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법을 전한 서양문학
스콧 피츠제럴드 • 위대한 개츠비
『위대한 개츠비』의 모든 논의를 세 단어로 일축하고자 하는 준칙이 있다면 그것은 위대한 미국 소설이라는 세 어절일 것이다. 만약 우리가 말하려는 것이 ‘미국 정신의 천재성과 광기’, 그리고 미국 생활에서 그 정신과 광기가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신선하고 설득력 있게 담아낸 큰 이야기를 의미한다면 말이다. 바로 ‘개츠비’가 그런 소설이고 이와 같은 선상에 영원히 함께 존재할 다른 두 작품에는 『허클베리 핀』과 『모비딕』이 있다.
F. 스콧 - 다시 말해, 프랜시스 스콧 키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Key Fitzgerald)는 이런 일에 적합한 유전자를 가진 셈이다. 그의 증조부는 "별이 빛나는 깃발"을 썼다. 그가 이 책에 대한 최종 제목을 “빨강, 하양, 파랑 아래서”라고 정했을 때 다행스럽게도 출판사는 제목을 그렇게 변경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의 포효하던 이십 대의 저작들은 미국인들의 제멋대로인 꿈과 그들의 머리 위로 ‘쾅’하고 모루가 떨어지는 듯한 거친 각성을 눈부시게 묘사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는 미국적인 것을 넘어서서,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마치 인간의 표준적인 대본에 여분의 느낌표 한 줌을 흩뿌린 것 같다. 우리는 그저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을 더 우렁차게 외칠뿐이다.
인간은 갈망한다. 개츠비의 위대함은 그의 위대한 갈망에 있다. 우리는 서술하는 이야기꾼 닉 캐러웨이의 눈을 통해 그의 첫 등장에서부터 그것을 볼 수 있다:
달빛을 가로지르는 고양이의 실루엣이 흔들렸는데, 그것을 보려고 고개를 돌렸을 때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50피트 떨어진 이웃 저택에서 사람의 형상이 그늘로부터 나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은빛 별꼬리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바로 개츠비였고, 그는 마을의 하늘 한 귀퉁이를 탐색하는 듯 보였다
.... 나는 그를 불러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홀로 있는 것에 푹 빠졌다는 암시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어두운 수면을 향해 이상한 방식으로 손을 뻗었을 때, 비록 멀리 떨어져 있긴 했지만 떨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바다 쪽을 흘끗 쳐다보니, 아주 먼 부두의 끝자락에 초록 불빛 하나가 도드라져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개츠비를 향해 다시 몸을 돌렸으나 그는 이미 사라져 없고, 나만 다시 불안한 어둠 속에 홀로 남겨졌다.
드라마틱한 등장과 마법 같은 퇴장, 잊을 수 없는 동경의 이미지를 소설 1장의 끄트머리보다 더 잘 묘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개츠비가 갈망한 대상은 그에 관한 것이 대부분 그렇듯 처음에는 미스터리였다. 가난한 사람의 동경인 미국 롱 아일랜드의 값나가는 북쪽 해안에 “한쪽에는 프랑스 성을 본뜬 타워가 있고... 다른 쪽엔 대리석 수영장과 40 에이커가 넘는 잔디밭과 정원”을 갖춘 거대한 집에서 개츠비는 부자로 살고 있다. 수상비행기와 “부풀어 오른... 괴물 같은... 여러 개의 태양을 반사하는 미로 같은 앞 유리가 달린” 자동차를 소유하고서 말이다. 그는 자신이 옥스퍼드에서 보낸 시절을 뻐기며, 사람들을 “구식 친구”라고 불렀고; ‘정교하게 격식을 차린 말투’는 가끔 우스꽝스럽게 흐지부지되었다. 개츠비는 호화로운 파티를 주최하지만, 정작 자신은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고위층과 하층 사람들이 모두 몰려와 밀주를 과음하고, 새로 등장한 재즈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개츠비에 대한 소문을 나누곤 했다
하지만 그는 럼주 밀매, 수상한 주식 거래에 연루된 갱스터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닉이 개츠비의 멘토인 “1919년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끈 인물”인 마이어 볼프스 하임(블랙삭스 스캔들의 지도자로 유명한 아널드 로더 스테인을 모델로 삼은 인물)을 만나면서 개츠비의 정체가 드러난 것이다. 볼프스 하임은 사람의 어금니로 만든 커프스단추를 달고 있으며 다른 이들은 그가 누구에게서 어떻게 그것을 떼어냈는지 알 길이 없다. 물론 ‘총’을 뜻하는 속어인 “개츠비”는 갱스터의 폭력과 옥스퍼드의 허세를 교묘하게 뒤섞어 놓은 영화이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에서도 개츠비에게는 독자의 마음을 그에게서 걷어 들일 수 없게 만드는 진정성, 순진무구한 순수함 같은 것이 있다.
