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뜨는 밤-포스트코로나 시대의 메타픽션-
*악의 꽃
청명한 달 밤 증조할아버지 최 치원의 종들이 아이가 다섯 있는 과부를 보쌈해 왔다. 사전에 그 집에 논과 밭을 떼어 주기로 약속된 일이었다. 마을에서 가장 부자인 할아버지에게 하룻밤 보쌈 당하고 일굴 땅 마지기를 얻은 과부는 두서넛 있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달랐다. 그야말로 큰 사건이 터진 것이다. 할아버지가 삼십 후반이던 그 해 겨울, 과부를 보쌈하려던 그 하얀 밤...... 포대 자루에 종들이 담아 온 여인은 과부가 아닌 과부의 어린 딸이었다. 그것도 나이가 우리 외조모님과 동갑인 열여섯 밖에 안 되는 어린 수영......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인지......
“너는 그 두부과자에 손을 넣었던 아이 아니냐? 어찌 네가......”
수영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눈물을 흘렸다. 최 치원은 순간 아랫것들이 실수로 어린 수영을 잘 못 데려 왔음을 실감했다.
‘뭔가 일이 잘 못 되었구나! 이 일을 어쩐다......’ 미안한 치욕감이 들었다. 그러나 잠시 수영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는 자신의 추측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죄송합니다. 저희 어머니 대신 제가 왔습니다. 저를 거두시고 여기 연화정에서 종으로 라도 살게 해 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수영은 두 손을 조아리며 그에게 사정을 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너희 어머니가 시킨 일이냐?”
미리 보쌈을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기에 최 치원이 의아하여 물었다.
“아니어요, 달포 전에 어머니가 조치원 옛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셨어요. 연화정 마님이 일굴 밭을 주실 건데 그걸 받으면 배불리 살 수 있다고 좋아하시면서...... 저는 어른들이 하는 얘기를 몰래 엿들었어요.”
“그랬느냐?”최치원은 소녀의 당돌함이 측은했다. 또 한편 성림의 생일날 혼마쯔 과자점에서 그녀를 본 것이 우연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남루한 수영에게 진한 동정심이 안개처럼 피어올라 집으로 돌아오는 인력거에서 일본으로 팔려 갈 가난한 소녀의 어미를 보쌈하라고 일렀던 것 아닌가? 하지만 서양 떡에 손가락을 찔러 넣고 단물을 빨아먹던 딱한 모습의 그녀가 바로 그 과부의 딸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희한한 일이 로고...... 결국은 이 아이가 스스로를 나에게 데려왔구나. 운명인 게야.’최 치원은 마치 오래전에 알았던 사람인 듯 수영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영감마님이 밭을 주셔도 저를 일본에 보내실 거예요. 저희는 가진 게 너무 없거든요. 그러느니 저는 연화정의 종이 돼서 여기서 살고 싶어요. 제발 저를 돌려보내지 마셔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니 헐겁게 쪽을 지고 서툴게 어미 옷을 입은 모습이 우스웠다.
“어미는 어찌하고 네가 왔느냐? 어미가 네가 온 것을 아느냐?”최 치원이 다시 물었다.
“어머니는 도깨비 술을 먹여 재워 놓았습니다. 내일 아침에나 깨어나실 거여요.”
“허, 허......”
최 치원은 이 당황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난감했다. 상상도 못 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가 어찌할 바를 몰라 머뭇거리는데 수영은 당돌하게도 놓여 있는 술잔을 비우고 스스로 저고리를 벗었다. 불쑥 튕겨 나온 그녀의 작은 젖가슴이 애처로웠다.
천상에서 왔는가, 구렁에서 나왔는가
오, ‘여인이여’ 사악하면서도 숭고한 눈길이
덕과 부덕 뒤섞어 사방에 쏟아부으니
그대를 술에 비길 만하다.
그대는 눈 속에 저녁 해와 아침 해를 담고,
폭풍우 치는 밤 같은 향기를 퍼뜨린다.
