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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연 양윤희 Jun 08. 2023

달 밤에 치러진 보쌈

두 달 뜨는 밤-포스트코로나 시대의 메타픽션-

                                                      *비극의 전조               


   “아침부터 까치가 울어 대는 것을 보니 좋은 일이 있을 것 같구나.”연화는 기쁜 마음이 들었다. 이틀 후면 동짓달 보름, 성림의 생일이었다.

    ‘우리 림이가 벌써 열여섯이라니 너무 기쁘구나......’

곱고 영특한 딸에 대한 사랑이 마음 가득 차 올라왔다. 아들들과는 다른 감해였다.  공주에서 학교에 다니는 재서와 희서에게도 미리 사람을 보내 연화정으로 오라고 한 참이었다. 동생의 생일이니 꼭 선물을 준비하라고 일렀다. 곰방대 할머니는 손수 팥 단지와 백설기를 찌고 작년 봄에 말려 두었던 진달래로 화전을 부치기 위해 찹쌀을 맷돌에 갈고 있었다. 집안에 일을 도와주는 사람들도 모두 싱글벙글 이었다. 사 나흘은 맛있는 음식과 술을 실컷 먹으며 놀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가!......

    공주로 보냈던 행랑아범이 연화정에 돌아온 건 늦은 저녁이 지나고 나서였다. 그는 헐레벌떡 연화의 안채로 가서 말하였다.

   “도련님들이 전차를 타고 모레 한밭역으로 오신 답니다. 점심 나절에 도착하실 건데 혼마치 일본인 잡화점에서 살 물건이 있으시데요. 아마도 애기 씨 선물인 것  같은 디유?”

   “그래? 그럼 성림이와 나도 나들이 겸 인동으로 가서 모리가나 앙꼬과자와 요깡을 넉넉히 사서 아들들과 같이 오면 되겠어. 행랑아범이 한밭역에 인력거랑 채비를 좀 해줘.....” 

   연화는 모처럼의 나들이에 마음이 들떴다. 맏딸 성림을 데리고 시장 구경을 하고 든든한 아들들과 과자를 듬뿍 사서 나눠 먹을 생각을 하니 침이 돌았다. 최 치원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들뜬 채 환하게 웃고 있는 연화를 보니 호기심이 일었다. 

   “부인, 나도 같이 가면 안 되겠소? 성림이랑 너무 좋아하니 질투가 나서 따라가고 싶구려.”

   “예?....... 같이 가셔요. 뭬가 걱정이셔요?”연화는 평소에 말이 없는 남편이 여자처럼 수줍게 부탁을 하자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성림은 곰방대 할머니가 중국 공단으로 지어 준 산호색 저고리에 남색 치마를 입었다. 머리엔 진주 댕기를 드렸는데 서역국 보따리 보석상이 입이 닳도록 자랑 질을 하던 청 진주가 댕기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외조모의 선물이었다.

    “옥황상제를 모시는 선녀가 와서 보고 기절하겠네...... 내 강아지..... 어여쁘고 어여쁘구나. 그렇게 차리고 혼마쯔에 가면 일본 것들이 조선 아가씨에게 홀딱 반 하겠는걸?”곰방대 할머니는 자신의 분신이 사랑스러웠다.     


                                                          *             *            *


   비가 많이 와 갑천이 넘치면 주변의 넝마 거죽으로 만든 집들은 푹 젖은 풀죽이 되어 썩은 내가 진동을 했다. 아버지가 이유를 몰라 약도 쓸 수 없는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 죽자 수영과 졸졸이 어린 동생들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외가가 있는 갑천 근처로 이사를 왔다. 어머니에겐 아버지의 병 수발과 다섯 아이를 건사하는 일이 너무나 고된 일이었기에 농사일은 손을 놓은 지 오래였고 맡긴 땅에서 제 때 소출을 내지 못하자 땅 주인은 옆 집 삼동이 네로 소작을 넘겼다. 수영 어머니는 남편을 장사 치르고 한 해 만 사정을 봐준다면 몸을 추슬러 자신이 손수 농사를 짓겠다고 사정을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밀린 빚을 탕감해 주는 조건으로 더 이상은 농지를 불하받을 수 없었다. 열다섯 수영은 조치원을 떠나는 것이 싫었다. 물론 조치원과 한밭이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어린 시절을 보낸 정든 동네를 떠나 한밭이라는 낯선 곳으로 가는 것이 가슴 시렸다.

