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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연 양윤희 Jun 04. 2023

인간의 진정한 소통, 가능한가?

보들레르와 쿳시의 문학 작품을 통해

                                      공감과 공명(sympathy and empathy)

                                            -- 타자를 이해한다는 것--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라는 시집에 ‘가난뱅이를 때려죽이자!’라는 매혹적인 산문이 있다. 그 산문의 핵심적 내용은 이러하다.     

  


술집에 막 들어서려는데 한 거지가 내 앞에 모자를 내밀었다. 그는 정말이지 인상적인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정신이 물질을 움직이고 최면술사의 눈이 포도를 익게 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왕위라도 뒤집을 수 있을 것 같은 눈빛이었다. 내 마음속에 있는 긍정의 악마요, 활동의 악마요, 전투의 악마는  이렇게 속삭였다. 

 “남과 동등함을 증명하는 자만이 남과 동등하며, 자유를 완벽하게 정복한 자만이 자유를 누릴 가치가 있다.”

  나는 곧바로 거지에게 덤벼들었다. 주먹 한 방에 그의 한쪽 눈이 이내 공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의 이를 두 개 부러뜨린 대신, 나도 손톱 하나가 빠졌다. 나는 땅에 떨어져 있던 몽둥이를 주워서 소고기를 두드려 부드럽게 하려는 요리사처럼 집요하게 그를 두들겨 팼다.

  그때 갑자기 — 오, 기적이다! 오, 자기 학설의 탁월함을 증명한 철학자의 희열이로다! -- 이 늙은 송장이, 그처럼 형편없이 망가진 기계가 그러리라고는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힘으로 벌떡 일어나는 것이다. 이 늙어 빠진 떠돌이는 내게 길조로 보이는 증오의 눈빛으로 달려들어 내 눈을 때려 멍들게 하고, 이를 네 개나 부러뜨리고, 내가 휘둘렀던 몽둥이로 나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 내 과감한 치료법으로 나는 그에게 자존심과 생기를 곧바로 되찾아 준 것이다.

   “당신은 나와 동등하오! 부디 내 지갑을 당신과 나누는 영광을 허락해 주시오. 그리고 당신이 진정한 박애주의자라면, 당신 동료가 당신에게 구걸할 때, 내가 지금 당신에게 시도했던 것을 그들에게 적용해야 함을 꼭 기억해 두시오.”           

  


 내게 구걸하는 거지를 불쌍하고 가련하다고 여겨 얼마간의 돈을 주는 것을 ‘동정(sympathy)’이라고 한다. 가엾음에 공감하여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동정적 공감(sympathy)을 초월하는 관념이 있다. 바로 공명(empathy)이다. 공명은 내려다봄이 아니다. 동등함을 기반으로 하는 동감 자체에 윤리의 힘을 가하여 함께 울리는 것이다. 우리는 거지의 비굴하게 구걸하는 눈빛을 참을 수 없다. 그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같은 인간이 헐벗은 채 구걸의 눈빛을 하고 스스로를 동정의 대상으로 노출하고 있는 것에 분노가 인다. 타자에 대한 진정한 공감이다. 동등한 사랑이다. 신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인간을 동정한 게 아니라 땅으로 직접 내려와 그들과 부대끼며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난을 감수한 것, 그것이 바로 공명(empathy)이다.  

   sympathy로 충분하다면 empathy는 필요 없을 것이다. 우리에겐 sympathy로 환원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인간은 스스로에게도 sympathy와 empathy를 적용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존 쿳시의  “불명예(disgrace)”라는 소설이 있다. 영문과 대학 교수인 루리는 성욕을 참지 못하여 그가 가르치는 대학원 여학생을 꼬드겨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다. 얼마 안 가 그녀의 남자 친구로 인해 들통이 나고 루리는 대학 윤리 위원회에 회부되어 심의를 받는다. 그는 동료 교수들에게 진정으로 사과를 하면 면직은 당하지 않게 해 주겠다는 회유를 듣는다. 그러나 루리는 사과 대신 면직을 택한다. 이유는 단순했다. 잠시 에로스에 씌어 성관계를 가진 것에 무슨 진정한 사과를 하느냐는 것이다. 본능의 괴로움을 견딜 수 없는 인간이 본능에 잠시 충실했던 것을 누구에게 사과해야 하는가? 그는 당당히 사직서를 내고 남아프리카에서 농부로 일하는 딸 루시를 찾아간다. 거기서 루시를 도와 농장 일을 하게 된 그...... 딸이 살고 있는 동네는 백인을 저주하는 흑인들이 넘실대고, 다치거나 병든 동물들을 안락사시키는 이웃이 있으며, 딸이 사랑하는 자연의 비옥함이 펼쳐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루리와 루시는 세 명의 흑인 강도의 침입을 받는다. 강도들은 그를 욕실에 가둔 채 딸 루시를 차례로 강간하고, 욕실에서 빠져나와 딸을 구하려는 아버지인 루리에게 알코올을 뿌려 불을 붙인 다음, 차를 훔쳐 달아난다. 머리와 얼굴, 귀에 화상을 입은 루리, 게다가 딸은 임신까지 한다. 격분에 찬 루리 교수는 딸에게 범인들을 찾아 고소하고 남아프리카를 떠나자고 하지만 딸은 아버지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딸의 반응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루리......                    

딸 루시는 아프리카를 점령하고 약탈한 백인들에게 반감을 갖는 흑인들의 마음은 당연한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은 복수보다는 아름다운 자연을 터전으로 내 준 그들의 땅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며 그것으로 그들과 화해하고 자신이 취할 것을 취하는 삶을 선택하겠다고 선언한다.

 어쩔 수 없이 딸 곁에 머무는 루리...... 그는 동물 요양소의 자원 봉사자가 되어 죽어가는 동물들을 안락사시키는 일에 몰입하는데......   

죽어가는 동물들을 보며 루리는 참을 수 없는 비애와 슬픔을 느낀다. 그런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독자는 이런 생각이 든다.

"인간에게는 타자에 대한 진정한 sympathy와 Love가 있을까?"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고, 인식하고, 또 겪고, 당하지만.... 우리 존재를 꿰뚫고 완벽하게 타자와 같은  선상에서 그들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느냔 말이다. 

분노와 절규

비애와 슬픔

혐오와 판단

이런 사유의 장을 통해서만 타자와 공감을 느낀다면.......


그건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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