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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연 양윤희 Jun 02. 2023

메타감정의 역사

뇌로부터 시작하는 감정

건포도 크기만큼의 어두침침한 타원형 반구가 약간 더 밝은 빛의 뇌 물질 속에 스며든 것이 편도체이다. 나는 이것을 보자마자 그것만 따로 떼어 내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간이나 신장 같은 기관이 아니었다. 간이나 신장 같으면 몸통에서 자유자재로 떼어 내거나 부치거나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눈엔 마치 누군가 양배추를 가르듯 뇌를 절단한 후 그 속에 편도체를 박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한 학생이 포름알데히드가 담긴 여러 개의 통 안에 잠겨 있는 수많은 뇌의 단면 중 유독 편도체가 잘 보이는 것을 찾아내어 조심스레 내게 들고 왔다.

이것은 2009년 12월 어느 이른 아침, 유럽에서 가장 큰 베를린 샤리테 해부학 연구소의 루돌프 연구실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나는 1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던 러시아 병사들을 대상으로 공포의 역사를 연구 중이었고, 공포에 관한 인간의 반응을 관장하는 편도체를 보고 싶은 열망에 충만하여 신경과학 저술에 관한 자료를 찾는 중이라고 이곳으로 이메일을 보냈었다. 즉각 반응이 왔고, 덕분에 월요일마다 의과 대학생들의 해부학 과정에 참석할 수 있었다. 드디어 편도체를 보게 된 것이다. 교수보다 먼저 도착해서, 학생들에게 내 관심을 얘기하고, 하얀 가운을 입은 4학기 학생들이 적합한 편도체를 찾기 위해 플라스틱 양동이에서 뇌를 하나씩 꺼낼 때마다 포름알데히드를 뚝뚝 떨구는 뇌를 바로 옆 테이블에서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그때 마침 두 여학생이 테이블 위에 놓인 몸이 담긴 포장지를 들어 올렸다. 그들은 푸른색 비닐 커버를 제거하고, 다음엔 머리를 감싼 붕대를, 거죽을 벗기고, 시체를 앞쪽에 놓은 다음, 나무 블록으로 머리를 받치고, 두개골 위쪽을 톱질한 후, 집게와 메스를 이용해 동공 안쪽 깊은 곳에서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 학생들이 내가 연구하는 인식을 담당하는 조직 아랫부분을 파고들고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녀들은 곧 어떤 지점에서 두려움의 내적 성소, 모든 감정의 가장 근본적 기점인 편도체와 맞닥뜨릴 것이다. 

편도체는 1819년 독일 해부학자 칼 프리디리히 부르다 흐(1776-1847)에 의해 명명되었는데, 아몬드 형태의 모양 때문에, 그리스어 알몬드를 본떠 이름 붙여졌다. 1930년 즈음에는 동물 실험과 환자 연구를 통해 이곳이 위협으로 야기된 모든 신경 과정과 반응이 일어나는 영역임이 드러났고(예를 들어, 독사로 대표되는 위협 같은), 그것은 평정 상태에 있던 신경 체계의 활성화(근육의 긴장을 높이고, 맥박을 가속화하여, 단시간에 뱀으로부터 도망치는데 필요한 모든 것)를 진행한다. 1980년대부터, 컴퓨터 단층 촬영으로 인한 새로운 영상 절차로 이런 관점이 더욱 강화되었다. 나는 조야한 네온 불빛이 비치는 해부학 테이블 위에서 작업을 하는 학생들에게 편도체의 기능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을 물었고, 그들은 편도체가 ‘부정적인 감정’ 특히 ‘두려움’을 관장한다는 데 동의했다. 

