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블레이크
윌리엄 블레이크
눈에 모래바람이 불어와 아팠다. 윌리엄 블레이크에게 이것은 황홀경의 현현이다.
바람을 향해 모래를 던지면
그 바람은 다시 되돌아 불어온다.
모든 모래는 한 점의 보석이 되어
빛줄기 속에서 신성으로 빛난다
블레이크처럼 예지를 타고난 이에게, 신성은 모든 일상적인 사물에 드러난다. 우리는 그것을 거부하려 안간힘을 쓰지만, 그것은 언제나 우리의 얼굴 앞에 날리는 모래바람처럼 떠오른다. 블레이크의 유명한 경구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인식의 문이 맑아지면 삼라만상이 인간 앞에
무한한 참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블레이크의 인식의 문은 일찌감치 활짝 열렸다. 그는 18세기 중반 런던의 소호 지역에서 자랐다. 네 살 때 창문에 이마를 기대고 있는 신을 보았고, 그가 소리를 지르자 신은 사라졌다고 했다. 여덟 살 무렵엔 더욱 인식이 확장되어 집 안에서도 빛나는 천사로 가득 찬 나무의 광경을 즐길 수 있었다. 나중에 그는 형 로버트가 죽는 광경을 지켜보고, 로버트의 영혼이 환희에 차서 지붕을 통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러니 동시대 사람들이 그를 미치광이로 보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가 도처에서 법을 구하는 다르마(Dharma) 행려들의 등불이 되는 데는 백 년 이상이 걸렸다.
보는 관점에 따라 블레이크가 환각이나 영적 환상을 일으키는 에르고 중독증을 앓았다는 설도 있다. 중세 이래로 농부들 사이에서 성 안토니의 불로 알려진 그 병은 보라색 에르고 버섯균에 감염된 호밀빵을 먹어서 발생하는데, 20세기에는, 환각제로 정제해 사용하기도 했다.(‘더 도어스’라는 밴드 이름도 위의 블레이크 구절에서 따왔고, 올더스 헉슬리가 메스칼린 복용 후 환각 여행경험을 설명한 ‘지각의 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블레이크의 고도의 깨달음은 특별한 향정신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것이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것은 모래알처럼 명백하다.
모래알에서 세상을 보고
들꽃에서 천국을 보며
손바닥 안에 무한을 거머쥐고
한 시간 동안 영원을 느낀다
위에 있는 시의 의미는 깊지만 단순하다. 마치 바다라는 것이 모든 파도 속에 현전 하듯, 모든 시간의 순간엔 영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히피의 영적 환상이 아니라 확실한 가설이고, 블레이크는 우리에게 그것을 확인하라고 부추긴다. 당신은 꼭 보아야만 한다. 손바닥 위에 모래알, 들꽃, 구겨진 껌종이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이라도 올려놓고서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냥 손만 바라보아도 좋다.(블레이크에게는 적어도 한 명의 제자, 아내 캐서린이 있었으며, 그녀는 그가 하는 대로 보고 배웠다.)
한 시간과 영원중 어떤 것이 먼저인지 보고 계속 찾아보라. 영원은 수 억겁의 끝에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이 녹아 없어지는 어떤 한순간 그것을 알아차릴 때 온다. 당신이 헤드폰을 끼고 정신없이 춤을 출 때, 혹은 잡초를 뽑을 때, 점프 샷을 연습할 때, 아니면 별을 응시하다가 시간이 증발한 바로 그 순간 당신 앞에 펼쳐진다. 현재가 충만하여 과거나 미래가 기쁘게 녹아 없어질 때, 돈을 잘 벌어 휴가를 떠나 즐거움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그런 때 일어난다.
이 영원 속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무한함을 드러낸다. 당신과 연인이(혹은 당신과 고양이가) 서로의 눈 속에서 안온하게 녹아 시간의 초월과 무중력을 느끼며 “나”와 “너”의 경계가 흐려지면, 바로 그것이 시간과 공간의 메트릭스로부터 놓여나는 한 줄기 섬광이다.
