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종양 선고 이후 나의 삶
막내가 태어난 지 채 6개월이 안되어
아이를 포대기에 업고 집 밖을 나갔다.
너무 답답했다.
독박 육아에 지치고 돌아서면 집안일. 집안일. 집안일..
남편은 자신의 일이 아닌 양 나 몰라라 한다.
숨이 막힐 것 같던 집안에서
어린아이를 들쳐 업고 동네를 걸었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날이 어둑해지자 주변 상가에
네온간판 불이 하나둘씩 커졌다.
비를 피해 건물 상가 입구에 서있는데
내 눈앞에 영유아 전문시설 어린이집이 보였다.
집안 형편상 이미 두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교육비에
아직 돌도 안된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길 여력이 없었다.
비도 오고 그냥 한 달 교육비나 알아볼 요량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영유아원이라서 그런지 시설 분위기가
밝고 아기자기하고 따뜻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했다.
비가 와서 습기로 끈적거릴 것 예상했는데
방바닥이 보일러를 켜놔서 뽀송뽀송했다.
원장님도 차분하고 인자하게 안내해 주셨다.
모든 아이들 이유식과 급식을 유기농으로 한다고 했다.
전담 교육 교사와 영양사도 따로 있다고 했다.
만족스러웠지만 보육비가 상당히 비쌌다.
미소를 띠고 잘 알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나오려 하는데
원장님께서 아이가 몇째냐고 물었다.
셋째인데요.
원장님이 웃으시며
셋째는 정보보조금 반, 구청보조금 반 해서
100% 양육보조금이 지원된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순간 얼음이 되었다.
너무나 뜻밖이었다.
전혀 모르던 정보를 이렇게 우연히도 얻게 될 줄
정말 몰랐다.
내겐 너무나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렇게 막내를 영유원에 입학시키고
나는 맞은편 상가건물 2층에 수학학원을 개원했다.
그리고....
그 막내가 초등 5학년이 된 지금까지
일과 육아와 집안일을 병행하며 살았다.
중간에 첫째의 고등학교 자퇴로 학원을 정리할 때도
과외로 수업을 이어오며 쉬지 않고 일을 했다.
심리대학원을 마치고 상담 센터에 오전에 출근할 때도
오후 과외 수업은 늘 있었다.
다시 학원 수업을 하기 시작한 것이 작년 5월이었는데,
일 년 남짓 다니고 어제 그 학원 일도 정리하게 되었다.
난 이제 백수가 되었다.
병원 입원 전 일주일 동안 먼지 쌓인 집안 청소도 좀 하고
옷장 정리, 냉장고 정리도 하고,
베란다 쌓여놓은 짐들도 정리를 하려 했다.
어제 첫날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도무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육체적인 일은 좀 아닌가 보다 생각했다.
책을 손에 들고 읽기 시작했다.
도무지 한 줄도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무슨 이야기인지
몇 번을 돌아가 다시 읽어야 했다.
책 읽기도 포기하고 영화나 유튜브 영상을 보기로 했다.
영화를 고르는 데 한참이 걸렸다.
하나 고른 액션 영화는 계속 스킵 버튼을 누르게 되었다.
별 의미나 재미를 못 느꼈다.
유튜브 영상들도 내 머리 밖으로 미끄러져 나가 버렸다.
머리 입력장치에 방수막을 씌운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여섯 시 반이다.
아이가 학원에서 돌아올 시간이 다 되었다.
서둘러 주방에서 밥을 하고 저녁을 만들었다.
막내와 여유 있게 둘이 앉아 학교에서 일어난 일,
학원에서 일어난 일을 들었다.
어제 학원 일을 마무리하며 집에 돌아올 때는
막내랑 함께 할 시간이 많으니 같이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많겠다고 생각했는데
하루 종일 멍해 있었다.
워커홀릭의 아무것도 없는 백수의 첫날은
이렇게 갔다.
시간이 많으면 정말 더 많음 일을 할 줄 알았는데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에너지 문제이다.
에너지를 억지로 끌어 쓴다고 나아지지 않는다.
나는 지금 좀 내 상황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다.
우울로 가지 않고 싶은데
억울하고 눈물이 난다.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