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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연 양윤희 Jun 16. 2023

남자가 여자에게 주는 것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메타픽션

       

                                    *남자가 여자에게 주는 것          

    


       “그래서 할머니는 시집간 후에 집안일을 정말 안 하셨어요?”

철들 무렵 옛이야기를 하시는 할머니를 신기한 듯 바라보며 내가 물었었다. 

     “그람, 그람...... 할머니는 시절과 절기에 떡과 전을 부치는 것 말고는 절대로 집안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 했지, 경도한 속곳도 빨지 않았어. 보따리에 쌓아 놓았다가 담장 밖으로 던지면 연화정 아랫사람들이 가져가서 빨아왔지. 할미는 책을 보고, 곰방대를 태우며 한갓지게 살았지. 시집가서 유일하게 한 일은 너희 외할아버지의 막내 여동생 머리를 빗겨 댕기를 드리고 비단옷을 지어 입히는 것 말고는 절대 하지 않았어. 가끔 놀러 오시는 댕이 고모할머니가 그분이야. 막내 시누인 고모할머니가 이 할미를 무척 따랐거든...... 너희 외할아버지는 할미에게는 먹던 떡 같은 양반이야. 애를 태우거나,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거나, 싫은 일을 강요하지 않았지. 여자의 애를 태우거나, 말만 번지르르한 놈, 한 번 싫다 한 일을 두 번 강요하는 놈은 진정한 사내가 아니니라. 남정네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여자에게 무언가를 주려고 하거든!...... 뭐든 준단다.”

      “뭘 주는데요?”

      “사랑을 주던지 돈을 준단다.”

  그 말에 웃음이 나왔다. 짓궂은 장난기가 발동해서 내가 물었다.

    “그럼 돈과 사랑을 못 줄 땐 뭘 주는데요?”

할머니께서 잠시 뜸을 들이신 후 다시 말씀하신다.

    “그땐 더 큰 것을 주지!”

    “매!” 

    “매요? 때린다는 말씀이세요?”

깜짝 놀라서 할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랴, 여자에게 줄 게 없는 못난 남정네는 여자를 괴롭히느니라.” 

    “그러니 울 아가는 복이 많아 줄 게 많은 떡 같은 서방을 만나 신간 편하게 그렇게  살거라.......”


                                                   *           *           *     

   

   인간은 아름다운가? 아름다움을 가장한 추한 존재인가? 아니면 이 두 영역이 반드시 공존하는 것일까? 인간을 알기 위해 많은 책을 보고, 사색을 하고, 남의 신비한 경험에 귀를 기울여 왔다. 그러나 여기서든 저기 서든 인간은 가끔 이치에 맞지 않고, 파렴치하며, 어리석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삶을 살아가며 그런 면은 고개만 돌리면 주변 어디서든 볼 수 있다. 공기처럼, 햇볕처럼 우리를 둘러싼 대부분의 사람들이 앞니가 훵 빠진 바보처럼 속 보이는 행동을 하고 딴청을 부린다. 그들은 자신들만 눈을 갖고 있는 양 악행을 저지르고 눈을 가린 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상을 살아간다. 그런 이들을 보면 정말 이상하다. 왜 그러는지 진정으로 물어보고 싶다. 바싹 말라버린 그들의 머리와 가슴에 물을 주고 싶다. 인간이 난처한 상황에 이르는 것은 감정의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상태에서 전혀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진실한 감정 소통을 하고도 사이가 좋아지지 않고 우수리가 낀다면 그건 신이 그 두 사람을 다른 쓰임으로 삼기 위해 작정을 하신 것이다. 수소 원자 두 개와 산소 원자 하나가 만나면 물이 된다는 것을 어찌 아는가? 눈을 까뒤집고 보아도 수소와 산소 각각에서 물을 경험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둘을 합쳐서 물을 느낀 자는 그 둘의 신비한 조합을 알고 이용할 수 있다. 그것이 수소와 산소의 진실이니까...... 외조모님은 왜 수영 할머니를 받아들이셨을까......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외조모님은 수소이고 수영 할머니는 산소이며 이 둘의 인연은 물이 되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수영으로 인해 삶을 놓아버렸는데 어떻게 돌아가실 때까지 수영 할머니와 왕래를 하시고 내 어린 시절 아무도 들이지 않는 할머니의 연화방에 그녀를 재웠을까. 한 번도 다정하지 않으셨지만 한 번도 냉대하지 않으셨다. 나는 어린 시절 세 분의 할머니가 나란히 요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아 참! 나의 외조모는 엎드려서 책을 읽으셨지...... 그리고 양쪽의 두 할머니는 두런두런 얘기를 하셨더랬다. 침묵도, 이야기도, 한 분이 먼저 잠이 들어도 고요하고 아늑했다. 누가 누구를 채근하거나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세 분이 그냥 존재하셨다. 평온하게...... 나는 그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수영 할머니가 활짝 웃는 걸 본 적이 없다. 수줍게, 작게, 마치 고양이처럼 있는 듯 없는 듯 계셨다. 왜 우리 외조모 최 성림을 만나러 그렇게 자주 외가에 오셨던 걸까. 일곱 아이를 낳으시고 다섯을 잃으셨다고 했다. 두 분의 따님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고 홀로 사셨다. 딸들이 미국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절대 가지 않으시고 우리 외조모 주변만 빙빙 도셨다.

