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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연 양윤희 May 17. 2023

서사와 메타 담론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코로나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자 차분한 마음으로 다시 읽고 싶은 책이 생겼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다. 매우 길고 서술이 얽히어 웬만한 인내심을 갖지 않고는 프루스트의 의식과 동행하기 어렵다. 대학 시절 영미 소설 시간에 잠깐 다룬 적이 있지만 그때는 작품 속에 내재된 사유의 빛을 낚아챌 만큼 삶의 경험이 없었다. 이제 많은 시간이 지났고 나는 프루스트가 산 나이보다 더 많은 나이를 먹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서사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공감할 시간이 왔다는 뜻이다. 

    내가 기억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장면은 진노랑이 주황으로 변신하는 작열하는 촛불 아래서 병약한 마르셀이 사색에 드는 장면이다. 잠이 오지 않는 밤, 하인들의 발자국 소리, 내일을 기다리는 조급함, 안달하며 기다리는 어머니의 굿나잇 키스, 그리고 방금 읽은 책의 상흔이다. 그 장면을 어찌나 생생하고 만져질 것 같이 묘사했는지 마치 내가 그의 옆에 누워있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이 책을 다시 읽으니 이십 대 때 읽은 감흥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 든다. 프루스트는 마치 물질의 본질과 원리를 연구하는 물리학자처럼 현실과 상상 그 사이를 오가며 마음의 유동을 구체적으로 관찰한다. 시 공간에 펑크를 내고 그 구멍 안에 블랙홀 같이 빠져나올 수 없는 길고 진한 사유의 독백을 끝도 없이 풀어낸다. 나는 그의 서술에 반하려 한다. 실제 사건은 별로 없다. 만남도, 사랑도 싱겁다. 그런데 그 싱겁고 소소한 일들을 엿가락처럼 늘려 초를 만든 다음 거기에 불을 붙인다. 영롱한 촛불이 주변을 환히 밝힌다.

     ‘아...... 그래! 우리의 삶은 그냥 뾰족하게 부서진 이야기의 파편들이구나...허깨비들의 환타지...착각의 파노라마.’이야기의 현실성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건 나의 환타지와 너의 실재가 만날 수 있는 하나의 접점만 있으면 그만이다. 얼마나 우스꽝스런 많은 가능성이 이 삶을 채우느냔 말이다. 오류와, 억지와, 남루한 헐벗음으로...... 오직 문학만이 모든 것에 가치를 부여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모든 이야기이며 아무 이야기도 아니다. 삶 그 자체이지만 생각의 묘사가 90%이다. 그의 이야기 중에 기다림에 관한 소고가 나를 매료시킨다. 이 소설은 기다림의 상태, 흥분, 고통, 현실에 대한 무관심을 보여준다. 이별을 전제로 한 기다림은 오히려 현실을 판타지의 영역으로 날려 버린다. 미래에 도래할 만남에만 모든 현재가 바쳐진다. 그런데 그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으니 허상을 위하여 실재를 저당 잡힌 셈이다. 이별을 상쇄하고자 하는 이 욕망은 결국 기다릴 것을 더 이상 남겨두지 않겠다는 의지이다. 기다릴 것이 없는 상태는 완벽한 현실로의 복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리학적으로 보면 기다리는 상태는 미결정의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어떤 하나의 물질과 다른 물질이 잠시 섞이면서 성긴 상태로 운동을 하여 아직 둘의 균형이 맞춰지지 않은 혼란한 상태, 즉 엔트로피가 높은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 이상한 점이 있다. 물질은 상상이라는 영역이 없다. 구체성을 띄며 실존적이다. 이것들은 시간과 공간을 토대로 변덕 없이 자신들의 위치를 정해 나간다. 용해도가 높은 것은 빨리 녹고, 밀도가 강한 것은 깨지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의 현실은 거기에 실재하지 않는 것들이 마치 실재처럼 끼어든다. 하루 종일 멍하니 무언가를 기다린다면 그것은 환상인가, 실재인가...... 그리고 이것들은 어떻게 그리도 실재와 잘도 섞이며 삶의 시간을 장악하는가.......