그대의 입맞춤은 마약이요, 그대의 입술은 술 단지이니,
호걸은 무력하게 하고, 소년은 용사로 만든다.
캄캄한 심연에서 나왔는가, 밝은 별에서 내려왔는가?
홀딱 반한 ‘숙명’이 개처럼 그대 속치마에 따라붙는다.
그대는 내키는 대로 환희와 재앙의 씨를 뿌리고,
모든 것을 지배하지만 책임은 조금도 지지 않는 ‘아름다운’이여,
그대는 죽은 자들까지 비웃으며 그 위로 걸어간다.
그대가 치장한 보석인 ‘두려움’조차 매력적이다.
그대의 가장 값비싼 패물 가운데 ‘죽음 같은 욕정’이
오만한 그대 배 위에서 연모의 정에 미쳐 춤춘다.
사랑에 눈먼 하루살이는 그대 촛불에 날아가
타닥타닥 몸을 태우며 말한다. “이 횃불에 축복을!”
여인의 몸에 기대어 헐떡이는 사랑에 빠진 사나이에게서
제 묘석을 어루만지는 빈사자의 모습이 보인다.
오, ‘아름다운’이여, 거대하고 숭엄한, 그러면서도 천진무구한 괴물,
그대가 하늘에서 왔건 지옥에서 왔건 무슨 상관이랴!
그대의 눈, 그대의 미소, 그대의 발이 내게
갈망하나 아직 모르는 ‘무궁’의 문만 열어준다면!
지옥에서 온 자이던, 천상에서 온 자이던, ‘선녀’이던
나는 전혀 상관치 않는다.
그대 –눈동자마저 비단 같은 선녀여.
운율이여, 향기여, 빛이여, 오 유일한 나의 여왕이여!-
세상을 덜 추악하게 하고, 시간의 무게만 덜어준다면!
<악의 꽃>
그는 어린 그녀의 몸에 눈이 흡수되며 저절로 술잔에 손이 갔다. 발그레한 얼굴로 수영을 바싹 끌어당겨 눈을 들여다보니 꽤 아리땁고 요염했다.
“남정네가 세상에서 제일 조심해야 할 것이 무언지 아느냐?”
최 치원은 갑자기 농탕질을 치고 싶었다.
“아리따운 여인이다.”
“그럼 그 보다 더 조심해야 할 것은 무엇이겠느냐?”
“그건 술 취한 아리따운 여인이다.”그는 큰 소리로 웃었다.
연화에게는 느낄 수 없는 편안함과 풋풋함, 함부로 대해도 될 거 같은 자신감이 올라왔다. 그렇게 모든 일들이 마치 오뉴월 참외 익듯이 주체할 수 없는 힘으로 영글어 갔던 것이다.
*무녀 방울과 외조모와의 인연
사실 방울 할머니와 외할머니가 맺은 인연은 길고도 질긴 것이었다. 그것에 끄나풀처럼 나와 옥현의 인연도 따라왔다. 점술로 닥친 일을 해석하고 방편을 썼던 우리 집안은 정월이 되면 박수무당이나 무녀를 데려다 온 집안사람들의 운수와 길한 방향 조심해야 할 성씨를 점쳤다. 갑덕이라는 무녀가 연화정으로 들어온 건 할아버지가 수영을 들인 지 반년 정도 지난 후였다. 그토록 믿었던 사위가 수영과 살림을 차리고 자식을 낳자 고조할머니는 더욱 용한 무녀를 찾아 헤매신 것 같다. 바람난 사위와 어린 계집애의 정을 떼기 위해서였다. 외조모님이 열일곱 되던 해 갑덕이라는 무녀가 자신의 딸 방울이를 데리고 최 씨 집안에 들어왔다. 갑덕은 호박 같이 둥근 얼굴에 붉은 기가 흘러넘치는 이상한 무녀였다. 전라도 해남 쪽에서 왔다는 그녀는 점을 치기보다는 주야장천 김치만 담그는데 전 부치기를 좋아하는 고조할머니와 짝패를 이루어 연일 술판을 벌였다. 갑덕은 최 치원과 수영은 갈라놓을 수 없는 운명이라고 하였다. 그저 그렇게 오래오래 살아갈 것이며 지성을 드려도 소용이 없으니 오히려 손주들이 무탈하도록 재를 올리라고 고조할머니를 설득한 모양이다. 명리에 밝으신 고조할머니는 갑덕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갑덕은 중년의 퉁퉁한 무녀였는데 우리 할머니 성림 또래의 딸이 있었다. 