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법을 전한 서양 문학
독서라는 행위를 통해 고양되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마치 높은 곳으로 들어 올려지는 느낌이 들 것이다. 공기는 희박해지고 시야가 넓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일은, 첫사랑과 마찬가지로, 청소년기나 성인이 되는 전후 시기에 자주 강렬하게 일어난다.
존 키츠는 스물다섯 살 때 이런 일을 겪었다. 1816년 시월 어느 날 밤, 친구 코든 클라크의 런던 집에서 두 사람은 빌려온 『오디세이아』와 『일리아드』를 번갈아 읽고 있었다. 이는 셰익스피어와 동시대 인물인 조지 채프먼이 호머의 그리스어를 놀랍도록 생생한 영어 시로 옮긴 번역본이었다. 흥분이 고조된 두 사람은 밤새도록 번갈아 가며 큰 소리로 책을 읽었고 그런 상태로 새벽에 헤어졌다.
몇 시간 잠을 자고 아래층으로 내려온 클라크는 아침 식탁 위에서 키츠가 보내온 봉투를 발견했고 거기엔 갓 쓴 소네트가 적혀있었다. 첫 구절은 채프먼의 “크고 대담한” 목소리를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호메로스의 “맑고 고요한” 숨결을 어떻게 경험했는지 묘사한다. 이 시는 영문학에서 가장 훌륭한 경이로운 표현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그러고 나서 나는 천체의 감시자가 된 것처럼
새로운 행성이 시야로 헤엄쳐 들어오는 것을 느꼈지;
용감한 코르테스가 매의 눈으로
태평양을 처음 바라보았을 때의 눈초리랄까
— 모든 사람이 서로를 미친 듯이 바라보며 —
다리엔의 봉우리에 고요히 서 있었던 것처럼.
새로운 행성에 대한 언급은 가설적이거나 우연한 것이 아니다. 그로부터 삼십오 년 전, 윌리엄 허셜은 천왕성을 발견했다. 그때까지 행성의 수는 고정된 것으로, 심지어 신성하게 정해진 것으로 여겨졌으며, 모든 천문학과 점성술 체계는 그런 가설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허셜의 발견은 단순히 새로운 행성이 추가된 것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모델이 날아가 버렸음을 의미했다. 이제는 모든 것이 가능해졌다.
여기서 키이츠는 언어에 대해 무한한 가능성을 깨달았음을 묘사하고 있다. 그가 흥분하여 정복자들을 혼동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신대륙에서 태평양을 처음 본 유럽인은 코르테스가 아닌 발보아였다. 키츠는 다리엔 지협(당시 다리엔 지협으로 알려진 파나마 지협)의 산 정상에 오른 발보아와 그 일행들이 바다를 내려다보며 느꼈을 "거친 추측"과 경외감에 찬 침묵을 구현한다. 이 침묵은 마지막 줄이 끝난 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이것은 키츠의 첫 번째 위대한 시였다. 그로부터 5년도 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지만, 그동안 거의 광적인 작업의 폭포를 쏟아냈다. 시(詩) 작업은 행복한 미적 삼매를 기록한 것이고, 최고의 순간에는 삼매를 일깨운다. 그의 황홀한 시와 짧고 비참한 삶 사이의 대조는 충격적이다.
키츠가 여덟 살 때, 아버지가 말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어머니는 아이들을 할머니에게 맡기고 새로운 남편과 함께 떠났다가, 키츠가 열네 살이 되던 즈음에 홀로 돌아와서 결핵으로 사망했다. 크리스마스 즈음이었고 결핵은 당시 영국에서 모든 사망의 약 4분의 1을 차지한 19세기의 역병이었다. 키츠와 그의 형제들은 후견인의 보호 아래로 들어갔는데, 그 후견인은 키츠가 의학도가 되기를 바랐다.
키츠는 공상에 빠지거나 자기보다 몸집이 큰 소년들(그는 5피트를 넘지 못했으므로 아마도 제일 작았을 것이다)과 싸우지 않는 한 항상 훌륭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의대를 졸업하자마자, 시인이 되겠다고 발표함으로써 후견인의 분노를 샀다. 그는 간신히 몇 권의 시집을 출간했지만, 계급적 속물근성으로 인해 비평가들로부터 “코크니 시인”이라는 조롱과 멸시를 받는다.