그 무한함이야말로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모두가 찾고 있던 그것이다. 그것을 찾지 못하면, 어떤 위로나 보상, 가치 있는 업적, 맛있는 음식, 그런 것들에 만족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때는 희미한 불만족이 끈질기게 지속되다가, 어느 순간 깊은 갈망이 밑바닥으로부터 쑥 올라온다.
아 해바라기! 시간에 지쳐
태양의 발걸음을 세고 있누나
여행자의 여정이 끝나는
그 달콤한 황금빛 나라(환경)를 찾아서
젊음이 욕망으로 가물거리는 그곳
눈밭에 묻혔던 창백한 처녀가
무덤에서 일어나 열망하는 곳
그곳이 바로 나의 해바라기가
향하는 곳이지
헬리엔터스 아누스(Helianthus annuus)라고 불리는 해바라기는 두 가지 이유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 첫째로 태양을 닮았고, 둘째로 하늘을 가로지르며 움직이는 태양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그 꽃은 “태양의 발걸음을 쫓아” 근면한 시계처럼 종종거리며 “시간에 지칠” 때까지 시간과 날을 헤아린다. 우리 모두도 시간에 지치지 않는가? “달콤한 황금빛 나라/여행자들의 여정이 끝나는 정점”을 조용히 꿈꾸지 않는가? 그곳은 희망과 두려움, 판에 박힌 일상과 책임에 지쳐가는 우리가 마침내 해방되는 곳이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을 때까지 우리는 모두 아등바등 시간을 치러내고 있다.
블레이크에게 ‘청춘’ 혹은 ‘창백한 처녀’로 표현되는 몇몇 사람에게, 갈망은 세상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지금, 셀 수 없이 아름다운 영혼들이 자신의 체형이나 특이한 성격 때문에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확신하며 방 안에서 홀로 울고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온순한 영혼들이 자신을 혼란스럽게 했던 폭력적 상황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건만, 홀로 갇혀서 고뇌에 차 있다. 그러나 영혼들을 위한 깊은 열망은 반드시 충족될 수 있다. 달콤한 황금빛 나라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으니까.
어디에 있냐고? 바로 당신의 손바닥 안에. 그보다도 더 가까이. 힌트는 이름에 있다. “해바라기(Sunflower)”에는 “태양(Sun)”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무한을 추구하는 자들이며, 우리의 본질에는 무한이 포함되어 있다. 본질을 깨달을 때, 우리는 절망의 무덤에서 일어나 "나의 해바라기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나아간다. 바로 여기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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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은 때때로 신이라고 불린다. 모든 곳에서 신을 보는 사람들은 그것이 특정한 사원이나 책에 갇힐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원과 책의 소유자들은 예컨대 블레이크 같은 비전가들(visionaries)이 자신들의 독점을 위협한다고 두려워한다(그렇다). 비전을 자유롭게 탐구하는 이들이 그들의 영역을 침범할 거라고 느끼는 것이다. 과거에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이들을 이단으로 처벌하거나 성인으로 선언하여 평범한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블레이크의 시대는 그 비전을 병리화(pathologize)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아, 블레이크요? 그 사람은 미쳤어요’. 이렇게 하면 문제는 해결되었다.
좋다. 블레이크는 교회가 그를 쓸모없다고 여겼듯 그도 교회를 쓸모없게 여겼다. 그의 관점에서, 교회의 목사들은 무한을 오래된 소문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들은 삶의 기쁨을 맛보기엔 너무 눈이 멀었거나 억눌려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공격함으로써 좌절을 표출했다.
"애벌레가 가장 아름다운 잎을 골라 알을 낳듯이,
사제는 가장 아름다운 기쁨에 저주를 내린다."