개츠비가 갈망하는 것은 잃어버린 사랑, 닉의 사촌 데이지이다. 닉은 최근 고향 중서부에서 “채권 사업을 배우기 위해” 상경하여, 신흥 부촌인 웨스트 에그에 있는 호화로운 개츠비의 저택 옆에 소박한 방갈로를 빌려 살고 있다. 데이지는 롱아일랜드 사운드 건너편에 있는 구시가지 이스트 에그에 살고 있다. 그녀는 사랑스럽지만 촐랑거리고, 우아한 옷차림을 하고 농담 섞인 잡담으로 아무한테나 한잔 더 하자고 추근댄다. 로맨틱한 집착이 늘 그렇듯, 집착하는 사람의 눈에 그녀는 매우 매력적으로 비친다.
데이지의 남편 톰 뷰캐넌은 굳이 섬세하게 표현하자면 양아치이다. 그는 덩치가 크고, 부유하고, 오만하고, 위선적이고, 인종차별주의자이며,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멍청한 개자식으로, 평생 폴로를 치고, 데이지를 속이고, 자신처럼 부자로 태어나지 못한 사람을 깔보는 데 시간을 보낸다. 데이지조차 그를 ‘짐승 같은 놈’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영화에서 뷰캐넌을 처음 보았을 때, 그는 닉을 자기 집에 초대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여기에 좋은 집을 가지고 있어.” 그의 삶에서 전성기는 예일대에서 풋볼을 하던 시절로, 풋볼은 그가 사람들을 아무렇게나 대하도록 가르쳐준 스포츠였다. 한 번은 내연녀가 그에게 건방지게 굴자 그는 그녀의 코뼈를 부러뜨려 버렸다.
개츠비는 5년 전 루이빌 육군 기지에 주둔했을 무렵 데이지와 잠깐 관계를 맺었으나, 그들의 만남은 개츠비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끝을 맺었다. 데이지는 폭풍우처럼 울고 불며 술에 빠져 괴로워했지만 결국 톰 뷰캐넌과 결혼했다. 개츠비-사실, 남부 다코타 어딘가의 빈민가 출신의 가난한 소년인 지미 개츠-는 군대에서 전역한 후 부자가 되는 빠른 길을 찾아 어여쁜 공주를 용의 굴에서 구출하는 기사처럼 데이지를 되찾으려고 했다. 웨스트 에그의 집과 화려한 파티는 모두 이 계획의 일부였다. 어쨌건 그는 어두운 물 건너편 데이지를 갈망하며, 자신의 팔을 그녀가 사는 부두 끝의 초록 불빛 쪽으로 뻗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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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색은 멈춤을 의미한다. 동굴 생활을 하던 선조들이 알고 있듯이 그것은 피, 위험이다. 노란색은 불이다. 동굴 입구에서 불을 피워 음식을 요리하는 것일 수도 있고, 숲에서 불이 난 것일 수도 있으니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초록을 보는 것은 안심이다. 초록색은 숲, 과수원, 그늘과 신선한 물이 있는 오아시스이다. 초록은 안전과 풍요, 무성한 생명의 번영을 의미한다. 데이지의 부두 끝에서 빛나는 초록 불빛은 개츠비에게 이런 풍요를 떠올리는 표징이고 데이지는 이 모든 것을 집약한 대상이다. 그녀는 그의 삶의 목표이다. 그녀는 오아시스, 꽃이 만개한 정원, 에덴의 부활이다. 그녀는 또한 자본가들이 상추 대신 키우는 현금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해,”라고 개츠비는 닉에게 말한다.