사람들은 갑덕의 딸 방울이 친 딸이 아니라 갑덕이 신이 내려 생사를 분간 못하고 눈밭을 뛰어다닐 때 주워온 아이라고 했다. 이유야 어쨌건 갑덕은 가는 곳마다 자신의 딸 방울을 데리고 다녔고 방울은 영리하고 눈치가 빨라 어미에게 도움이 되면 되었지 전혀 거추장스럽게 굴지 않았다. 성림은 수영이 보쌈당한 이후로 집안이 시끄럽고 우울한 와중에 방울을 친구로 얻었다. 성림보다 한 살 어린 방울은 얼굴이 단정하고 말 수가 적었으며 어떤 일에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갑덕은 수영이 최 씨 집안에 들어온 것은 필연적인 운명이라 예견했다. 모든 삼라만상에 흠집이 있고 역경이 있는 것...... 이 집안만이 그걸 피할 수는 없다는 지론이었다.
“집 채 만 한 파도가 덮쳐 온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그걸 타고 넘어야지요. 힘을 빼고 그 물결에 몸을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무모하게 정면으로 맞서면 물결에 휘말려 목숨을 부지할 수가 없어요.”
단지 그런 우환을 잘 때우려면 약간의 방편이 꼭 필요하다고 하였다.
“내가 초당에 있는 그 어린년을 불러서 조용히 일렀어. 보쌈이 실수로 잘못되어 몸을 망친 것이니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논과 밭떼기를 넉넉히 줄 테니 돌아가라고 말이야..... 그런데 그 요망한 어린년이 뭐라는 줄 아는가? 못 가겠다는 거야. 여기 연화정에서 살고 싶다더군. 재서 아비를 못 떠나겠데.....”
“죽일 년, 어린것이 제 어미랑 짜고 이 집안을 들어 먹기로 작정을 한 거야.”
곰방대 할머니의 분은 삭일길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사람을 사서 어린 수영의 목숨 줄을 끊어 놓고 싶었다.
“마님! 인간에게 악운이 들어온다는 것은 죄를 지을 기회가 생긴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행식은 그 자체로는 죄가 없어요. 주인 나리가 열여섯 어린 계집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이 무신 죄 이겠습니까? 그들만을 보자면 진한 연정이지요. 그런데 그로 인해 큰 마님께서 저들을 해하시고 복수를 하시면 그만큼 악운이 들어옵니다. 떡을 쥐면 고물이 묻듯이 죄를 다루면 죄가 묻어요. 그건 신에게 맡기십시오. 저들은 저들의 행식의 결과로 무언가가 훼손되는 고통을 받을 거예요. 이런 일이 생긴 것 자체가 악운인데 거기에 부흥해서는 안 됩니다. 악운에서 거리를 두시고 근신하셔야 해요. 운명에 시험이 들어온 것이랍니다.”
곰방대 할머니는 이를 악물었다. 내가 저것들을 가만 두어서 얻는 것이 무엇이냐? 갑덕은 이 집안에 내려오는 좋은 기를 수영의 자손이 아닌 연화의 자손들이 그대로 전해받을 거라고 했다. 인정도 사라지고 재물도 사라질 수 있지만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천년백설 같은 고귀함을 할머니의 자손들이 받을 수 있게 자신이 수를 쓰겠다고 말이다.