가장 아름다운 기쁨은 영적이며 육체적인 것으로, 두 가지는 분리될 수 없다. 몸은 블레이크의 판화 "앨비언 로즈"에서처럼 신성한 에너지의 표현이다. 앨비언은 우주적 원형 인간으로, 영적이고 육체적인 나체의 영광을 만끽하고 있다. 이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리는 아담과는 다르다. 빛은 정숙한 기독교 성인들의 후광처럼 앨비언의 머리에서만 빛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온몸에서 빛나고 있다. 그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넘어선 360도 풀어진 기쁨의 화신이다.
이것은 블레이크가 자신의 삶에서 지향한 이상이었다. 그는 아마도 앨비언의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앨비언 로즈(이 장의 시작 부분에 있는 그의 자화상과 비교해 보라. 그리고 그 깊은 눈을 깊이 들여다보라). 한 번은 이웃이자 정부 서기인 토마스 버츠가 찾아갔을 때, 블레이크와 그의 아내가 에덴의 야생 정원 같은 곳에서 벌거벗고 "실낙원"을 읽으며 즐거움을 누리는 모습을 보았다. 시인의 삶이 그의 시와 일치하는 모습에 감명받은 버츠는 그의 몇 안 되는 후원자 중 한 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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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크가 1789년에 쓴 책 『순수의 노래』는 우리를 에덴으로 안내한다. 그곳은 육체와 영혼, 인간과 자연, 그림과 단어가 하나의 유기적 전체로 함께 어우러진 장소이다. 이 책은 순수한 아이의 자발적이고 무의식적인 노래로 표현되어 있으나 책을 만드는 과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세심하게 수작업을 한 듯 보인다. 블레이크는 이 책을 그의 죽은 형이 비전으로 계시해 준 새로운 방법인 "조명 인쇄(Illuminated Printing)"를 사용하여 제작했다고 말했다.
각 페이지는 이미지와 서체를 통합한 디자인으로 꾸며졌는데, 블레이크는 붓과 깃펜을 사용하여 이를 구리판에 거꾸로 그렸다. 그는 바니시를 적신 펜으로 그림을 그리고, 바니시가 칠해지지 않은 부분은 질산으로 부식시켜 음각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아내의 도움을 받아 구리판으로 찍어낸 각 각의 페이지에 일일이 수채화로 채색을 했다. (영적 아웃사이더나 소외된 예술가에게는 인내심을 갖고 지지해 주는 배우자가 드물지만, 블레이크는 캐서린 블레이크라는 아내 덕분에 행운을 누렸다). 이 책들은 약 3x4.5인치 크기의 작은 책들이었고, 블레이크는 이를 한 권씩 판매했다. 나는 현존하는 몇몇 복사본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것들은 마치 다른 행성에서 온 작은 보석들 같았다.
『순수의 노래』의 본질은 "어린양"에서 잘 전달된다. 이 텍스트 윗부분은 얽힌 채 서로를 감싸고 있는 두 그루 나무로 테두리 지어져, 마치 나선형 덩굴손이 자라나는 것처럼 보인다. 텍스트 아래에는 작은 언덕과 시골 오두막이 있고, 한 아이가 풀을 뜯는 양 떼 옆에 서서 어린양에게 말을 걸고 있다. 어린양은 달콤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아이는 앨비언이나 양들처럼 순수하게 벌거벗은 상태이다.
작은 양아, 너를 만든 이는 누구니
너는 만든 이를 아니
너에게 생명을 주고 먹을 것을 준 이를.
시냇가와 초원에서;
너에게 기쁨의 옷을 주시고,
부드러운 옷, 양털처럼 밝고;
너에게 그토록 부드러운 목소리를 주신 이를,
모든 계곡이 기뻐하도록;
작은 양아, 너를 만든 이는 누구니
너는 너를 만든 이를 아니.
이 시는 정말 달콤하게 들린다. 블레이크는 일부러 18세기 어린이 시의 달콤한 스타일을 모방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깊은 목적이 있다: 어린양으로부터 신에게로 확장하는 것이다. 어린양이 우주의 유한한 존재로서 어떤 특별한 성정을 지녔다면—“부드러움,” “밝음,” “기쁨”—어린양을 만든 신, 존재의 바다에서 생겨난 파도는 무한한 부드러움, 무한한 밝음, 무한한 기쁨이어야 한다.