데이지가 개츠비에게 잃어버린 꿈이자 집착의 대상인 것처럼, 우리도 수많은 세월 동안 로맨틱한 집착을 삶에 필수적인 동인으로 여겨왔다. 가질 수 없는 연인을 밤낮 갈망하거나, 그 사람이 없으면 비참하게 죽을 것 같은 마음, 80억 명 중 그 사람만이 우리의 고통을 치유하고 마법 같은 삶을 만들어 줄 유일한 존재라고 확신하면서 그가 없으면 마치 큰 문제라도 닥칠 듯 말이다.
논리적으로는 거의 말이 되지 않지만, 너무나 널리 퍼져 있는 강력한 이런 충동은 생물학적으로 타당성이 있으며, 종의 생존에는 이점을 제공하는 듯 보인다. 우리는 호르몬이 왕성하게 분비되는 10대와 20대에 이런 종류의 감정적인 터널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빈번한데, 이는 아마도 한 명의 짝에게 집중함으로써 다음 세대를 낳고 기르는 데 유리하도록 하기 위함일 수 있다. 생식이 더는 중요치 않은 중년이 되면(우리의 동굴 선조들이 생식의 운명이 다해 대개 죽은 나이), 이 모든 소란이 무엇 때문이었는지 궁금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좋아하는 록스타나 영화배우, 예술가나 작가, 수행자 또는 (신이 우리를 도와서) 정치인에게 비슷한 환상을 투영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이 마법 같은 존재라고 믿고 그들의 마법을 주입받기를 갈망한다. 한 번은 나와 수백 명의 학생이 일주일 동안 가르침을 받기 위해 상당히 유명한 구루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수련원으로 간 적이 있었다. 정지 신호에 멈춰 섰다가 교차로에 진입하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전혀 보지 못한 차가 경적을 울리기 시작했다. 그 차의 운전자는 교차로를 지나려는 자신의 통행권을 정확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구르는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투덜거림을 내뱉었다. “야, 야”―마치 여느 인간과 다름없이. 그것이 내가 그 주에 받은 최고의 가르침이었다(비근한 예로 그는 가는 길에 맛있는 햄샌드위치와 커피 파는 작은 가게에 들러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없는 특별한 본질을 소유했다고 믿는 것은 부질없다. 개츠비처럼 떠난 연인의 초록빛을 향해 손을 뻗거나. 좋아하는 슈퍼스타의 간접적인 광채에 의지해서 살아가려는 것 말이다. 우리는 블레이크의 해바라기가 태양을 갈망하는 것처럼 빛을 원하고 있다. ‘해바라기’라는 말 안에 이미 해가 들어있는 것처럼, 우리도 원하는 빛을 이미 가지고 있다. 예수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했다. 붓다는 마지막에 ‘자신의 등불이 돼라’는 말을 남겼다.