“삶을 청정하게 유지하게 해주는 건 인간 자신이 아니라 결국 주변의 기운입니다. 좋은 기운을 잃으면 그것이야말로 패망인 것이에요.”
“이럴 때야 말로 정신을 차리시고 운을 지켜야 합니다. 제발이요.”
곰방대 할머니는 갑덕의 지론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명과 복을 지킨다면 언제든 재산과 정은 다시 이룰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손주들의 사주를 풀이하며 갑덕은 성림을 두고 이상한 소리를 했다.
“이 집안 맏 여식은 이승에 서방이 없어요. 다른 세상에 있지요. 고귀한 사주예요. 세속에 무관한 사주입니다. 겻간살이 있어요. 무관 사주가 연정이 깊은 사내와 만나는 것은 상극의 쾌에 속하지요. 생각해 보세요...... 끌어당김이 없는 사주가 애욕에 빠져 열망을 하게 된다면 그건 바닷물로 갈증을 채우려는 것과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 원진이 일어나 서로를 밀어내게 되는데 잘못하면 명이나 운을 상하게 됩니다. 원앙금침 속에서 여보 당신을 찾는 속궁합 좋은 배필을 만나면 반드시 단명하거나 해로하지 못할 것이니, 그것이 맞지 않고 그저 보비위나 잘하는 머슴 같은 사내를 만나야 해요. 그래야 명을 유지하며 평온히 삽니다. 허투루 듣지 마셔요. 마님!”
모두가 놀라고 어처구니가 없어했다. 그중에서도 외증조부는 펄쩍펄쩍 뛰면서 갑덕 모녀를 당장 쫓으라고 난리를 치신 모양이다. 그러나 그리 감정적으로 대응할 문제가 아니었다.
*못으로 걸어 들어간 연화
연화는 연화정의 물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날은 맏딸인 성림과 동갑 나기인 수영이 남편의 세 번째 아이를 출산한 날이었다. 기가 세고 훤훤 장부 같은 어머니의 마음에 못 미치는 것이 늘 미안하고 애달파서 강아지풀처럼 나긋나긋 살아온 인생이었다. 뭉치 손을 볼 때마다 애가 끊어질 듯 괴로워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녹여 들이고자 자신은 밝고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늘 다짐하던 차였다. 마침 어머니의 뜻에 따라 남편으로 맞은 최 치원은 그녀에겐 태양과 같은 존재였다. 그와의 첫날 밤은 꽃비가 내렸다. 둘째 날은 달빛이 비파가 되어 음악이 천상에서 내리는 듯했다. 셋째 날은 동지섣달 추운 달 밤 단팥죽을 먹는 것처럼 달콤하고 새알 옹심처럼 보드라운 행복감이 온몸에 퍼졌다. 네째 날은 단오에 그네를 타 듯 자유로운 기운이 새의 깃털처럼 내려앉았다. 그와의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나는 왜 여기서 메데이아가 생각나는 것일까...... 연화할머니가 메데이아처럼 잔인한 여인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아니 어쩌면 나는 연화할머니의 심정을 오비디우스가 묘사한 메데이아에게 듣고 있는지도 모른다. 복수의 방법은 달랐지만 남편에게 배반을 당한 그 심정만은 같았을 것이다. 메데이아의 이아손에 대한 사랑은 정말 헌신적인 것이었다. 부모의 나라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인 황금양털을 이아손에게 바치고 배로 도망치는 이아손이 무사히 바다를 건너도록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의 육신을 갈기갈기 찢어 바다에 흩뿌린다. 이아손이 아버지의 노화에 안타까워하자 남편의 애달픈 마음을 위로하고자 불 노초를 제조해 시아버지를 회춘시키고 남편이 나라를 굳건히 세우는데 자신의 온갖 지혜를 다 동원한다. 그런 메데이아를 이아손은 배반한다. 이웃 나라 공주와 새로운 사랑에 빠진 것이다. 메데이아의 마음은 어땠을까...... 연화 할머니는......