     이런 것들을 골똘히 생각하다가 내 인생에서 최초로 가장 강렬하게 무언가를 기다려 본 사건은 무엇이었는지 떠올려보게 되었다. 기다림, 초조한 고통, 만남, 현실로의 회귀, 기다림 자체에 대한 기다림...... 이런 서사에 들어맞을 내 최초의 강렬한 기다림......언제 였을까? 그건 놀랍게도 프루스트처럼 어머니를 기다린 일이었다. 너무 강렬하여 기다림이라기보다는 비극 같이 느껴지는 통렬함이었다. 나에게 비극이란 어떤 사람이 비참하고 슬픈 상황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내 어리석음으로 신이 내려 준 아까운 것을 놓쳤을 때, 혹은 좋은 것으로 생각한 무엇인가가 실인 즉 어리석음에 의한 오인이었음을 알았을 때 그 모멸의 순간 수치심의 다름 아니다. 바로 보들레르의 이 시의 상황이 내게는 최고의 비극인 것이다.      

                      

                      구름을 꼭 끌어안으려다

                      두 팔이 부러졌네...... 


내가 기다림의 비극을 맛 본 것이 언제던가...... 만 6세 정도 되었을 것이다.

     어느 날,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마루 쌀통 위에 종이 인형들로 살림을 차렸다. 무릎을 꿇고 쌀통 위에 종이 인형 미미와 나나를 앉힌 후 막 이야기를 나누려는데 오줌이 마려웠다. 둘러보니 마루 구석에 놋쇠 요강이 있다. 혼자 요강에 오줌을 눌 수 있는 나이였다. 마루 한켠까지 종종 걸어가서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누면 되는 것이다. 문제는 때가 계절적으로 한 겨울이었다는 사실이다. 고개를 숙이고 바지를 바라본다. 갑옷같이 꽉 끼는 곤색 쫄쫄이 바지...... 꽉 끼어 좀처럼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바지... 그걸 벗기 위해서는 두 다리를 버둥거리고, 허리를 꼬면서 몇 번의 통과 의례를 거쳐야 했다. 힘겹게 쫄쫄이 바지를 내리고, 내복을 밀어낸 후, 타이즈를 벗고, 팬티까지 발목 아래로 밀어 내야 한다. 그쯤 되면 일어 설수도, 걸을 수도 없는 한 짐의 삐에로가 된다. 웃풍심한 마루에서 하루 종일 노는 나를 위해 어머니는 너무 많은 옷을 겹겹이 끼워 입혔다. 한 마디로 용을 써야 했다. 이 사태를 어찌해야 할까...... 곰곰이 연구해본다. 큰 소리로 어머니를 불러 오줌이 마렵다고 하면 분명 네 스스로 해보라고 하실 것이다. 막내 동생을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솜이불 속에 누워계신 어머니였다. 하지만 일련의 힘든 과정을 치루지 않고 난국을 극복할 묘안이 떠올랐다. 그냥 바지에 쏴하고 오줌을 누면 된다. 오줌을 눈 후 크게 울음을 터뜨리면 어머니가 달려와 몇 마디 훈계 후에 씻기고 옷을 갈아 입혀 주실 것이다. 침울한 표정만 지으면 그만인 것이다. 그냥 바지에 오줌을 눌까? 아니면 요강까지 걸어갈까? 나의 고뇌는 끝이 없었다. 영겁의 고뇌 후에 나는 눈을 게슴츠레 얇게 뜨고 심술로 두 입술을 오므린 후 아래 배에 힘을 주고 서서 오줌을 쌌다. 뜨듯한 불쾌함이 두꺼운 겨울 바지에 스며들며 엉덩이와 허벅지에 감겨 올라왔다. 뜨듯하다 못해 뜨거웠다. 하지만 요강까지 걸어가서 그 수많은 켜켜의 바지를 벗고 볼 일을 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잠깐만 참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아무리 울고 불어도 어머니가 달려 나오지를 않으셨다. 네 발로 기어가 안방 문을 제켜보니 어머니는 계시지 않았다. 아기도 없었다. 한참을 목 놓아 울다가 오줌으로 젖어 감긴 바지를 입고 어기적거리며 어머니를 찾아 집안을 돌아다녔다. ‘어머니가 왜 없지? 언제 오시지? 난 언제까지 울어야 하는 걸까.....’그건 최고의 불쾌하고 비참한 기다림이었다. 한참이 지나 오줌이 말라갈 무렵 어머니가 급히 들어오셨다. 아기를 데리고 예방 주사를 맞혔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아무 야단도 않으시고 내 옷을 벗기고, 씻기고, 따가운 엉덩이에 분을 발라 주셨다. 다시 마루 쌀통 옆에 꿇어 앉아 인형 놀이를 시작하며 나는 비감이 들었다. 어렸는데도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이 올라왔다. 다시는 바지에 오줌을 누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기다림은 길었고 후회는 진했다. 그와 더불어 새 옷과, 향기로운 분의 감촉은 평생 잊을 수 없는 행복한 느낌이 되었다. 이후로는 한 번도 그렇게 강렬한 쾌적한 대비를 느껴 본적이 없다. 불쾌하고 고통스런 기다림에 대한 빛나는 보상이었다.