이는 단순히 아름다운 감상이 아니다. 실천하라는 격려이다. 우리의 행동, 생각, 감정을 깊이 들여다보고, 완벽하게 비어있음을 직관하여 자족적인 자유로운 ‘존재’가 되라는 의미이다. 빛을 어떤 외부의 대상과 동일시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 대상을 얻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얻은 후에 드러나는 진정한 위험 때문이다. 그때 소유는 우리의 거대한 갈망과 맞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것은 닉의 도움으로 개츠비가 처음 그의 집에서 데이지와의 로맨틱한 재회를 한 바로 그 순간 드러난다. 비가 내리고 있었고 두 사람은 수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안개가 끼지 않았다면 저 건너편 당신의 집을 볼 수 있을 텐데,” 개츠비가 말했다. “당신은 저 부두 끝에서 항상 밤새도록 타오르는 초록 불빛이야.”
데이지가 갑작스럽게 개츠비의 팔짱을 끼었고 그는 아랑곳없이 자신의 생각에 빠져있었다. 아마도 그 불빛의 거대한 의미가 이제 영원히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데이지와 그를 갈라놓았던 먼 거리는 이제 가까이, 거의 닿을 것 같은 거리로 좁혀졌다. 달과 별처럼 말이다. 그때 다시 부두에 초록 불빛이 켜졌다. 마법에 걸린 물체의 수가 하나 줄어든 것이다.
피츠제럴드는 욕망을 이루는데 부과되는 위험을 연구하는 예로 잘 알려져 있다. 개츠비처럼 가진 것 없는 중서부 출신의 가난한 소년이었던 그는, 초기에 동부에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어 그 자신이 주창한 용어인 ‘재즈 시대(Jazz Age)에 걸맞은 호황을 누리며 파티를 즐겼으나, 『위대한 개츠비』가 흥행에 실패하고 대공황이 그가 파급시킨 1920년대의 브랜드를 시대에 맞지 않는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급격한 몰락을 겪었다. 개츠비와 마찬가지로 그 또한 로맨틱한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한 번은 전쟁 중 군 생활에 대해 “나는 해외에 나간 적이 거의 없어요. 군에서의 내 경험은 주로 주둔하던 각 도시에서 만난 여인들과 계속해서 사랑에 빠진 거죠”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 도시 중 하나에서, 드디어 그토록 열망하던 황금빛 소녀 젤다 세이어를 얻게 된다. 그녀는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의 최고 미녀이자 주 대법원 판사의 외동딸이었다. 뉴욕과 리비에라에서 커플로 몇 년을 보낸 후, 그들은 알코올 중독과 빚, 서로의 불륜 지옥으로 빠져들었고, 젤다의 매혹적인 야생성은 광적인 상태로 돌변했다. 스콧은 마흔네 살의 나이에 파멸의 길로 접어들었고, 젤다는 정신 병원에서 남은 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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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을 갈망하거나 적어도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우리는 종종 이상화된 과거에 집착하게 된다. 선동가들은 이러한 충동을 악용하여 로마의 영광을 되찾아 주겠다는 둥,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약속을 한다. 물론 국가든 개인이든 결코 성공할 수는 없다. 개츠비는 또 한 번의 성대한 파티를 마친 후, 자신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데이지의 과거 이미지와 현재의 이미지가 충돌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녀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그는 절망스럽게 말했다. “예전 같으면 이해했겠지, 우리는 몇 시간이고 함께 앉아 있었어―”
그는 과일 껍질과 낙엽이 짓이겨져 황폐한 숲길을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걸 바라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과거를 되풀이할 수는 없지 않은가?”
“과거를 되풀이할 수 없다고?” 그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포효했다.
“왜 그럴 수 없다는 거지?”
그는 마치 과거가 자기 집 그림자 속 어딘가에 숨어 있어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다는 듯 주변을 거칠게 둘러보았다.
“모든 걸 예전으로 되돌려 놓을 거야.” 그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녀도 알게 되겠지.”