시의 후반부는 첫 번째 부분에서 제기된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이 점을 명확히 한다.
작은 양아, 내가 너에게 말해 줄게,
작은 양아, 내가 너에게 말해 줄게;
그는 너의 이름으로 불린단다,
그는 스스로를 어린 양이라 부르지;
그는 온순하고 부드러우며,
그는 작은 아이가 되었지:
나도 아이고 너도 어린 양이야.
우리는 그의 이름으로 불리지.
작은 양아, 신의 축복이 있기를.
작은 양아, 신의 축복이 있기를.
기독교 전통에서 그리스도는 당연히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신이 인간으로, 무한이 유한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는 또한 사랑하는 선한 목자로서 우리를 돌보는 양치기이다. (다른 전통에도 유사한 개념이 있다. 예를 들어, 고빈다(Govinda)라는 "소들의 보호자"는 젊은 소치기 소년으로서의 크리슈나의 이름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또한 "작은 아이가 되었다"는 점에서 시의 화자 "나"와 동일시된다. 아브라카다브라(Abracadabra) - 몇 줄의 간단한 시를 통해 블레이크는 "그" (그리스도), "나" (화자와 독자), 그리고 "너" (어린양)를 통합한다. 신성, 인간성, 그리고 자연이 이제 하나의 큰, 행복한 혼합체가 된다.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 성찬식이다: 단지 포도주와 성체를 취하여 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본래 신과 하나이며, 그 신의 현현인 자연 세계와도 하나임을 발견하는 것이다. 성직자는 필요치 않다. 우리가 겉으로 소외된 것은 단지 일시적인 혼란일 뿐이며, 이제 우리는 "온순하고 부드러운" - 순수하고 꾸밈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심오한 마술을 통해 이를 해결했다.
이 목표 없는 단순한 존재는 때때로 명상이라고 불리며, 이 단어는 신과 같은 다양한 연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것들을 잠시 옆으로 밀쳐두어라. 명상도 신도 모든 단순함을 넘어선 단순한 것이다. 둘 다 그저 존재하는 것이다. 시도하는 것은 역효과를 낳는다. 양들과 교감하려면, 온순하고 부드러운... 양처럼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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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린양들과 교감하는 것은 존재의 어두운 면을 간과하는 너무 순진하고 조야한 접근이 아닐까 하고 블레이크는 생각한다. 『순수의 노래』를 출판한 지 5년 뒤에 확장판인 『순수와 경험의 노래』를 제작했다. 무한한 것이 진정으로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을 넘어 에덴의 문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는 어려운 문제들에 직면해야 했다. 많은 경험의 노래들은 특정 순수의 노래에 대한 답이다. "어린양"에 대한 답은 "호랑이"로, 황량한 나무줄기 아래에 그려져 있고, 시의 연은 잎이 없는 죽은 가지들로 구획되어 있다.
호랭아 호랭아, 밝게 타오르는구나
밤의 숲 속에서;
어떤 불멸의 손이나 눈이
너의 무시무시한 당당함을 구현해 냈을까?
이 시는 시작부터 명확한 도전이다: 이번에는 온순한 어린양이 아니라 어린양을 잡아먹는 포식자에서 신을 추론해야 한다. 어떤 신성한 손이 호랑이를 인간이 집 짓듯 "구조"할 수 있을까? 어떤 신성한 눈이 호랑이의 격렬함을 보편적 조화의 일부, 웅장한 당당함으로 볼 수 있는 거시적 시각의 틀을 가질 수 있을까?
