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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인드저널 Jul 11. 2022

워커홀릭의 백수생활

뇌종양 선고 이후 나의 삶

막내가 태어난 지 채 6개월이 안되어

아이를 포대기에 업고 집 밖을 나갔다.

너무 답답했다.

독박 육아에 지치고 돌아서면 집안일. 집안일. 집안일..

남편은 자신의 일이 아닌 양 나 몰라라 한다.

숨이 막힐 것 같던 집안에서 

어린아이를 들쳐 업고 동네를 걸었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날이 어둑해지자 주변 상가에 

네온간판 불이 하나둘씩 커졌다.

비를 피해 건물 상가 입구에 서있는데

내 눈앞에 영유아 전문시설 어린이집이 보였다.

집안 형편상 이미 두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교육비에 

아직 돌도 안된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길 여력이 없었다.

비도 오고 그냥 한 달 교육비나 알아볼 요량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영유아원이라서 그런지 시설 분위기가 

밝고 아기자기하고 따뜻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했다.

비가 와서 습기로 끈적거릴 것 예상했는데

방바닥이 보일러를 켜놔서 뽀송뽀송했다.



원장님도 차분하고 인자하게 안내해 주셨다.

모든 아이들 이유식과 급식을 유기농으로 한다고 했다.

전담 교육 교사와 영양사도 따로 있다고 했다.

만족스러웠지만 보육비가 상당히 비쌌다.

미소를 띠고 잘 알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나오려 하는데

원장님께서 아이가 몇째냐고 물었다.



셋째인데요.



원장님이 웃으시며

셋째는 정보보조금 반, 구청보조금 반 해서

100% 양육보조금이 지원된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순간 얼음이 되었다.

너무나 뜻밖이었다.

전혀 모르던 정보를 이렇게 우연히도 얻게 될 줄

정말 몰랐다.

내겐 너무나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렇게 막내를 영유원에 입학시키고 

나는 맞은편 상가건물 2층에 수학학원을 개원했다.



그리고....

그 막내가 초등 5학년이 된 지금까지

일과 육아와 집안일을 병행하며 살았다.

중간에 첫째의 고등학교 자퇴로 학원을 정리할 때도

과외로 수업을 이어오며 쉬지 않고 일을 했다.

심리대학원을 마치고 상담 센터에 오전에 출근할 때도

오후 과외 수업은 늘 있었다.

다시 학원 수업을 하기 시작한 것이 작년 5월이었는데,

일 년 남짓 다니고 어제 그 학원 일도 정리하게 되었다.



난 이제 백수가 되었다.

병원 입원 전 일주일 동안 먼지 쌓인 집안 청소도 좀 하고

옷장 정리, 냉장고 정리도 하고, 

베란다 쌓여놓은 짐들도 정리를 하려 했다.



어제 첫날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도무지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육체적인 일은 좀 아닌가 보다 생각했다.


책을 손에 들고 읽기 시작했다.

도무지 한 줄도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무슨 이야기인지

몇 번을 돌아가 다시 읽어야 했다.

책 읽기도 포기하고 영화나 유튜브 영상을 보기로 했다.


영화를 고르는 데 한참이 걸렸다. 

하나 고른 액션 영화는 계속 스킵 버튼을 누르게 되었다.

별 의미나 재미를 못 느꼈다. 

유튜브 영상들도 내 머리 밖으로 미끄러져 나가 버렸다.

머리 입력장치에 방수막을 씌운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여섯 시 반이다.

아이가 학원에서 돌아올 시간이 다 되었다.

서둘러 주방에서 밥을 하고 저녁을 만들었다.

막내와 여유 있게 둘이 앉아 학교에서 일어난 일,

학원에서 일어난 일을 들었다.

어제 학원 일을 마무리하며 집에 돌아올 때는

막내랑 함께 할 시간이 많으니 같이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많겠다고 생각했는데

하루 종일 멍해 있었다.


워커홀릭의 아무것도 없는 백수의 첫날은

이렇게 갔다.

시간이 많으면 정말 더 많음 일을 할 줄 알았는데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에너지 문제이다.

에너지를 억지로 끌어 쓴다고 나아지지 않는다.

나는 지금 좀 내 상황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다.

우울로 가지 않고 싶은데

억울하고 눈물이 난다.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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