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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연 양윤희 May 17. 2023

서사와 메타 담론

              문학이 주는 최고의 기쁨

                 폴란드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 을 읽고    

  

   옛날 옛적에 가난한 두 노부부가 살았다. 그들은 매일 매일의 끼니 걱정에 고심을 하다가 가진 돈을 모두 털어 시장에서 오리를 한 마리를 사온다. 오리....... 

알을 낳는......

오리가 한 개의 알을 낳으면 그것으로 식사를 하리라. 

소박하고 달콤한 꿈...... 

그런데 어느 바보 요정의 농간인지 신의 선물인지 장에서 사온 오리는 황금알을 낳았다. 

황금알이라니.....

노부부는 어안이 벙벙하고 믿기지 않았지만 황금알을 팔아 그 돈으로 하루가 아닌 여러 날을 푸짐하게 먹을 수 있었다.

귀엽고 사랑스런 오리......

그런데 하루 한 알의 황금알을 낳는 오리의 시간을 노부부는 견뎌 낼 수가 없었다.

하루라는 기다림이 망망대해처럼 처절하고 괴로웠다. 급기야 마음이 급해진 할아버지는 오리의 배를 갈라 한꺼번에 많은 황금알을 얻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배를 쭉 가르자........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서사는 배를 가르는 할아버지가 발견한 오리의 뱃속이다. 거기엔 내장이 있고, 피가 있고, 텅 빈 알집이 있다. 황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서사는 쪽쪽이 갈라진 오리의 뱃가죽이며 할아버지가 헤집은 내장의 아토포스이다. 무언가 있을까 들여다보지만 특정한 내용은 없고, 산란하고, 실망스럽다. 짜증이 올라온다. 이런 엉킴을 써 내려간 그녀의 인내력이 놀라울 뿐이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인가가 나를 아프게 한다. 유령이다. 유령 같은 통증이다(317).” 라는 그녀의 독백은 작가의 실존적 현상을 심장처럼 드러낸다. 그녀는 아프고 있다. 재현의 불가능성을 일지감치 인정하고, 재현 자체의 동선을 드러내어 그로써 자신이 서사를 한 점에 모으는 능숙한 작가가 될 수 없음을 아프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훌륭한 작가가 아니다. 노력하는 작가이고 오리의 뱃속을 가를 칼자루를 휘두르는 용기의 작가이다. 그런데 독자는 그 휘두름에서 삶을 이루는 층층의 켜들, 도려낸 살갗의 생생한 파편을 본다. 절대 주관을 부러워하지 않는 오만한 관과 마주한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부러움(envy)이나 매개 욕망(mediated desire)이 없다. 즉 갈등이 없다. 

그녀의 서사는 인간간의 갈등이 아닌 사물과 신, 존재, 즉 자신과 에고-여기선 몸 이라고 해두자-

이런 존재와 외관간의 불협화음을 널부러지게 펼쳐낸다.     


"어쩌면 과거를 보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뒤로 돌리는 거죠. 마치 파놉티콘처럼......과거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간주하는 겁니다. 다른 차원으로 이주해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모든 걸 곁눈질로 보는 거죠. 미래나 과거가 무한하고 끝없는 것이라면 실제로 ‘언젠가’라는 시점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요. 시간은 홑이불처럼 공간에 매달려 있거나 특정한 순간이 동시에 투영되고 있습니다......우리는 이족에서 저쪽으로 깡충깡충 뛰어다닐 뿐입니다......애초에 목적지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576)"   


  그녀가 이 책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인간은 움직이는 순간에만 아름답고, 산종되고, 풍요롭다는 것이다. 정지는 초라함, 비탄, 가엾음 명멸을 의미한다. 그녀의 서사는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태초에 움직임이 있었다. 그리고 삶은 그 움직임을 지속하는 목적 없는 방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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