호랑이는 자신의 불타는 빛으로 "밝게 타오르고"있다. 논리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지만, 심리적으로는 완벽하게 이해가 된다. "밤의 숲"은 단순히 어두운 정글이 아니라 삶과 어둠의 심장부이다. 그곳에서 호랑이는 순수한 동물적 욕망으로 불타며, 길을 가로막는 약한 존재들을 죽이고 잡아먹기 위해 몰아붙이고, 그들의 생명이나 비명을 완전히 무시한 채 피의 갈증을 해소한다. 어쩌면 한밤중에 여우나 코요테에게 잡아먹히는 토끼나 고양이의 비명을 들어본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포식자들은 그것을 완벽히 받아들인다. 우리 세계의 많은 폭력은 그저 일상일 뿐이다. 때로는 우리가 코요테고 때로는 토끼이기도 하다.
영화 "죠스"에서 쿵쾅거리는 상어 등장 테마처럼 ("빠-둠... 빠-둠"), 호랑이의 불타는 빛은 결국 우리의 피를 노리고 다가오는 모든 무서운 것들을 상징한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우리의 불타는 피에 대한 욕망과 모든 다른 욕망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러한 욕망은 이기적인 만족을 가져다줄 수 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먹기 전에 마지막 케이크 조각을 먼저 채간다. 일부 사람들은 보험금을 타기 위해 배우자를 살해하고 더 젊고 매력적인 파트너와 도망친다. 이것이 바로 "밤의 숲"이다.
"어린양"에서 사용된 논리와 마찬가지로, 호랑이의 “무시무시한 당당함”-턱과 발톱, 다리의 스프링 파워, 맹렬한 살인 기기의 모든 날렵한 효율성-은 무한한 격렬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이해 불가해서 우리는 그 원천을 찾을 수도 없다.
어떤 먼 심연이나 하늘에서 그대의 눈은 불타올랐는가? 어떤 날개로 대담하게 날아올랐나?
어떤 손이 감히 불을 부여잡으려 하는가?
이 상상할 수 없는 힘을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다음 두 연은 호랑이를 용광로에서 단련하고 창조의 모루 위에 그 형상을 두드려 만든 강력한 대장장이로서의 신이 그려져 있다.
어떤 어깨와 어떤 기교가
그대의 마음 힘줄을 비틀 수 있을까?
그리고 그대의 심장이 뛰기 시작할 때,
어떤 두려운 손? & 어떤 두려운 발이?
어떤 망치? 어떤 사슬,
어떤 용광로에서 호랑이의 뇌가 만들어졌나?
어떤 모루? 어떤 무시무시한 손이
그 치명적인 공포를 감히 부여잡았는가?
밤의 숲은 이미 양의 밝은 초원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다음 연에서 감정이 고조됨에 따라, 그것은 번개와 비가 별의 창과 눈물이 되는 폭풍의 세계로 변한다. 우리의 세상에 양뿐만 아니라 호랑이가 있어야 한다는 깨달음이 전체 우주를 전쟁과 슬픔으로 몰아넣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폭풍우가 몰아치는 하늘로 시인은 큰 질문을 던진다.
별들이 그들의 창을 내던지고
눈물로 하늘을 적시고 있는 때,
그는 자신의 작품을 보며 미소 지었는가?
양을 만든 그가 너도 만들었을까?
바로 그것이다: 단맛과 빛의 할렐루야 신에게 도전하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 그리고 여전히 내 영어 교사 존 프리시우스의 목소리가 말하던 그 끔찍한 질문이다. 그는 19세에 전쟁의 피바다를 헤쳐 나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역겨운 표정으로 책을 움켜쥐고, 놀란 10학년 학생들 앞에서 말을 길게 늘여 쓰며 표현할 수 없는 공포를 응시했다. “신은 자신의 작품을 보며 미소 지었을까?”라고 말이다.
휴. 거기서 어디로 가야 할까? 처음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마지막 연은 첫 번째 연과 거의 동일하다. 단지 한 단어만 다른데, 중요한 단어이다.
호랭아 호랭아, 타오르는 밝은 불빛
밤의 숲 속 한 가운에서:
어떤 불멸의 손이나 눈이
감히 네 무시무시한 당당함을 만들 수 있는가?