메데이아는 이아손에게 복수를 하려고 두 아들을 만두로 빚어서 남편의 식탁에 올렸다. 아버지가 자식을 씹어 삼킨 억장이 무너지는 치욕을 준 것이다. 메데이아처럼 연화도 최 치원에게 비수를 꽂고 싶었을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달빛이 휘황한 밤이건만 예전의 달빛이 아니었다. 마음이 행복으로 흘러넘쳐 달빛에 불을 붙이는 밤이 아니라 밤하늘에 뜬 달빛의 교교함이 마음의 모든 상념을 불태우고 전신까지 찌를 듯 침투하는 강렬한 밤이었다.
연화는 연화정 못가에 앉아있다. 황금빛이 못에 비치어 물결을 따라 아롱거린다. 밤물결을 흩뜨리는 빛의 조각들을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름답구나......’
천강유수 천 강월 天江流水 天江月
만리무운 만 리 천 萬里無雲 萬里天
‘하늘의 달은 하나지만 천 개의 강에 물이 있으니 천 개의 달이요......
만리에 구름 한 점 없으니 저 넓은 만리가 모두 새 파란 하늘이다.’
천 개의 강에 비추인 천 개의 달은 진짜 달일까? 그래, 정이란 것이 저 달빛과 같아 비추이는 대로 모든 곳에 흐르겠지. 나는 그저 천 개의 강 중에 하나인 거야...... 하지만 이제 작은 연못이 아니라 하늘이 되고 싶어. 구름 한 점 없는 청정한 하늘...... 그래서 내 품에 진짜 달을 품겠어. 이제 내 마음엔 티클만큼의 구름도 없는 것 같아.... 너무 홀가분하고 청정해! 무상한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진실된 것을 구하려는 이 어리석음이 날 이렇게 홀리는구나.
수영이 세 번째 아이를 출산한 날 밤이었다. 연화는 자신이 그리도 좋아하고 아끼는 연 꽃 가운데로 곧장 걸어 들어가 영영 사라져 버렸다. 최성임이 열아홉 되던 해였다. 다른 집 같으면 시집갈 나이가 훨씬 지나서 급히 혼처를 알아볼 시기였지만 수영이 들어오면서 성임의 혼사 따위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연화는 똑똑한 딸이 자신의 곁을 떠나는 것이 두렵고 암담했을 것이다. 게다가 믿고 또 믿는 어머니의 정신이 왔다 갔다 하고 연이은 수영의 출산은 심약한 연화의 정서를 무너뜨렸다. 결국 견딜 수가 없었고 견딜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죽기 전날 자신의 방으로 세 딸 성림, 봉림, 정림을 불렀다. 그녀가 내놓은 것은 딸들이 시집갈 때 주려던 연화도가 수 놓인 비단 이불깃과 금덩이가 몇 개 든 괴였다. 연화는 그것을 큰 딸 성림에게 건네주면서 물끄러미 딸들을 바라보았다.
“아가! 필요할 때 쓰거라, 삶은 환이니 너무 속 끓이며 살지 말고. 인연이 없으면 부처도 못 돌보는 것이니 없는 인연에 연연하지 말고, 닥친 인연에만 최선을 다 하거라. 태인 대로 살거라...... 그리고 할머니를 잘 보살펴다오.”
삶이 환이라는 말은 곰방대 할머니께도 늘 듣던 말이라 성림은 어머니의 말을 그저 지나가는 풍월로 들었다. 그러나 그 말이 마지막 말이 될 줄이야......
* * *
초록이 가득 번진 연못가에 드니
풀내음이 독처럼 강하게 눈 안을 자극하네......
연도 있고
학도 있고
잉어도 뛰어노네......
현상이 천상의 그림자라면
오늘은 그림자 지기 좋은 날인가 보네.
못에 어마니와 할마니도 비추일런가!