   “그곳에 가면 커다란 전차도 볼 수 있고 네가 좋아하는 앙꼬빵도 먹을 수 있단다. 외삼촌들도 있으니 든든하고......”

   수영은 어머니의 부추기는 말이 하나도 귀에 달콤하지 않았다. 외삼촌들이 일본인 인력거를 끌며 갑천 근처의 넝마 집에 살고 있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한밭역 근처에는 원동 혼마찌라는 일본인들이 거처하는 큰 동네가 있었다. 일본인들은 필요한 것이 얼마나 많은지 그곳엔 인동 시장이라는 커다란 장이 들어서 조선인들이 일 할 곳이 많았다. 어머니는 인동 시장의 떡 방앗간에서 팥을 빻고 고아 일본인들이 죽고 못 사는 요깡 만드는 일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어미가 먼저 일감을 구하고 자리가 잡히면 수영이 너도 일거리를 마련해 줄거니 그동안은 어린 동생들을 잘 보살펴야 해......”

어머니가 새벽부터 일을 하러 인동으로 나가면 수영은 줄줄이 거죽대기에 누워 자는 동생들을 깨워 죽을 끓여 주어야 했다. 가난은 끝도 없는 밀려오는 오랑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혼자 아무리 팥을 고아 삶아도 우리 형제들이 추위를 피할 따뜻한 집 한 칸도 못 마련할 것 같아...... 차라리 이럴 바에야 다시 조치원 옛 집으로 돌아가 외삼촌들과 농사를 짓는 것이 낫지 않을까?’

   수영은 장녀답게 집안의 미래를 걱정하며 계획을 세워 보지만 일본 맛이 들은 외삼촌들은 인력거를 끄는 것이 큰 벼슬이라도 되는 양 소작 부쳐 사는 일에는 관심도 없었다. 

   어느 날 큰 비가 내려 집이 젖자 어머니는 수영과 어린것들을 데리고 인동 상점으로 피신을 갔다. 일본주인은 수영 어미에게 친절을 베풀어 비가 멈출 때까지 방앗간 부엌 샛방에서 머물다 가라고 허락을 해주었다. 대신 낮 시간 동안 손님이 들 때는 절대 어린것들의 소리가 전방 밖에 들리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면서 말이다. 수영과 그녀의 어미는 코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며 고마움을 표현했다. 아이들은 모두 방 안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수영은 틈만 나면 전방으로 나가 바닥 청소와 떡이나 빵을 만든 수채 그릇을 제발저리게 닦아 반짝반짝 윤을 내었다. 일본 주인은 시키는 일을 곧 잘하는 수영의 엽렵함이 마음에 들었다. 

   “수영이가 모리가나 전방에 이 고운 단팥을 좀 가져다주면 좋겠어...... 오늘 조치원 마님 댁에 큰 잔치가 있어서 아침 일찍 팥 과자를 사러 온다고 하던데?”

   “네, 제가 다녀오겠어요.” 

수영은 조치원 마님이라는 말에 연화정을 떠올렸다. 분명 연화정에 잔치가 있어 앙꼬과자를 사러 오는 것이다. 

   ‘그런 큰 저택에 사는 마님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인동 시장에 과자를 사러 오실까......’

수영은 궁금했다.     


