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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연 양윤희 Jun 02. 2023

두 달 뜨는 밤

보들레르의 [구름]

                                                   *보들레르의 구름                     

    


      가끔 책을 뒤적이다가 마음 밑바닥부터 올라오는 폭소를 금할 수 없는 때가 있다. 그때의 웃음은 꼭 눈물을 동반하게 되는데 나는 그것이 진정한 문학적 카타르시스라고 믿는다. 예를 들어 보들레르의 어느 시에      

                      

                                                     구름을 껴안느라

                                                     두 팔이 다 부러졌다...     


라는 시 구절이 있다. 나는 그 부분을 읽다가 웃음보가 터졌는데 좀처럼 멈추질 않았다. 우선 풍만한 구름을 껴안으려 두 팔을 활짝 벌린 바보의 모습이 떠올랐고 뒤를 이어 구름을 안은 줄도 모르고 그 보드라움에 압도되어 팔을 힘껏 조이는 무자비한 정열이 떠올랐다. 그러다 계속 움츠려 드는 그 충격과 공허함 속에서 자신이 주체 못 하고 쏟아부은 열정만큼 팔이 금 가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우습고 또 우습지 않은가? 그리스의 최고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인간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숭고한 마음 상태로 영혼을 고양시킨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내 생각엔 눈물을 동반하는 희극이 훨씬 높은 차원의 정화라고 생각한다. 비극을 읽고 나면 마음이 답답해지고 그 어찌할 수 없는 환멸감에 하루 종일 외롭고 쓸쓸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이런 감정이 진정한 카타르시스라고 내게 강요한다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답해 주리라.

       ‘그건 당신이 남의 상처를 보며 스스로의 무사함을 즐기는 악한이기 때문이지......’

나에게 비극이란 비참하고 슬픈 상황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내 어리석음으로 인해 신이 내려 준 아까운 것을 놓쳤을 때, 혹은 좋은 것으로 생각한 그 무엇이 실인 즉 내 어리석음에 의한 오인이었음을 알았을 때의 수치감과 모멸감의 다름 아니다. 바로 보들레르의 이 시의 상황이 내게는 최고의 비극인 것이다. 그 비극의 순간을 최초로 맛본 것이 언제던가...... 