왜 매혹인가? 말이 말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을 시라고 한다. 사유가 감정에 홀리는 것은 매혹이다. 나의 외증조할머니가 수영이 셋째 아이를 낳던 날 연화정 깊은 연못으로 그냥 걸어 들어가신 장면을 상상하면 그저 매혹을 불러일으키는 한 편의 시처럼 보인다. 할머니의 마음에 빙의하여 죽음이라는 심연 속에 자신을 내 맡긴 여인의 고통을 진솔하게 묘사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 장면에 감정이입을 해도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다. 전혀 슬프지가 않다. 달을 따라 월궁으로 들어간 할머니가 솜털처럼 가벼워 보인다. 인간은 슬프고 고통스러워서 죽는 것이 아니라 너무 덤덤해서 죽는 것 같다. 감정과 삶을 분리할 수 없어 그 무덤덤한 권태 때문에 그냥 자신을 놓아 버리는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의 글을 쓰다가 한참을 에둘러 방황을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사랑하는 남편의 외도와 변심으로 하늘이 무너질 듯 상심한 슬픔을 이해 못 할 것은 없었다. 이해는 되는데 감정이 닿지를 않는다. 왜일까? 왜일까...... 정말
연화 할머니를 생각하면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디오니소스의 어머니 세멜레도 떠오른다. 물론 연화와 세멜레가 무슨 연결 고리가 있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밤마다 만나는 연인이 올림포스 최고의 신 제우스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불타 죽을 것을 각오하고 연인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 주기를 갈망한 세멜레...... 나는 그녀가 유모로 변장한 헤라의 마수에 걸려 죽음에 이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세멜레는 제우스를 사랑했고 그와 동침하여 디오니소스를 잉태한 상태였다. 밤마다 그녀를 사랑해 주는 남정네가 절대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어느 날 자신이 천상의 신 제우스라고 말해 주었을 때 그녀는 얼마나 놀라고 흥분했을까...... 아마도 제우스를 사랑하는 마음이 보름달처럼 부풀어 오르고 황홀했을 것이다. 그녀는 영리했다. 사랑하는 연인이 제우스이니 인간인 자신이 천상의 신과 사랑을 이어갈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을 것이다. 그날 밤 자신에게 찾아온 유모가 헤라의 변신임을 그녀는 알아차렸다. 헤라의 입에서 사특한 권유 -사랑하는 님에게 전신을 보게 해 달라는- 가 전달되었을 때 세멜레는 자신의 죽음을 감지했다. 그녀는 죽을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 인간, 인간......
천상의 왕비 헤라가 그녀에게 강림하여 죽음을 권유한 것이다. 세멜레는 배 속에 아기를 떠올렸다. 그 애를 인간이 아닌 신으로 살릴 길은 제우스 앞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뿐이었다. 이제 새벽이 밝아 오로라가 그들의 침상에서 걷히게 되어 제우스가 천상으로 올라가면 헤라가 어떤 간계를 부릴지 모를 일이다. 인간인 그녀의 몸속에 자라는 아이는 너무도 위험했다. 그녀는 괴로웠다. 세멜레는 제우스에게 간청한다. “제발 저에게 신다운 위엄 있는 모습을 드러내 주세요. 당신의 본모습을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볼 수 있다면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결국 제우스가 세멜레의 간청에 굴복하여 번갯불 같은 눈부신 광채 속에 모습을 나타냈고 세멜레는 자신의 연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신의 찬란한 광채와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길에 그만 타 죽고 말았다. 세멜레는 죽어가며 자신이 잉태한 디오니소스를 제우스에게 부탁했다. 제우스는 세멜레의 몸에서 디오니소스를 빼내어 자신의 넓적다리 깊은 곳을 자궁으로 변모시킨 뒤 찔러 넣는다. 그녀는 인간이지만 그녀의 아들은 신이 되었다. 세멜레는 자신의 삶을 반환하여 디오니소스를 천상에 입적시킨다. 연화 할머니 또한 사랑의 무상함을 처절히 깨닫고 스스로 달로 입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