                                                   *            *           *


   최 치원과 연화, 성림은 정오 즈음 한밭역에 도착하여 인력거를 타고 인동 시장 모리가나 제과점으로 향했다. 행랑아범은 역 앞에서 기다리다가 그곳에 도착하는 재서와 희서를 데리고 그곳으로 오기로 되어 있었다. 모리가나의 일본 주인은 조치원 대부호 최 치원의 가족들이 자신의 과자점을 찾아 준 것이 황송할 뿐이었다. 그는 연화정 맏딸의 생일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당시 최고의 값을 먹일 수 있는 하얀 크림 케이크를 진열대에 올렸다. 케이크 위에는 진분홍 꽃과 초코라는 단약으로 ‘무병수’라는 복언을 적어 놓았다. 그들이 상점 안으로 발을 들여놓을 때 마침 방앗간에서 심부름 나온 수영이 찹쌀반죽과 팥물을 전방 뒤편으로 나르고 있었다. 그녀는 성림을 모습을 보고 그만 기가 죽고 말았다. 자신과는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 같았다. 아니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연화정 마님은 자애롭고 그의 남편 최 치원은 당당했다. 그들은 마치 후광을 두른 듯 빛 나 보였다. 성림에게 풍기는 향기가 상점을 가득 메우고 만면에 웃음을 띠고 과자를 고르는 그들에게 한없는 부러움이 피어올랐다.

    “애기 씨! 이 백설 눈 꽃 같은 크리무 떡을 보십시오. 입에 넣으면 봄눈처럼 사르르 녹아 없어집니다. 도쿄의 부자들도 비싸서 못 먹는 서양의 생일 떡 이랍니다.”성림은 희한하게 생긴 케이크에 눈이 갔다. 

    “두부로 만든 것이냐?” 최 치원이 물었다. 

    “아닙니다. 두부가 아니라 그 무엇이냐 소젖을 굳혀서 꿀을 섞은 크리무라고 하던데......”일본 주인은 한참을 설명했다.

그들이 케이크를 탐색하고 있을 때 상점문이 열리며 재서와 희서가 들이닥쳤다.

    “아버님, 어머님이 같이 오셨어요?”

아들들은 양친 부모가 화과자 진열대 앞에서 과자를 고르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우리 집은 조선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야..... 어찌 여식을 저리 아끼신단 말이야? 우리 성림이는 불알이 둘 달린 아들이야.”

모든 사람들이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환한 행복감이 상점 안을 메우고 재서와 희서의 늠름함에 수영은 또 한 번 가슴 저리게 그들이 부러웠다. 잠시 후 모리가나 주인은 케이크를 진열대 밖으로 꺼내 올렸다. 포장을 하려는 것이다. 아침부터 큰 수익을 올린 그는 기분이 좋아 노란 다마 사탕을 나눠 주었다. 헐벗은 수영이 꺼내 놓은 케이크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최 치원은 그녀에게 눈길이 갔다. 자기 딸 또래의 참한 어린아이가 왠지 가엾어 보였다. 그때 수영은 눈이 부시도록 하얀 서양 크리무에 그만 마음을 홀딱 빼앗기고 말았다. 침이 돌았다. 저것을 조금이라도 입에 넣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간절히 찍어 먹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둥그런 가장자리에 마치 너풀 치마처럼 테를 두른 하얀 눈송이 같은 서양 떡...... 살짝 손에 묻혀 뒤춤에 감추자!. 수영은 숨을 몰아쉬고 눈의 동공을 확장시키며 손가락으로 떡의 한 옆을 살며시 쿡 찔러보았다. ‘푹!’ 온 우주가 무너질 듯 한 붕괴였다. 녹두 계피나 동부 팥처럼 탄탄한 알갱이가 아니라 마치 물이 흐르듯 물컹거리며 작은 손가락이 크리무 속으로 쑥 잠겼다. 뺄 수가 없었다. 최 치원과 상점 주인은 수영의 행동에 기함을 하여 서로 마주 보았다. 잠시 후 일본 주인은 얼굴이 벌게 져서 “테오 하나시떼!...... 손 빼!”라고 소리를 쳤고 그녀가 겁을 내며 손가락을 들추자 하얀 크리무가 똥 막대기에 똥 묻듯 듬뿍 딸려 올라왔다. 그런데 그 와중에 수영은 손가락을 저도 모르게 얼른 입으로 가져가 크리무를 빨아먹는 게 아닌가? 달고도 또 달았다. 두 남정네는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수영을 바라보았다. 케이크가 뭉개진 것이다. 성림과 연화, 재서 희서는 그런 상황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그들은 무안하여 슬그머니 다른 쪽 진열대로 시선을 돌렸다. 