편도체의 중요성에 대한 대중적인 지식은 뉴욕 신경과학자인 조지프 르두의 『감정적인 뇌: 감정적 삶의 신비한 토대』(1996)가 베스트셀러가 되어 여러 언어로 번역된 데 기인한다. ‘아미 그 달로이즈’라고 이름 붙은 음악 밴드에서 연구실의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헤비메탈 전기 기타를 연주하던 르두는 두려움에 이르는 두 가지 길, 즉 편도를 통한 빠른 길과 대뇌 피질을 통한 다소 느린 길에 관해 이야기한다. 르두에 의하면, 위협(뱀)이 감지되면, 이 정보는 12밀리 초에 걸쳐 편도체에 도달하고, 신경 체계는 진화론적 생물학에 근거하여 싸울 것인지 아니면 도망칠 것인지를 판단한다.  삶과 죽음의 가능성을 결정하는 이 빠른 반응은, 몸을 위협에서 도망치게 할 것인지, 맞서 싸우게 할 것인지 준비시킨다. 그때, 그것의 두 배에 해당하는 시간에 동일한 정보가 피질로 전달되어 계산한다: 그것이 정말 뱀일까?, 아니면 뱀처럼 보이는 나무 조각일까? 정말 뱀이라면 살아있는 걸까, 죽은 걸까? 그것이 살아 있다면 독사일까, 아니면 무해한 뱀일까? 실제적인 위험이 없다면 피질은 편도체에 신호를 보내고 신경계는 진정된다. 르두의 책에는 이 과정이 삽화의 암시적인 힘을 발휘하며 상당량 묘사되어 있다. 1996년 이후 공포를 다루는 자료로는 이만한 삽화가 없다 [그림 1].

그 이후로 편도체는 너무 유명해져서 내가 군인들 사이의 공포에 관한 역사적인 연구를 하고 있다고 언급할 때마다 질문을 받았다. 오늘날에는 신경생물학적 용어라는 옷을 차려입지 않고서는 군인들이 느꼈던 공포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적용할 인류학적 상수란 없다. 이 사유의 기저에는 시간이나 문화를 망라해서, 호모 사피엔스부터 실험실의 쥐까지, 모든 동물이 느끼는 공포감의 중심에는 확실한 신경생물학적 단초(almond)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19세기 이후로 문화적 보편성과, 시간을 초월하여 모든 종의 생물학과 심리학의 심층에 기본적으로 굳게 연결된 감정 연구의 한 기둥이었다. 옆 테이블에서 탐구하는 학생들에 의해 포착된 뇌 중심에 깊이 박혀있는 편도체의 위치가 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면 편도체란 무엇인가? 그것은 뇌에서 특별한 작용을 하는 활성화된 신경세포의 덩어리이다. 최소한 대부분 연구자가 여기에는 여전히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즉각적으로 드는 의문은 도대체 어떤 신경세포가 편도체에 속한단 말인가? 근처의 다른 조직들이 신경세포를 구성하기 때문에 그와 연관 지어 그렇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처음 편도체를 보았을 때, 뇌 단면의 어두운 부분과 그것을 둘러싼 좀 엷은 빛깔 사이의 점진적인 침착으로 인해 명확한 구분이 어려워 다소 당황했다. 그리고 편도체의 기능에 대한 의견의 불일치도 있었다. 편도체가 부정적인 감정에만 책임이 있다는 생각은 점점 쓸모없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오늘날 편도체는 후각이라든가, 시각적 인지 작용, 재즈 음악가가 악보를 보고 즉흥 연주하는 능력 등을 담당한다. 이것에 덧붙여 편도체의 신경세포 조직과의 연결은, 실험에서 밝혀진 것처럼, 설치류와 인간 사이에서 다르게 도출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엄밀히 말해, 편도체에 대한 오해는 그것이 뇌의 딱 절반 부분에 한 개만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연결되던, 별개의 작업을 수행하던, 그것은 통상적으로 신경생물학자들에게 강렬한 토론 주제가 될 것이다. 

연구소를 떠날 때쯤 내 모든 생각은 거기에 빠져 있었는데 베를린의 옅은 겨울 태양 아래 서게 되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나는 공포에 관한 인류학 연구의 책을 읽으면서 완전히 색다른 문제와 맞닥뜨렸다. 인류학은 어떤 특별한 신경해부학적 장면을 가진 일반적이고 독특한 공포의 메커니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다른 세대 혹은 다른 문화에서 공포를 어떻게 다르게 다루었는지 그 차이에만 주목했다는 것이다. 한 가지 예로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은 19세기 중반 영국의 침입을 받기 전까지는 자기들끼리 종종 전쟁을 치렀는데 만약 어떤 마오리족 전사가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몸을 떠는 육체적 징후의 공포심을 보이면 그것은 사회적 규약인 타푸(tapu)를 어기어 아투아(atua)라는 영신에 들려 그런 것으로 여겨졌다. 이렇게 판단된 전사는 그런 신들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마오리족 중 사회적 위상이 가장 높은 여성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나가야 했다. 여성의 성기인 질은 전사가 아투아에서 자유로워지도록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만약 그가 떨지 않고 가랑이 사이를 통과할 수 있다면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져 전장에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여전히 떤다면, 정화의식은 실패로 돌아간 것이기에 병사는 처벌을 받지 않는 대신 집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분명한 것은 어떤 전사도 아투라에 들린 상태로는 전쟁터에 나가지 않기에 마오리족 병사들은 공포를 느끼지 않고 전쟁을 치렀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로써 마오리족 전사의 군인 공포의 원형은 신체 바깥에 있다는 것이 판명된다. 공포는 그의 ‘영혼’, 그의 ‘정신’, 그의 ‘뇌’가 아니라 타푸라는 이름의 초월 공간과 더 높은 존재에 기인한 것이다.