심리학적인 정확도는 여기서 최고점이 된다. 자신을 속이던 장막이 걷히면, 우리는 그 실체에 경악하여, 재빨리 장막을 다시 내리고자 한다. 그런데 이 겁에 질린 반응은 개츠비 특유의 소년다운 순수함에 어울린다. 그가 결의에 차서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도 알게 될 거야”라고 주장하는 모습에서 말이다. 그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독자나 닉이 개츠비를 온전하게 비난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마치 내 아버지가 일곱 살 어린 시절 브루클린 거리에서 친구들과 하던 알 카포네나 러키 루치아노 같은 갱스터 놀이를 흉내 내는 것이다.
개츠비가 되돌리고 싶어 하는 과거는 그가 루이빌에서 데이지와 나눈 첫 키스의 순간이며, 이 장면은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책에서 가장 매혹적인 대목이다. 우리는 닉의 간접 화법을 통해 이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이를 통해 피츠제럴드는 이 장면이 요구하는 고도로 서정적인 문체로 이야기를 전달한다. 개츠비가 느꼈지만 결코 스스로 표현할 수 없었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어느 가을밤, 다섯 해 전이었던가, 낙엽이 떨어지던 길을 걷던 두 사람은 나무 한 그루 없이 달빛이 하얗게 비치는 길가에 이르렀다. 그들은 거기서 멈춰 서로를 향해 돌아섰다. 계절이 두 번 바뀌어 신비로운 설렘이 가득한 서늘한 밤이었다. 집 집마다 아늑하게 밝혀진 불빛이 어둠 속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퍼져나가고, 별들 사이엔 소곤거림과 스산함이 감돌았다. 개츠비는 곁눈질로 보도블록이 사다리가 되어 나무 위의 비밀 장소에 걸쳐지는 것을 보았다. 혼자서 그 위로 오르면 그 어느 것에도 견줄 수 없는 생명의 우유 같은 달콤한 액체를 빨아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모든 꽃향기 풍기는 표현은 과장된 것으로 들릴 수 있지만, 초월적인 비밀 장소에 가서 경이로운 우유를 한 모금 마신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인도의 시인이자 현자인 카비르는 “나는 그것을 15초 동안 보았고, 그것이 나를 평생 종복으로 만들었다”라고 노래했다). 이런 순간은 종종 로맨틱한 흥분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에 엿볼 수 있다. 여기서는 하얀 달빛이 분사되는 마법 같은 분위기, “별들 사이의 소란스러움과 스산함”, 그리고 보도가 90도로 비스듬히 하늘로 향하는 사다리가 되는 시각적 언어의 유희가 그런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한 가지 걸림돌이 있다. “혼자 올라갈 때만 거기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최고 절정의 순간은 누군가와 나누려고 하면 재빨리 사라진다.(“둘은 성가셔,” 롤링 스톤즈가 〈내 구름에서 내려가〉에서 표현했듯 말이다)
데이지의 하얀 얼굴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그의 심장은 더 빠르게 뛰었다. 입을 맞추는 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전은 그녀의 가녀린 숨결과 함께 영원히 신의 영역에 각인되어 이제 더는 그의 마음을 방황케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잠시 숨을 고르며 별들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의 입술이 그녀에게 닿자 그녀는 꽃처럼 피어났고 열락은 완성되었다.
남자답고 정말 대담하다. 피츠제럴드는 형언할 수 없는 비전을 표현해 보기로 자청한 것이다. 가장 친한 친구이자 라이벌인 헤밍웨이가 스페인 내전에서 고환을 날리는 남자들을 찬양하고, 싱클레어 루이스가 미국 중산층 전체를 비아냥댈 때, 피츠제럴드는 신의 마음처럼 뛰노는 것에 대해 쓴다. 이는 영적인 황홀감에 대한 거리낌 없는 선언이었다. “황홀경(ecstasy)은 그리스어로 장소를 벗어난다는 ek-stasis에서 유래한 단어로, 더는 육체의 껍질에 갇혀 있지 않고, 자유롭게 뛰놀겠다는 상태를 묘사한다.