    “이이구, 나으리, 저 천 것이 배움이 없어 저럽니다. 용서하세요. 쿠다사이, 쿠다사이......”    

    “너는 몇 살이냐?”최 치원이 물었다.

    “열여섯입니다.”수영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을 한다. 맏딸 성림과 동갑이 아닌가?  최 치원은 성림을 바라보았다. 제 어미와 오빠들에게 환하게 둘러 싸여 외조모의 서양 팥 전병을 고르느라 정신이 없다.   

    왜 그랬을까...... 왜 그때 외증조부 최 치원은 수영의 손을 꼭 쥐어 주었던 걸까. 왜, 왜? 냄새나고 더러운 작은 손을 감싸 쥐어주고 싶었던 걸까......

   “이 두부처럼 생긴 서양 떡은 이 아이에게 주게! 몹시 먹고 싶은 게야...... 우리는 다른 것을 골라 보겠네! 값은 내가 치름세.”

    수영은 최 치원의 자비로운 모습에 넋을 잃고 말았다.

   “예, 예...... 수영이가 오늘 횡재를 했구나.”

그들은 그렇게 첫 만남을 가졌던 것이다.         


                                                    *             *             *     


    성림 가족이 상점 밖으로 나오자 행랑아범이 요깡과 서양과자를 인력거에 실었다. 그때 두 아들 재서와 희서는 성림을 데리고 잠시 잡화점에 다녀오겠다고 허락을 구했다.

     “무얼 사려느냐?”연화가 물었다.

     “이미 주문해서 가지러 가는 거예요. 누이 선물!”

무슨 이유인지 두 형제는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 연화는 귀여운 아들들이 깔깔거리자 선물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어디 무엇인지 어미도 가서 좀 보자꾸나!”

     “천천히 다녀오구려! 나는 예 있겠소.” 

   사랑하는 가족들의 뒷모습을 최 치원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음 한편은 방금 전 상점 안에서 크리무를 핥고 있던 어린 소녀에게 가 있었다. 그때 조치원에서 이장을 맡고 있는 한 사내가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최 치원에게 큰 절을 올린 다음 짐을 싣고 있는 행랑아범 쪽으로 걸어가 아는 척을 했다. 그들의 말소리가 최 치원의 귀에 또렷이 들렸다. 

     “아이고 형님, 웬일로 이 흔마쯔까지 오셨슈? 연화정 마님이 오셨나 봐유?” 

     “그려, 아기씨 생신이어서...... 서양과자를 사러 왔지. 근데 자네는?”

     “힘들어 죽겠슈, 그 삼동이네 땅을 먼저 소작 부치던 과수댁네 집으로 정신대 착출장이 나왔슈. 그 집 큰 여식 수영이...... 근디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고 해서 찾으러 왔잖유.”

     “정신대? 일본으로 일하러 팔려 가는 것 말이여?”

     “다들, 여식들을 숨기고 멀리 친척 집 보낸다고 혀서 찾아 댕기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유. 족히 백환은 준다고 하니 수영이네처럼 먹고살기 힘든 과수댁 집은 보낼 만한디!”

     “아니 이 사람아! 백환이고 뭐고, 여식을 그 먼 곳으로 보내? 팔아먹는 거여! 그건..... 망할 놈들....”