“감히(dare)”라는 단어에는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다: 신이시여, 어찌 감히, 신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 우주 안, 존재들에게 고통을 가하고 견디도록 우주를 창조하고, 그 후에는 그들이 당신에게 경배하도록 기대하다니? 당신은 어디서 그런 용기를 얻었나요? 망할 하나님.
아니면, 이것은 너무 쉽고, 뻔뻔한 반응일까? 시가 최종적이고 파괴적인 “감히(dare)”에 에너지를 집중할 때, 사실은, 프리시우스 선생님이 가정한 것처럼, 잔인하게 창조물을 배신한 창조주와 충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것은 우리의 선과 악, 검정과 흰색, 그리고 창조주와 창조물이라는 이원적 개념의 한계와 충돌하고 있는 것일까? 블레이크는 무한한 모순을 포용하는 광대한 무한의 대담함에 놀라고 있는 것일까? 그는 결코 순수의 노래를 부정하지 않았고, 자신의 경험에 의한 노래가 그 노래를 대체한다고 선언하지도 않았다. 그는 후에 『천국과 지옥의 결혼』이라는 책을 썼다. 하나님의 현실은 모든 모순된 인간 현실을 포함하고 초월해야 한다. 무한은 틀이 없으므로, 모든 유한한 틀이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어린양을 만든 자가 너도 만들었느냐?"라는 질문은 실망한 기독교인의 불평에서 공안(koan)으로 격상된다. 부모가 태어나기 전에 당신의 얼굴은 어땠습니까?" 같은 마음을 찌르는 역설적 화두와 같다. 그러나 그것은 선(禅)의 화두들보다 덜 추상적이고 더 열정적으로 느껴진다. 왜 하나님은 아름다운 녹색 세상을 만드셨으면서도 그 안에 암을 포함시켜야 했을까? 왜 자연은 우리에게 무지개와 돌고래를 주고, 그와 동시에 어린양을 잡아먹는 호랑이 같은 괴물도 던져줄까?
대답의 일부는 그것이 모두 상대적이라는 점에 있다. 많은 색맹 동물에게 무지개는 아무 특별할 것이 없다. 물고기에게 돌고래는 물고기를 잡아먹는 괴물이다. 젖을 먹고 있는 호랑이 새끼에게 호랑이는 엄마다. 우리가 어린양과 호랑이의 역설을 이해하기 어렵다면, 이는 삶과 죽음이 비록 두렵지만, 그것을 큰 그림의 장엄한 대칭으로 보는 '하느님의 시각'으로 관점을 넓히라는 초대장이다.
한 번은 내 아내가 집에 돌아와 보니 까마귀가 부엌 창문 밖에 둥지를 튼 갓 부화한 새끼비둘기들을 먹어 치워, 부모 새가 나무 주위를 배회하며 공포에 크게 울부짖고 있었다. 몇 주 동안 그녀는 눈에 띄는 모든 까마귀를 죽이고 싶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뒷길에서 그녀는 날개가 부러져 끔찍하게 망가진 까마귀를 발견했다. 까마귀는 필사적으로 날아가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녀는 그저 서서 그 고통을 목격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이해했어요, " 그녀는 말했다. "까마귀도, 다른 존재도. 그리고 모든 사람도. 그저 살아남기 위해 애쓰고 있었던 거죠, 고통받는 다음 타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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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크는 골칫덩이였다. 영적으로 깨쳤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깨어 있어, 전쟁, 노예제, 성 불평등을 비난하며 시대보다 앞서갔다. 그는 위험한 급진주의자 토마스 페인과 친구였기에, 프랑스혁명을 지지한다는 표시로 런던 거리에서 자유 모자를 쓰고 다녔다. 이는 분쟁을 자초하는 행동이었다. 실제로 그는 영국 군인과 큰 싸움을 한판 벌이고 반역 혐의로 법정에 서기도 했다. 또 한 번은 뉴 게이트 감옥을 습격한 시위대에 합류해 감옥을 불태우고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그는 "과잉의 길이 지혜의 궁전으로 이어진다"라는 글을 썼다.