     우리 할머니를 좋아하셨던 걸까?

     왜 눈물이 날까?          

                           


                                                  *용서에 대하여     


    어느 날 신당동 방울 할머니 집에 다니러 간 적이 있었다. 옥현이는 마당에 쪼그려 앉아 소를 그리고 나는 산신당 툇마루에서 혼자 공기 돌을 주물 딱 거렸다.

   두 분의 할머니가 방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는데 이상하게도 내 귀가 당나귀가 된 것처럼 그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렸지만 사유 깊은 이야기에는 귀가 딸려 갔다. 이런 말소리가 들린다.

   “그때 어머니가 연못으로 걸어 들어가시고 얼마 안 되어 수영이가 나를 찾아와 울며불며 자기를 용서해달라고 했지!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돼서 인지 산후 바람에 얼굴은 퉁퉁 부었고 젖이 흘러내려 앞섶이 흥건한데 고약한 냄새가 나더군......”  

우리 할머니의 말소리다.

   “그랬죠......”방울 할머니의 소리도 들린다.

   “근데 뭘 용서하라는 것이야?  연화정에 들어와 엄니를 연못에 들게 한 거?”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렇겠죠.”

   “수영이는 사는 게 고통스러워 연화정으로 들어온 것이고, 아버지는 수영이와 정분이 났고, 어머니는 스스로 못에 들었는데 나는 뭘 용서해야 하는 거야?”

   “...................”

방울 할머니가 깊이 한숨을 쉬신다.

   “그 용서라는 말이 가슴 아팠어. 수영이는 나와 띠 동갑이야. 인간이 인간을 어찌 용서한단 말이야. 나는 수영이를 용서하지 못해서 대답을 안 한 게 아니야...... 인간이 인간을 용서한다고 말하는 게 주제넘고 죄스러웠어. 나는 수영이를 받아들이고 같이 머물거나 싫어서 내 칠 수는 있지만 용서는 내 소관이 아니야......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강하기 이를 데 없는 나의 외조모 최 성림이 울고 있었다. 아주 조용한 흐느낌이 신당 전체를 물 흐르듯 흘러내렸다. 내가 댓돌에서 따라 울고 있는데 석필로 소를 그리던 옥현이가 내 옆으로 와 같이 울기 시작했다. 감정은 반드시 전이된다. 공중에는 그것들을 연결시키는 끈이 있는 것이다. 연화할머니의 슬픔은 수영 할머니에게로...... 수영 할머니의 슬픔은 우리 할머니에게로...... 그리고 우리 할머니의 슬픔은 방울 할머니에게로...... 그다음 엔 나와 옥현이 까지...... 그 슬픔이 차고 넘쳐 면면히 흘러온다. 

흘러 흘러 흘러.....

   “사실 원동 혼마찌 과자점에서 내 또래의 거지 같은 아이가 생일 떡에 손가락을 찔러 넣었을 때 부끄러움을 느꼈다네...... 잘 차린 내 행색과 훤칠한 부모, 오라버니들이 부끄러웠어. 마치 그 아이에게서 전생의 내 모습을 보는 듯도 하고...... 나도 가난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내가 그 아이 일 수도 있고 그 아이가 나 일수도 있지. 사주팔자가 좋아 우리 할머니 손녀로 태어났지만 존재는 다 같은 거라고 생각해. 그 아이의 떨고 있는 눈망울을 연화정에 보쌈당한 재수 없는 년에게서 또 보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놀랐고 또 놀랐지!”

   “왜 아니겠어요! 원래 정이 많고 이해심이 많으니 그걸 받아들인 거지 보통 사람 같으면 어림없어요...... 그런 마음으로 사시니 복이 머무는 거고요.”

    방울 할머니가 따뜻한 미소를 지으셨다.    

    이후로 나도 용서라는 단어를 잘 쓰지 않았다. 그 단어가 아주 무겁고 슬픈 단어라는 걸 할머니의 눈물로 실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죄를 짓는다는 것은 수학 기호로 표현하지면 플러스가 아니라 마이너스이다. 죄는 짓는 것이 아니라 짓는 것을 당하는 것이다. 행함이 아니라 행함의 마이너스,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소외되는지를 보여주는 기표 말이다. 죄는 절대 거스를 수 없다. 마이너스의 영역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죄의 영역에서 빠져나와 망각과 화해라는 원점을 지나 다시 플러스의 영역으로 올라온다는 것이다. 상대가 용서를 해주는 게 아니라 죄지은 자신이 스스로 죄 아닌 영역으로 올라오는 것 말이다. 그런 인간을 우리는 용기 있고 아름답다고 말한다.

   수영 할머니 때문에 어머니를 잃은 나의 외조모가 왜 수영 할머니와 따뜻한 왕래를 하며 사셨는지를 생각하면 이곳이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수영 할머니는 스스로를 용서하려고 성림에게 오는 것이고 성림은 가엾은 수영 할머니를 동등한 인간으로 존중해 주신 것이다. 여기는 천상에서 쫓겨난 좋은 영혼들이 자신의 본질을 잊지 않고 꽃 같은 품성을 풍길 수 있는 여백의 터가 분명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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