   최 치원은 그 소리에 마음이 아팠다. 여식을 팔아먹는 가난한...... 

   멀리서 성림과 두 아들, 연화의 모습이 보였다. 재서와 희서가 손 가득 커다란 물건 두 개를 들고 오는 중이었다. 양은그릇 같기도 하고, 부지깽이 같기도 한 길쭉한 물건이었다. 연화는 얼굴에 함박웃음을 짓고 청련이 그려진 양산을 쓰고 있었다. 

     “그게 무엇이냐? 둘이 똑같은 걸 샀지 않느냐?”최 치원은 의아했다.

성림이 입을 한 다발 내밀며 말했다.

     “아버지, 오라버니들이 제 선물이라고 중국에서 나팔을 들여왔어요. 금 나팔인데 저 같은 아녀자는 숨을 불어넣어도 소리가 안 나요. 이게 제 선물인지 오라버니들 놀이게인지 아버지가 좀 맞춰보셔요.”

최 치원은 두 아들이 들고 있는 요상한 물건들을 눈여겨보았다. 뿔 나팔 모양인데 피리처럼 구멍이 올라오고 굵으면서 커다란 대가리가 둘러 있었다. 

     “아니 이것이 누이동생이 쓸 물건이냐? 그것도 두 개?”

두 아들은 천연덕스런 얼굴로 아비인 최 치원에게 대답했다.

     “소리가 너무 구슬프고 아름다워서 아버지도 들으시면 놀라실 거예요. 우리가 성림이에게 나팔을 가르칠 테니 아버지는 나중에 감상이나 하셔요.” 

연화는 두 아들이 평소에 서양나팔을 갖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누이동생의 생일날 자신들의 선물을 사는 재서와 희서의 재치가 밉지 않았다.

     “그래, 그래, 성림이가 책만 보면 되겠느냐? 악기도 알아야지! 잘했느니라. 집에 가서 외조모님께도 보여 드려야지. 어서 가자.......”

   나의 외증조모 연화 할머니는 그때 아셨을까?

자신은 달로 걸어 들어가고 그 슬픔을 이기기 위해 두 아들들이 얼마나 오래 금 나팔을 불어대며 슬퍼했는지......



                                                   *달밤에 치러진 보쌈


   보쌈은 주로 겨울밤에 이루어졌다고 했다. 밤이 길어서일까? 아니면 얼어붙은 추운 땅에 달 빛 말고는 부끄러워할 인적이 없기에? 어쨌건 그 겨울밤, 행랑아범은 몇몇 장정들과 함께 삼동이네 옆 집, 애 다섯 딸린 과부를 보쌈하러 서둘러 내 달렸다. 다른 때 같으면 마을의 어려운 과수댁을 청지기 어른이 골라 주었지만 이번엔 경우가 달랐다. 주인 나리 최 치원이 직접 지목을 하여 행랑아범을 보낸 것이다. 사실 햇살이 밝게 비추던 동짓달 보름, 큰 아기씨의 생신 날, 역으로 돌아가던 인력거 안에서 무언가 시름에 잠겨 있던 최 치원이 묻지 않았나? 일본으로 팔려갈지 모르는 애 다섯 있는 그 집 과부댁을 도와줄 방법이 없겠냐고?

   그날 나의 외증조부는 모리가나 과자점의 크리무를 핥아먹던 소녀의 상흔이 지워지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타자에 대한 뭔가 아련한 동정심이 마음 밑바닥에서 뭉개 뭉개 피어올랐던 것이다. 그 와중에 마을 이장의 이야기가 마치 도화선처럼 가난한 과부를 돕겠다는 열망을 자극했다.

     “아니 주인마님! 애를 다섯이나 낳은 헌 아낙과 무슨 운우지정을 나누겠다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도 수영이네 어미가 하도 딱해서 청지기 어른께 한 번 도와주자고 이야기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청지기 어른이 아무리 구휼을 목적으로 보쌈을 하더라도 그건 좀 아니라고 했습죠......”

