하고 있다. 인위적으로 이 사람들이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강조하고 있지 않다. 가난한 농민 가족의 일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지금 같으면 자존감 높은 사람이라면 이 모습 그대로 인스타에 올릴 수 있을 만하다. 그래서 <3등열차>보다는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의 마음이 좀 더 편하다.
3. Jean Michelin의 <The Baker's Cart>
오노레와 고흐의 작품을 생각하다가 예전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봤던 한 그림을 떠올렸다. 가난한 가족이 시내에서 빵을 파는 내용이었는데 제목도 화가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림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혹시나 해서 chat gpt에 물어봤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있는 작품이에요. 가난한 가족이 수레에 실은 빵을 팔고 있어요. 남자 어른 2명, 여자 어른 1명, 아이들 2~3명이 등장합니다. 작품명을 알려주세요'라고. 앗!! 단 2초만에 알려줬다(chat gpt가 고마웠지만 무섭기까지..).
Anyway, 여기서는 배경이 도시이니 등장인물들이 <감자먹는 사람들>처럼 농민들이 아니라 도시 빈민이겠지. 사람들의 옷은 모두 덕지덕지 기워놓은 누더기 같다. 특히 아이들 옷과 신발은 사이즈도 맞지 않는다. 수십 년전 우리가 가난하던 시절 큰형이나 큰누나의 옷과 신발을 그대로 물려받은 가난한 집 동생들 같다.
카트 옆에 서 있는 아빠와 의자에 앉아 있는 엄마의 얼굴엔 피곤함이 가득하다. 아무런 희망도 없고 그냥 매대에 있는 빵이나 팔리기만 바라는 무념무상의 얼굴이다. 1656년 작품이니 당시 프랑스는 루이 14세가 통치할 때다. 루이 14세 아저씨는 본인이 화려한 복장을 하고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파티를 즐길 때 파리 어느 구석에선 빵 덩어리 몇개를 팔아야 하루를 살아가는 백성들이 있었음을 전혀 신경도 안썼겠지 뭐.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한 권 읽음으로써 19세기 초 뻬쩨르부르크의 하급 공무원의 가난한 삶을 엿볼 수 있었고, 고흐 덕분에 19세기 말 네덜란드 농민들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오노레가 아니었으면 산업혁명 이후 프랑스 철도 3등칸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고, 미슐랭 덕분에 17세기 프랑스 도시 빈민들의 삶을 스냅사진처럼 볼 수 있었다.
문학과 예술이 단순한 미적 대상을 넘어 사회적 기록물로서 역할을 해준 덕분에 나 같은 범부(凡夫)가 방구석에 앉아 호사를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