개략적으로 볼 때, 그는 실패자였다. 생애 동안 『순수와 경험의 노래』몇 십 부를 겨우 팔았을 뿐이다. 그의 후속 작품들, 복잡하고 난해한 신화적 체계를 담고 있는 책들은 지금도 여전히 잘 읽히지 않는다. (하지만 그 작품들은 자신에게 영감을 준 천사들이 열렬히 즐겼다고 그는 말했다.) 사업적으로는 여러 번 배신당하거나 사기를 당했다. 대다수 작품은 그의 사후 열성적인 기독교인에 의해 불태워졌다. 그는 일차적으로 예술가였고 부수적으로 시인이었으며, 몇 달간 전시회를 준비해도 단 한 점의 그림도 팔리지 않는 화가였다.
블레이크는 다른 사람의 책을 삽화로 장식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죽던 날에도 단테의 『신곡』을 완성하려고 수채화를 그리며 일하고 있었다. 그와의 결혼 생활은 영감을 주었을지는 몰라도 지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 캐서린은 빈곤과 조롱에도 아랑곳없이 그에게 늘 충실했다. 그녀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곁에 붙어 있는 친구들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천국에 있었어요.”라고 말이다. 임종 때는 단테에 관한 작업을 내려놓고 마지막으로 캐서린의 모습을 그렸다. 그는 "그대는 내게 늘 천사였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블레이크는 자신의 시와 격언들이 미래 세계의 영적 탐구자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의 작품들을 온라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티셔츠나 커피 머그컵에 인용되거나 잘못 인용된 형태로도 접할 수 있다. 그는 결코 꿈꾸지 못했을 것이다(혹은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시 "예루살렘(Jerusalem)"이 영국 성공회의 찬송가가 되고, 영국의 비공식 국가(國歌)가 되어, 공식 국가(God Save the Queen) 보다 더 인기를 끌게 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 시는 왕실 결혼식에 깃발을 휘날리며, 맥주를 들이켜고, 얼굴에 페인트를 칠한 축구팬들에게 불려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교회를 혐오하고 신성모독을 일삼았던 괴짜 급진적 나체주의자 미치광이 예술가의 시구절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더 이상한 것은, 이 시가 어린 예수가 "잃어버린 세월" 동안 영국을 방문하여 지상에 천국의 씨앗을 심었다는 괴짜 같은 전설에 기반한다는 점이다.
그 발로 고대 영국의 푸른 산을 거닐었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어린양을,
영국의 즐거운 목초지에서 볼 수 있었다니!
그러나 이 시는 세 번째 연에서 보편적으로 저항할 수 없게 된다. 이 부분은 모든 인간의 갈망을 담고 있으며, 이를 성취하기 위한 결연한 의지를 천둥 치듯 표현되어 있다.
불타는 황금 활을 내게 가져다주오:
욕망의 화살을 내게 가져다주오:
내게 창을 가져다주오: 오, 구름이여 펼쳐지라! 불타는 전차를 내게 가져다주오!
"예루살렘"의 마지막 절은 강력한 서약으로 끝난다: “우리가 예루살렘을 건립할 때까지, 영국의 푸르고 아름다운 땅에.” 블레이크는 진정한 예루살렘이란 멀리 존재할 성스러운 도시가 아니라, 우리가 직접 지어야 할 무언가로 보고 있다. 이 "푸르고 아름다운 땅"은 우리의 뒷마당, 즉 우리의 즉각적인 주변을 의미한다. 우리는 종종 갈망하는 궁극적인 무언가가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구루의 아쉬람에 있거나, 엄숙한 로브나 샌들을 신은 과거, 휴거나 물병자리 시대 이후의 유토피아적 미래에 있다고 생각한다.