자유-삼매(samadhi)-란 극도로 민주적이어서 사회의 최상층을 꿈꾸는 로맨틱한 갱스터나 유명세를 타고 싶은 로맨틱한 소설가를 포함하여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이 황홀경을 맛본 사람만이 명확한 확신을 가지고 그런 글을 쓸 수 있다). 우리는 이런 놀라운 은혜를 스스로 얻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에 마음을 열 수는 있다. 아이 같은 수수함이 개츠비로 하여금 그런 환상을 수용하도록 한 것이며 그것이 그를 구원하고 축복해 주기에, “꿈의 가장자리를 떠다니는 더러운 먼지”임에도 불구하고 “개츠비는 결국 괜찮은 존재였다”라고 닉은 말한다.
개츠비에게 그 비전은 현현하자마자 사라진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여신을 숭배하던 숫총각이 아침 숨결에 집에서 꾸는 몽환의 문제와는 다른 것이다. 키스의 순간, 하늘만큼 넓은 개츠비의 무한 삼매(samadhi)는 데이지라는 형상으로 좁혀져 내려온다. “그의 입술이 닿자 그녀는 한 송이 꽃처럼 피어나 화신이 되었다.” 여기서 “화신”이라는 단어는 살덩이나 육체가 성스럽게 된다는 점에서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다. 소멸하지 않는 무한한 영혼인 그 빛이, 불완전하고 무상하며 언젠가는 소멸할 인간 소녀로 육 화 한 것이다.
여기엔 또 다른 시각적 언어유희의 암시도 있다. 그녀가 빛을 땅으로 끌어내리면, 빛의 파장은 데이지의 노란빛(조심)으로부터 카네이션의 붉은빛(멈춤, 더 이상 금지)으로 내려앉는다. 그리고 특히 가톨릭 신자로 자란 피츠제럴드에게는 성체의 교리,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한 영혼이 인간의 물리적 형태를 취한다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도다”라는 신념이 있다. 당신의 구세주가 당신을 육신의 영역, 즉 살덩이의 세계에서 영적 세계인 천상으로 이끈다면 그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개츠비의 소멸할 수밖에 없는 구원자(데이지)는 그에게 베란다에서 술만 먹게 할 뿐 다른 곳으로 인도할 길이 없다.
닉은 지나치게 감정에 복받쳐 표현한 어조에 대해 개츠비에게 사과하면서 당황스럽게 마무리한다. 그러나 먼 곳에서 종소리가 울리는 것 같은 느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가 말한 모든 것과 충격적인 감정 표현을 통해, 나는 오래전 어딘가에서 들었던 포착하기 어려운 리듬, 잃어버린 단어의 조각을 떠올렸다. 잠깐 내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오려 했으나, 내 입술은 마치 공기를 내뱉으려 고투하는 벙어리처럼 벌어졌다. 그러나 입술에선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고 내가 기억하고 있던 내용은 거의 영원히 전달할 수가 없게 되었다.
닉은 본질적으로, 책 속 사건을 관망하는 우리와 같은 방관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관여하지 않을 수 없다. 개츠비의 이야기는 닉이나 우리에게 미묘하고 정의 내릴 수 없는 울림을 준다. 우리는 모두 하늘을 나는 황홀경을 본성적으로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광으로부터의 타락이 우리의 원초적 트라우마이다.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상실감, 바로 그것이 보편이다: 종은 당신을 위해서 울린다.
이 사마디 경험은 고양되고 화려한 필치의 언어를 요구하고, 공유할 수 없을 만큼 연약하고, 낯선 것이다. 가끔 내킬 때마다 수행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앉아서 사마디를 닦는 수행자들에게 현현은 인위적 특별함이나 흐릿한 상흔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신의 마음으로 뛰논다는 것은 당신이 고립된 작은 파도라는 환상을 버리고, 파도와 바다 사이에 경계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이치임이 밝혀졌다. 다른 이들과 연결되기 위해 희생할 필요도 없다. 가장 깊고 진실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면 그뿐이다. 바다는 단지 하나뿐이라서 나와 당신은 거기서 분리될 수 없으므로, 우리 사이에 존재치도 않는 간격을 낭만적 신화나 조작된 공연으로 메우려고 안달할 필요도 없다. 위대한 개츠비의 서문은 모두 퍼포먼스에 관한 것이다.