     “내가 그 애 딸린 과부를 데려오라는 건 운우지정 때문이 아니라네. 딱하지  않은가? 그냥 형식적으로 하루만 내 옆에 거하게 하고 아이 다섯과 먹고살        만한 밭떼기를 떼어 줄 거야. 큰 여식이 일본으로 팔려 간 다고 했던가?”

   그날 증조부는 자신의 딸과 동갑인 생일 떡에 손가락을 찔렀던 소녀가 과부의 딸이라는 걸 눈치채셨던 것일까? 

   아니, 아마도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만약 그날 행랑아범이 일본으로 팔려갈 여자 아이가 상점 안에 있는 아이라고 말을 했다면  외증조부는 그 발로 다시 상점 안에 들어가 백 환을 주고 절대 일본으로 가지는 말라고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달밤에 보쌈해 온 여인과 하룻밤을 치른 후 날이 밝자 그야말로 조치원 일대가 발칵 뒤집혔다. 너무나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할아버지의 종들이 보쌈해 온 여인은 과부가 아니라 과부의 어린 딸 수영이었다. 사람들은 할아버지가 미리 알고 계획적으로 야밤에 딸 또래의 어린 규수를 보쌈했다는 둥, 아니면 청지기 아저씨와 아랫것들이 막걸리를 한 사발들이키고  실수로 어린 수영을 보쌈했다는 둥, 식견 있는 영감마님이 그냥 자서 아무 일도 없을 거라는 둥, 돈을 좀 쥐어서 내 보낼 것이라는 둥, 갖은 추측이  난무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 일도 없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그건 중요하지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다른 보쌈한 여인들은 하룻밤을 새고 아침이 되면 조용히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데 비해 어린 수영은 몇 날 며칠 할아버지의 사랑채에서 나오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일은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 사건으로 가장 흥분한 것은 과부였다. 그녀는 자신의 하룻밤 몸값으로 어린 자식들 입에 풀칠이나 하려던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그런데 무슨 실수였던 걸까? 아니면 실수를 가장한 음모였을까....... 아직은 부모의 슬하에서 사랑을 받아야 할 어린 여자 아이가 몸을 망친 것이다. 과부는 길길이 뛰고, 난동을 부리고,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이 일은 어떤 해결책이 없었다. 큰 소동과 긴 협의를 거친 후 과부는 아주 많은 땅과 돈을 요구했다. 곰방대 할머니와 연화 할머니는 넉넉한 돈과 함께 수영을 돌려보내라고 극구 사정했지만 할아버지는 수영을 돌려보내지 않았다. 아니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그는 어린 수영이 좋았던 것이다. 연화 할머니는 얼마나 상심을 하셨는지 넋을 잃었다. 남편이 자기 딸 또래의 첩을 들였으니 부끄럽고 분한 마음을 삭히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것도 그렇지만 보쌈으로 보시를 하려던 좋은 의도가 동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우스운 상황으로 변색되자 부끄러운 모멸감에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집안은 먹구름이 끼고 곰방대 할머니의 진노는 하늘을 찔렀다. 너무나 가슴 아픈 사랑하는 딸이고 전 재산을 물려준 믿었던 사위였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곰방대 할머니는 이제 연로하고 힘이 없었다. 어지간한 남정네보다 더 강단이 있는 여인이었지만 나이의 고독은 어쩔 수가 없었나 보다. 수영이 들어오고 곰방대 할머니의 정신이 오락가락 하자 연화와 성림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수영은 두 번째 아이를 낳고 재산은 눈만 뜨면 과부 집으로 실려 나갔다. 내성적이고 심약하기만 한 연화 할머니는 마음의 병을 얻은 게 분명했다. 성림과 그의 형제들은 어머니의 눈치를 보기 바쁘고 최 치원은 수영이 낳은 어린것들 곁에서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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