천국을 내면에서 찾고, 일상의 벽돌로 그것을 건설하는 것, 신성한 것을 찾아 그것을 평범한 것에 통합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이는 전사의 정신을 필요로 한다. 무지와 고통의 구름을 걷어내기 전에, 활과 화살, 창과 전차를 불러와야 한다. "하지만 나는 너무 바빠." 정말로? 잠시 고요히 정좌해 보라. 아마도 우리의 조부모는 파시즘을 물리치기 위해 해변에서 피를 흘렸거나 인종 차별에 대항하며 거리에서 매를 맞았을 것이다. 당신은 단지 20분 동안 휴대폰을 내려놓고, 쿠션이나 의자에 앉아 존재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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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크의 죽음 이후, 그의 노트에 연필로 휘갈겨 쓴 작은 미발표 시 『영원(Eternity)』이 발견되었다. 이 네 줄의 시는 영국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던 부처님의 모든 법문이 깔끔하게 요약되어 있다. 블레이크는 자신의 명확한 통찰을 통해 다르마를 발견한 것이다.
출발점은 인간의 삶이 불행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첫 번째 고귀한 진리, 즉 고성제이다: 지친 해바라기들처럼 모든 것들이 그렇다. 다음 단계는 그 불행의 원인을 조사하는 것이다.
즐거움에 자신을 묶어두는 자는
삶을 파괴로 이끄는 날갯짓에 맡긴 것이라네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대상, 우리 삶에 들어오는 기쁨들은 섬세한 날개를 가진 존재들이다. 아마도 날아다니는 나비나 반짝이는 천사들일 것이다. 당연히 우리의 충동은 그것들을 영원히 붙잡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붙잡으려는 행위 자체는, 아이가 나비를 으깨고, 열정적인 연인이 천사를 질식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고귀한 진리이다: 고의 원인은 바로 집착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를 '탐욕'(tanha)이라고 불렀다. 문자 그대로는 '갈증'을 의미한다. 종종 '욕망'으로 번역되지만, '갈망'이나 '열망'이 더 나은 의미일 것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욕심 많은 사람들을 '갈증을 내는 사람들'이라고 부르며, 그들에 대해 어떤 무지하고 자기 파괴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인간적인 기쁨을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의 욕망을 억압해야 할까? 승려가 되어야 할까? 비록 부처님 자신이 승려였지만, 그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권장하지 않았다. 그의 세 번째 고귀한 진리, 즉 고의 소멸의 진리는 더 미묘하고 더 능숙한 해결책을 가리킨다. 기쁨을 밀어내지 마라. 사실, 그것들을 사랑하라 - 하지만 집착하지 마라. 블레이크는 시의 후반부에서 동일한 지혜를 전달하며, 언제나처럼 그것을 간단하고 우아하며 빛나게 표현한다.
하지만 기쁨이 날아갈 때
그것에 입맞춤하는 자는
영원의 일출 속에 살게 된다.
모든 것을 사랑하되, 그것이 모두 사라질 것임을 받아들이면서 사랑하라. 그것이 매 순간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사랑하라. 이 글을 읽는 동안,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셔츠는 먼지로 변해가고 있다. 당신이 고등학교 시절에 동경했던 멋진 남자나 여자들은 체중이 늘어가고 있다. 당신의 사랑스러운 새끼 고양이들은 … 고양이로 성장해가고 있다. 아, 그리고 당신이 아는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다. 하지만 영원성에 관한 꿈이 산산이 부서지는 첫 충격만 극복하고 나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해방의 경지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완전히 깨달음은 수행이 필요하다. 그것이 네 번째 고귀한 진리, 즉 길의 진리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가상의 미래, 먼 예루살렘에서 깨달음이 도달할 때까지 기쁨을 미루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길을 걸어가면서도 지금 이 순간, 오직 이 순간, 현재의 맥박 같은 영원 속에서 모든 형태의 기쁨에 입맞춤하라. 사라진 과거와 상상된 미래에 대한 희망과 두려움의 집착을 놓아버려라. 그렇게 하면 우리는 답답하고 낡은 것을 벗어버리고, 신선한 바람과 차가운 영원의 빛 속에서 진정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