황금 모자를 쓰세요, 그녀를 감동시키고 싶다면요; 만일 당신이 높이 뛰어서, 그것 또한 그녀를 감동시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하세요.
그녀가 “그대, 황금 모자를 쓰고, 높이 뛰어오르는 그대여, 난 반드시 당신을 갖고 말 거야!”라고 외칠 때까지.
모자를 쓰고 폼을 잡으며 이리저리 튀어 다니는 모습은 개츠비 같은 아이에게는 꼭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과 아무 관련이 없으며 시간이 지나면 결국 지치게 된다. 그런 감정은 수행이나 이런저런 성숙한 깨달음에 의해 어쨌든 빠져나오게 되어있다.
바오로 사도는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다.”라고 썼다. “질투도 하지 않고 자랑도 교만도 없다.” 튀는 것과 금빛 모자를 쓰는 것은 모두 퍼레이드이고 우쭐대는 것이다. 바오로가 사랑에 대한 정의에서 질투를 배제하라는 말은 데이지에게 자신만을 사랑하고 톰은 사랑한 적이 없다고 맹세할 것을 요구하는 개츠비에게 꼭 필요한 말이다. 대부분의 낭만적 재앙과 마찬가지로 이런 비참한 주장은 사랑이 소방 호스 같아서, 하나의 좁고 강렬한 흐름으로 한 사람을 향하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서 멀어진다는 개념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사도 바오로의 말을 빌리자면) 사랑은 안락한 것이지 강렬한 것이 아니다. 소방 호스가 아니라 따뜻한 욕조 같으며, 불교 경전에서 말하는 것처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중생이 쉴 수 있는 공간이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이라는 용어는 크고 감칠맛 나는 따뜻한 욕조에 몸을 푹 담그고 서로의 경계를 녹여내며 함께 휴식을 취하는 것을 일컫는다.
분명 몇몇 친구들은 다른 친구들보다 욕조 안에서 우리에게 더 가까이 앉을 것이다. 그런 게 인간이니까. 분명 우리에게는 가장 가까이에 앉은 특별한 친구, 세속적 삶을 즐기기에 훨씬 좋은 파트너가 있을 것이다. 존재 자체에 대한 기쁨이 깊어질수록 사랑은 단순하게 된다. 그냥... 함께 존재하는 것뿐이다. 존재는 진정한 마법이고, 그것이 공유된다면 마법은 배가 될 것이다. 사랑하는 친구가 우리의 인생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의식적으로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무한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갈망, 개츠비의 갈망이며, 그 무한한 공간을 유한한 것으로 채우려고 노력하는 한, 우리는 되지 않을 일에 계속 고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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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발견이란 누구나 언제든지 이 존재의 욕조에 들어가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잠시 앉아서 잠깐이라도 당신을 사로잡고 있는 모든 생각이나 느낌, 감각을 내려놓아라. 잡념을 없애려고 애쓰지 말아라. 그것은 오히려 또 다른 잡념을 붙잡는 것이다. 부여잡고 있던 것을 풀고 자신이라는 넓은 존재로 그저 돌아가라.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행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존재는 항상 여기에 있고, 즐길 수 있으며, 세상 모든 것과 자연스럽게 조우한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고통과 고뇌를 제거하고, 그들이 있던 자리에 맛있는 공간을 남긴다. 이것을 깨달음이라는 용어 이외의 다른 단어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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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는 삶에서 이룰 수 없는 원대한 욕망과 열망을 가진 출중한 사람의 몰락을 다룬 비극이다. 이 소설은 주식 시장이 치솟고, 단발머리 말괄량이들이 춤을 추며 연애를 하고, 금주법이 전혀 먹혀들지 않던 20세기 중반에 쓰였다. 모든 멋진 파티가 그렇듯 이 파티도 끝이 나지 않을 듯했다.