        어느 날,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마루 쌀통 위에 종이 인형들로 살림을 차렸다. 무릎을 꿇고 쌀통 위에 종이 인형 미미와 나나를 앉힌 후 막 이야기를 나누려는데 오줌이 마려웠다. 둘러보니 마루 구석에 놋쇠 요강이 있다. 혼자 요강에 오줌을 눌 수 있는 나이였다. 마루 한편까지 종종 걸어가서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누면 되는 것이다. 문제는 때가 계절적으로 한 겨울이었다는 사실이다. 고개를 숙이고 바지를 바라본다. 갑옷같이 꽉 끼는 곤 색 쫄쫄이 바지...... 꽉 끼어 좀처럼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바지... 그걸 벗기 위해서는 두 다리를 버둥거리고, 허리를 꼬면서 몇 번의 통과 의례를 거쳐야 했다. 힘겹게 쫄쫄이 바지를 내리고, 내복을 밀어낸 후, 타이즈를 벗고, 팬티까지 발목 아래로 밀어내야 한다. 그쯤 되면 일어설 수도, 걸을 수도 없는 한 짐의 피에로가 된다. 웃풍 심한 마루에서 하루 종일 노는 나를 위해 어머니는 너무 많은 옷을 겹겹이 끼워 입혔다. 한 마디로 용을 써야 했다. 이 사태를 어찌해야 할까...... 곰곰이 연구해 본다. 큰 소리로 어머니를 불러 오줌이 마렵다고 하면 분명 네 스스로 해보라고 하실 것이다. 막내 동생을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솜이불속에 누워계신 어머니였다. 하지만 일련의 힘든 과정을 치르지 않고 난국을 극복할 묘안이 떠올랐다. 그냥 바지에 쏴하고 오줌을 누면 된다. 오줌을 눈 후 크게 울음을 터뜨리면 어머니가 달려와 몇 마디 훈계 후에 씻기고 옷을 갈아입혀 주실 것이다. 침울한 표정만 지으면 그만인 것이다. 그냥 바지에 오줌을 눌까? 아니면 요강까지 걸어갈까? 나의 고뇌는 끝이 없었다. 영겁의 고뇌 후에 나는 눈을 게슴츠레 얇게 뜨고 심술로 두 입술을 오므린 후 아래 배에 힘을 주고 서서 오줌을 쌌다. 뜨듯한 불쾌함이 두꺼운 겨울 바지에 스며들며 엉덩이와 허벅지에 감겨 올라왔다. 뜨듯하다 못해 뜨거웠다. 하지만 요강까지 걸어가서 그 수많은 켜 켜의 바지를 벗고 볼 일을 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잠깐만 참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아무리 울고 불어도 어머니가 달려 나오지를 않으셨다. 네 발로 기어가 안방 문을 제켜보니 어머니는 계시지 않았다. 아기도 없었다. 한참을 목 놓아 울다가 오줌으로 젖어 감긴 바지를 입고 어기적거리며 어머니를 찾아 집안을 돌아다녔다.‘어머니가 왜 없지? 언제 오시지? 난 언제까지 울어야 하는 걸까.....’ 그건 최고의 불쾌하고 비참한 기다림이었다. 한참이 지나 오줌이 말라갈 무렵 어머니가 급히 들어오셨다. 아기를 데리고 예방 주사를 맞혔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아무 야단도 않으시고 내 옷을 벗기고, 씻기고, 따가운 엉덩이에 분을 발라 주셨다. 다시 마루 쌀통 옆에 꿇어앉아 인형 놀이를 시작하며 나는 비감이 들었다. 어렸는데도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이 올라왔다. 다시는 바지에 오줌을 누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기다림은 길었고 후회는 진했다. 그와 더불어 새 옷과, 향기로운 분의 감촉은 평생 잊을 수 없는 행복한 느낌이 되었다. 이후로는 한 번도 그렇게 강렬한 쾌적한 대비를 느껴 본 적이 없다.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기다림에 대한 빛나는 보상이었다.

          그날 저녁 어둑어둑 해 질 녘 즈음 등산 가셨던 아버지가 돌아오셨다. 영창에 달뜨기를 기다리던 나는 종종걸음으로 아버지께 다가갔다. 그때 내 눈앞에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가시뭉치였다. 바늘이 수 백 개쯤 꽂힌 억새보이는 가시들이 시퍼렇게 날을 새우고 내 눈앞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었다. 아버지의 웃옷 주머니에 방울방울 맺힌 서너 개의 괴물. 한 개의 바늘도 용납할 수 없는 내게 그런 거대한 바늘 다발은 충격 그 자체였다. 나는 너무 놀라 대뜸 아버지께 물었다. 

         “이게 뭐야?”                       

         “이거? 가시 뭉치지”

         “가시뭉치? 왜 이런 걸 가져왔어?”

         “우리 딸 보여주려고...”