     나의 이 경험을 프루스트의 기다림으로 치환해보자. 프루스트에게 기다림이란 동전의 양면 같은 열망이다. 한 면은 다가올 무엇인가에 대한 새로운 발견의 열망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 받고 있다는 도래할 확신, 그가 열어줄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이다. 그런데 다른 면은 엽기적이게도 첫 번째 열망의 상쇄, 즉 기다림을 거두어들임에 대한 열망이다. 기다림을 종지부 찍어 더 이상 기다릴 것이 없는 평정한 상태로 돌아가고픈 열망이다. 한 마디로 정의하면 기다림에 따르는 단말마의 고통을 끊어버리기 위하여 기다린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화자 마르셀은 더 이상 알베르틴에게 집착해 그녀를 기다리지 않고 이별의 불안을 견디지 않아도 되도록 그녀를 자신의 집에 가둔다. 그런데 여기서 기다림의 양면성이 그의 계획을 좌절 시킨다. 기다릴 것이 없는 상황이 권태라는 불만을 야기한 것이다. 그는 알베르틴이 곁에 있다는 사실에 의해 사랑의 모험, 만남, 쾌락을 잃었다. 즉 기다림은 그 자체로 쾌락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는 그녀가 헤어져 떠나기를  기다린다.   

     오줌 눈 바지를 입고 어머니를 기다린 것은 어머니가 나에게 베풀 사랑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오면 이 불쾌한 축축함은 사라지고 이전의 보송보송한 느낌으로 돌아 갈 수 있다는 기대, 그와 더불어 어머니가 안 오실지 모른다는 불안한 초조감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기대였다. 기다림이 끝나고 어머니가 왔을 때 불안은 사라졌지만 잠깐의 쾌감 후에 모든 상황은 그 이전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나에게 기다림이란 잃어버린 감정의 소환이고, 내 존재를 진하게 느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의 배려이며, 아직 성취되지 않은 만족이다. 이제 잃어버린 시간에서 내 감정을 달콤하게 해 줄 보상이 없는 일은 기다리지 않게 되었다. 프루스트가 다시는 어머니의 굿나잇 키스를 받을 수 없는 것처럼 나도 어머니가 보듬어주는 쾌감을 경험 할 수는 없다. 아마도 앞으로 다가올 행복감은 기다림으로 코팅된 가짜 사탕일 것이다. 진짜는 시간 저편에 있다. 그 저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헤집는 것이 작가의 본분인 것이다. 프루스트가 옳았다. 문학만이 휘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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