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낮에 왔어요."

엄마에게 부치지 않을 편지(2)

by going solo

슬픈 인생을 살다

외로이 세상을 등진

' J'를 기리며




오늘은 낮에 왔어요.

한참 아이들이 몰려 레슨을 하느라 정신이 없어 그는 오래 기다려야 했어요. 그이는 상담실에 혼자 있었어요. 연습실을 오가며 흘낏흘낏 넘겨 본 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게 아마도 무거운 말을 가슴에 쟁여 놓은 것 같았어요. 한 시간이 넘도록 기다린 그의 앞에 마주 앉았을 때도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어요. 오늘 휴가를 내서 회사에 가지 않았대요. 그이가 왜 그 시간에 왔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는데요. 그러고는 또다시 한참 동안 말이 없이 앉아있기만 했어요. 하고 싶은 말이 뭐냐는 채근을 받고야 나를 바라보더군요. 그의 눈자위가 마치 동굴 같았어요. 그렇게 머뭇머뭇 내놓은 말은 이제 다시 오지 않겠다였어요. 재혼 상대가 결정 됐나 봐요. 내가 예상한 대로 말했기 때문에 나도 당황하지 않고 준비하고 있던 말을 했어요. 잘됐네요라고요. 지금까지 그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던 것처럼 그 말도 진심이었어요. 잠깐 궁금한 생각이 들긴 했는데 그이의 새로운 아내가 될 여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어요.


내가 아이를 갖고 싶었기 때문에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 때문에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어요. 내겐 그럴 자격이 없거든요. 다만 그가 어쩌다 나와 엮여 남 다른 불행에 상처를 입는 것이 마음이 아팠어요. 그에겐 그랬어요. 나와 함께 했던 시간들은 아주 잊어요. 원래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깨끗이 지우세요. 행복하길 바라요라고도 말해 주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이가 어떤 여자의 남편이 된다는 사실에 새삼스런 서글픔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어요. 늘 그가 내게 그랬듯이 나도 담담하게 말했어요. 그이는 입 꼬리만 살짝 올리며 웃더군요. 소리도 없이요.


처음으로 만남의 기약을 남기지 않은 작별 인사를 하려던 참이었어요. 그이가 막 현관을 나서려는데 기침이 나기 시작했어요. 참았죠. 그이를 보내놓고 내뱉으려고 이를 악물고 참았는데 그럴 수가 없었죠. 가슴에, 내 폐에 질러진 불이 코로 입으로 귀로 눈으로 작고 아주 미세한 내 몸의 구멍으로 섬뜩한 열기를 뿜어내는 바람에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죠. 미친 듯이 그렇게 열기를 뱉어 놓고 나니 마지막으로 불씨가 내 손바닥으로 튀어나왔어요. 그이가 많이 놀랐나 봐요. 그렇겠죠. 그토록 눈부신 선홍색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어쩔 줄 몰라 무슨 일이냐고 다그쳐 묻는 그이에게 그저 기관지에 조금 심한 염증이 있을 뿐이라고, 약을 먹기 시작한 후 많이 좋아졌노라고 달래서 보냈어요.


엄마, 난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요. 더구나 그이에게 더 이상은 아무것도 들키고 싶지 않아요. 나의 어떤 불행이나 그런 거요. 내 삶의 마지막 순간들을 온전히 혼자이려고 해요. 혼자 겪을래요. 그 짧은 시간이 모두 지나고 난 후 그때는 어떨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이르게도 찾아온 죽음 때문에 나의 모든 세상과 화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정말로 그러고 싶어요. 그래서 혼자이고 싶어요.


불쑥, 엄마인생에 끼어든 내가 미웠다고 했죠. 큰 오빠는 이미 장성해서 며느리를 볼 참인데 엄마 뱃속으로 쳐들어온 생명이 남부끄러웠다고, 그래서 지워버리고 싶었다고, 그러려고 별 짓 다해보았다고. 엄마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던 건 아마도 고등 2학년 때였던 것 같아요. 엄마는 내가 알지도 못하는 그 일을 굳이 말씀하시면서 아주 조심스러워하셨어요. 사춘기를 막 겪고 있던 내가 출생의 비밀 어쩌고 하면서 사납게 굴 까봐 걱정하셨던 건가요? 하지만 난 우습기만 했던 걸요. 손주를 봐도 이르지 않을 중늙은이쯤 된 여자가 어쩌다 아이를 배 남몰래 언덕에서 구르던 거며 매캐하고 미끈한 생파를 입으로 욱여넣던 거며 바닥을 내려다보며 비장하게도 뛰어내리던 엄마의 모습을 상상하며 우스웠어요. 그토록 밀쳐내려고 했건만 뻔뻔스럽게도 생명을 놓지 않던 나, 그 질긴 미련 때문에 그만큼 천대받았던 것도 이미 나에겐 서럽거나 엄마가 걱정했던 것처럼 비관이라도 할 만한 그런 일은 아니었어요. 그때 그렇게 떼어 냈더라면 너 같은 딸을 못 볼 뻔했다고 엄마가 말해 주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누가 그렇게 위로해 주지 않았어도 난 세상이 좋았고 질기게도 버텨낸 내 삶이 소중하기만 했어요.


결국 그 세월 모두 고스란히 품었다가 세상에 갓 나왔을 적에도 지금도 나의 엄마로 계셔 주셔서 감사해요. 엄마의 자식이어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삶이었어요.


백내장 수술하신다더니 어찌 됐는지 궁금해요. 오빠랑 통화하긴 했는데 인공수정체를 꼭 해 넣으세요. 그러면 딴 세상 같대요. 그토록 밝은 눈으로 이 편지 혼자 읽으세요. 소리도 내지 말고 엄마 혼자서만요. 그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마흔, 내 삶의 구석구석을 엄마만 보세요. 하지만 엄마보다 앞서간 저 때문에 서러워는 마세요. 언제 올지 모르는 그래서 사람들은 잊고 사는 죽음이 나에겐 날마다 새삼스러워요. 그만큼 삶도 그래요.


엄마 사랑해요. 그리고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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