피츠제럴드의 등장인물들은 반짝이는 차를 타고 롱아일랜드에서 맨해튼 사이를 왕복하면서 “어떤 황량한 땅” 옆을 지나게 된다. 퀸즈 플러싱의 코로나 쓰레기장을 기반으로 한 이곳은 당시 사용하던 석탄재와 도시 전역의 쓰레기가 쌓인 곳이다.
이곳은 잿더미 계곡이다 — 재가 산등성이와 언덕, 기괴한 정원으로 밀처럼 자라나는 환상적인 농장으로, 그곳에서는 재가 집과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의 형태를 띠다가 마침내 초월적인 노력으로 가루 같은 공기를 뚫고 인간들에게까지 희미하게 무너져 내린다.
마치 폼페이의 폐허를 반향 하듯―무너져내리는 화산재에 파묻힌 망자들의 형상―, 이 골짜기는 1920년대의 붕괴와 개츠비, 그리고 피츠제럴드 붕괴의 전조가 된다. 인간의 모든 성취는 잿더미로 변할 것이다. 붓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말했다. “모든 모였던 것은 반드시 흩어질 것이다.”
잠시 당신의 삶 안에 모여서 구성된 것이 무엇인지 숙고해 보라. 그렇다, 존재한다는 것 말고는 모든 것이 구성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T.J. 에클버그 박사의 “푸르고 거대한” 눈, 빛바랜 잿더미 위를 빠꼼이 바라보는 거대한 간판 위의 신처럼 모든 육체의 길을 침묵으로 증언하는 안경 속 한 쌍의 눈에 의해 증명된다.
이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개츠비의 비극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책의 마지막을 마무리하는 닉의 생각을 되씹어볼 필요는 있다.
개츠비는 해마다 우리를 앞서 나가는 생동하는 미래를 믿었다. 그것은 매번 우리를 기만하지만 그건 아무 상관도 없다. 내일은 더 멀리 팔을 뻗고 더 빨리 달려 나갈 테니까... 그래서 어느 화창한 아침이 오면 ― 우리는 배를 타고 끊임없이 물결을 거슬러 과거를 향해 되돌아간다.
그것이 개츠비이고, 그것이 미국이며, 바로 그것이 몇몇 현자를 제외한 인류의 모습이다. 상상된 미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 너무 황홀하고 환상적이어서 다시는 다른 것을 바라지 못하는 어떤 크리스마스 아침의 행복감 같은 궁극의 상태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나귀 앞에 매달린 당근처럼 미래는 우리 앞에서 계속 멀어진다. 그리고 당나귀가 당근을 따라가듯,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간다. 그것이 우리가 아는 방법이다.
피츠제럴드는 물론 더 아름답게 묘사한다. 이것은 장엄하고 가슴 아픈 수사이다. “물결을 거스르는 보트”라는 문구가 스콧과 젤다가 함께 묻힌 메릴랜드주 락빌 묘지의 돌판에 새겨져 있으며, 이 책에서 가장 인용되는 구절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과거로 실려 갈 수 없다. 일부러 과거를 반복할 수도 없고, 미래를 따라잡을 만큼 충분히 빠르지도 않다. 그의 영웅적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피츠제럴드 또한 자신이 겪은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파악하지 못했다. 우리는 현재 외에는 도달할 곳이 없다. 미래의 신화를 부여잡으려 해도 실패하여 다시 현재로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는 과거로도 되돌아갈 수 없다. 그것 역시 신화이다. 지도가 말해 주는 것처럼, “당신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스스로 이곳에 충만히 존재하면서, 현재에 완전히 머무르면, 모든 게 견줄 수 없는 경이로운 은하수임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