아버지는 마루 끝에 점퍼를 벗어 놓고 환한 미소를 지으시며 손을 씻으러 가셨다. 나는 그게 보기 싫어 획 돌아서서 다시 쌀통 위의 인형들에 집중했다. 그러나 마치 그 끔찍한 가시더미가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내 갈래머리를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살며시 뒤로 돌아선 나는 마루 끝으로 기어가 가시를 만져보았다. 억세고 독했다. 순간 그런 가시뭉치를 집에 들고 온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 참 동안 가시와 나는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가시는 내게 패배했다. 그런 물건이 내 눈앞에 있는 것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아버지가 벗어 놓으신 등산복 점퍼 주머니에서 가시 자루를 잡아 빼었다. 하나의 가지에 옹기종기 매달린 가시 망울은 쉽게 내 손으로 옮겨 왔다. 그것들을 들고 어기적어기적 쌀통 위로 기어 올라갔다. 둥그런 쌀 궤가 맞닿은 벽 위에 커다란 창문이 있었다. 그 창은 옆집 담 벼랑과 바싹 붙어있었는데 옹벽이라서 틈새는 좁았고 이층 창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틈새로 수많은 쓰레기들이 너저분하게 늘어져 있었다. 집과 집이 바싹 붙어있어 사람이 드나들 수 없는 버린 공간이었다. 나는 아래를 한번 쏘아본 다음 가시뭉치를 냅다 집어던졌다.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린 것 같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가시 망울들은 빙글빙글 돌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저 아래로 떨어진 가시뭉치들이 내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이제 누구도 저런 이상한 물건에 손을 댈 수 없을 거라 생각하자 전쟁에서 이긴 것처럼 마음이 우쭐해지며 속이 시원했다. 그러나 그 시원함이 그토록 긴 세월 씻을 수 없는 회한이 되어 내 뇌리 속에 영원한 도장을 찍을 줄이야....... 

         뭐가 그렇게 신이 나신 건지 저녁을 다 드신 아버지가 호탕하게 웃으시며 나를 불렀다. 물론 그 가시 뭉치를 찾으시며 말이다. 아버지는 등산복 주머니를 이리저리 살피시다가 고개를 갸우뚱하셨다. 

         “분명히 가져왔는데? 탐스런 녀석들로 말이야.”

         “저도 보았어요. 이상하네......”

어머니도 한몫 거드셨다. 하지만 나는 전혀 마음의 동요가 없었다. 그런 물건을 집에 들고 온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기에 그걸 애타게 찾는 부모님의 모습이 오히려 밉고 싫었다. 나는 온갖 심통 사나운 눈초리를 하고 목청껏 소리를 내어 따지듯 물었다.

         “아버지!, 그런 왕 가시를 왜 집에 가져왔어? 내가 다 아래로 던졌어, 저기 옹벽창문 아래로......”

 두 분이 어떤 반응을 보이셨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배낭 속을 뒹굴고 있던 가시 뭉치 두어 개가 다시 내 눈앞에 버젓이 버티고 나타난 것 외에는... 

아버지는 잘 보라고 주의를 주신 다음 젓가락을 양손에 움켜쥐고 가시 속을 푹 찌른 후 둥그런 뭉치를 쭉 벌리었다. 그러자 이게 웬일인가. 그 속에서 반드르르 윤이 나는 알밤 세 톨이 쏙 고개를 내미는 게 아닌가. 잠시 동안 시간이 멎은 듯 내 사유는 멈추었다. 나는 너무 놀랐다. 마치 할머니께서 읽어주시는 흥부전의 박을 탄 것 같기도 하고 도깨비방망이가 ‘뚝딱’ 하고 가시를 알밤으로 바꿔 놓은 것 같기도 했다. 잠시 후 눈 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분해서였다. 나를 속인 내 성급한 사유에 대한 서러운 분노. 아버지가 입에 넣어준 오독오독한 생밤의 달달한 향취를 한껏 물고 나는 다시 쌀통 위로 기어 올라갔다. 어두움이 얼기설기 공간을 메우는 바람에 내가 던진 밤송이는 이제 보이지 않았다. 나는 밤송이와 나 사이의 그 깜깜함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그때의 상실감은 짙은 후회감과 짝패를 이루어 내 마음속에 깊이 침윤되었다. 다시는 바지에 오줌을 누지도, 밉다고 물건을 버리지도 않겠다는 짙은 비감이 몰려왔다. 싫은 것들은 싫은 짓을 해서 나 자신까지 싫게 만드는 묘한 재간을 가지고 있었다. 그날은 셰익스피어의 비극보다 더 비극적인 날이었다. 구름을 안다가 팔이 부러진 것처럼 내 사유를 과신하다가 감정이 산산이 부서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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