이 예는 군인 공포에 관한 보편적 관념을 완전히 의미심장하게 바꾼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감정에 관한 모든 연구의 두 번째 반대 성향인 부드러움, 반본질주의, 비결정론, 사회구성주의, 문화적 상대성, 문화적 특이성, 문화적 우연성에 도달한다. 19세기 중반 이래로, 감정에 관한 학문적 논의는 이 상극적인 특성들 주위를 선회했다. 즉 강함과 부드러움, 본질주의와 비본질 주의, 결정론과 비결정론, 보편적 혹은 문화적이라는 두 가지 양극을 중심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 서로 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어떻게, 언제, 어디서 그런 것들이 창출되었을까? 그들 간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 어떤 것도 명확하지 않다. 연구는 그저 초기 단계일 뿐이다. 서기 이 천년의 첫 십 년 동안신경과학자와 여러 전문 분야에 걸친 학회에 참가한 인문학자들은 (여기서 학제 간을 이야기하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지만) 이러한 양극화가 얼마나 민감한지, 그리고 주변 캠프가 얼마나 빨리 잔인한 적으로 둘러싸이는지 알 것이다. 보편주의와 사회구성주의 사이의 양극화는 종종 언급되었다. 바바라 로즌와인 Barbara H. Rosenwein은 ‘어떤 학자는 감정을 타고난 것으로 보는 반면 다른 학자는 감정을 “사회적 구성”으로 간주한다’고 썼다. 잉그리드 카슨 Ingrid Kasten의 질문은 ‘보편성과 변수 사이 어느 곳에 어떻게 경계를 긋느냐’이다. 피터와 캐럴 스턴즈 Peter and Carol Stearns는 ‘문화에 기인한 일시성으로부터 동물의 항상성’을 분류하는 도전을 하겠다고 이야기한다. 뤼디거 슈넬 Rudiger Schnell에 따르면 ‘감정에 대한 오늘날의 역사적 연구는 기본과 상반이라는 두 가지 입장을 가지는데 하나는 인간의 감정이 단지 그들의 표현 양식만 달랐을 뿐 수천 년 동안 서로 같은 상태를 유지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감정은 일반적으로 역사적 변화로 결정되는 각 각의 고유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슈넬은 또한 ‘보편주의자들과 진화론자들’이 한 진영에 있고 ‘구성주의자들’이 다른 진영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르민 귄터는 ‘감정이 역사를 가졌는지, 아니면 인류학적 상수인지’를 질문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캐서린 러츠와 제프리 화이트는 ‘다수의 고전 이론 혹은 문학 속 감정에서 인식론적 긴장감이 발견된다’라고 결론짓는다. 이것들이 바로 보편주의와 상대주의에 포함되는 것이다. 사회구성주의와 보편주의라는 이항 대립이 발생하지 않는 곳조차 이러한 대립을 은연중에 명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예를 들자면 인종학에 연관된 의학 논문에서 “이 논문은 특별한 감정에 대한 보편성이나 문화적 특이성에 대한 논쟁은 다루지 않습니다”라고 공지하는 경우이다. 

일반적으로 보편주의와 사회구성주의 사이의 이러한 구분은 우리의 사유를 발전시키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18세기나 19세기의 저술들은 얼핏 보기만 해도 이러한 구분이 신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자연 대 문화라는 또 다른 이분법에서 비롯되었다. 17세기의 많은 유럽 사상가들에게 ‘자연’이란 여전히 열린 범주여서: 종종 다이애나 여신처럼 알레고리의 대상이거나 자연이라는 성전 속에서 널리 숭앙되어야 하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닌, 변신이 가능하여 목표를 향해 유연하게 도달할 수 있는 견고하고 확실한 것이었다. 자연은 ‘결코 현실에서는 완전히 구현된 적이 없는 의도’였기에 변하지 않는 고정된 실재가 아닌 여전히 유연한 가능성의 집합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자연은 어떤 면에서 주조될 수 있고, 변경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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