이로써 자신의 소명에 따라 생계를 유지하는 기회는 사라진 셈이다. 그는 옆집에 새로 이사 온 패니 브론과 열렬한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아름답고 우아하고 어리숙하면서도 유행을 잘 따르고 생경스럽다”라고 키츠의 편지에 묘사하고 있다. 그녀를 사랑했지만 가난 때문에 결혼은 성사되지 못한다. 마치 불행의 여신이 주위를 맴돌듯, 그에겐 전혀 알지 못했던 상당량의 유산이 있었지만, 변호사의 부주의한 서류 작업으로 그냥 방치되어 있었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그의 삶은 디킨스의 소설처럼 행복한 결말로의 반전은 없었다.
빚은 쌓여만 가는데, 그는 알코올 중독에 걸린 형을 간병하며 형의 처참한 죽음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했다. 키츠의 다른 형은 미국으로 재산을 찾아 떠났고, 그곳에서 나쁜 투자에 연루되어 키츠에게 빌린 돈도 갚지 못한 채 더 깊은 빚더미에 올라 폐병으로 사망했다.
결국 키츠도 병에 걸렸다. 그는 따뜻한 기후가 건강을 회복시켜 줄 것이라 믿고 친구와 함께 이탈리아로 항해했고, 한 달 동안 바람 한 점 없는 척박한 날씨로 바다에서 힘들게 지낸 뒤, 11월 중순 로마에 도착했지만, 이미 그곳 날씨도 차갑게 변해 있었다. 스페인식 계단이 설치된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서 그는 패니에게 절망적이고 분노에 찬 편지를 썼다. 잔인할 정도로 무능한 의사의 괴롭힘 아래 앤초비를 곁들인 빵 한 조각으로 허기를 달래며 때때로 각혈을 한다며 심경을 토로했다. 그는 고통을 완화시켜 주는 아편이 한 병 있어 그런대로 견디고 있었다. 그러나 의사와 친구는 선의의 의도로 그것마저 빼앗아 갔다.
키츠의 무덤은 로마의 프로테스탄트를 위한 묘지에 있다. 그의 요청에 따라 비석에는 이름이 없지만 직접 작성한 비문은 있다. “여기 물 위에 이름이 쓰인 이가 누워있다.” 묘지에는 수백 년 된 사이프러스가 무성하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아름답고 입구를 찾기가 어려워서 관광객이 많이 찾지 않는다. 그곳은 로마에서 고요함을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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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함(Silence)은 「그리스 항아리에 대한 송시」(Ode on a Grecian Urn)의 중심 주제이기도 하다. 키츠는 대영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이 시에 관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영 박물관에는 파르테논 신전에서 갓 약탈한 이른바 엘긴 대리석(Elgin Marbles)이 전시되어 있었다. (2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리스는 이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키츠는 여러 항아리의 음각을 감상하며, 어떤 판화는 직접 베껴 그려보기도 했다. 이 시에서 키츠는 실제 유물의 요소들과 자신의 상상력을 결합하여 시간, 열정, 추구와 이를 초월하는 고요의 존재감을 담은 항아리를 창조해 낸다. 우아하게 곡선을 이루는 형태에 의거하여 키츠는 이 항아리를 여성으로 의인화한다.
그대, 아직 더럽혀지지 않은 고요한 신부여,
그대, 고요함과 느릿한 시간이 길러낸 아이여,
숲 속의 역사가인 그대가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시인의 리듬보다 더 달콤한 꽃 이야기구나
"더럽혀지지 않은(unravish’d)"이라는 단어의 사용에는 명백히 아이러니가 있다. "Ravish"는 “빼앗다, 강제로 가져가다”라는 뜻이다. 만약 로드 엘긴 같은 사업가들이 고대 유물들을 강제로 가져가지 않았다면, 키츠는 그것들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Ravish"는 또한 “강간하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어느 면에서 항아리는 수 세기 동안 순결과 순수함을 지켜왔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힌트는 "still"이라는 단어에 있다. 이 단어에는 "여전히" 혹은 "지금까지"라는 명백한 의미 외에도, "고요한" 또는 "정지한"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키츠의 시대에는 "항상, 영원히"라는 의미도 있었다. 이 의미들을 결합하면, 항아리의 순수함은 그녀가 고요하고, 정지해 있으며, 항상 존재한다는 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항아리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기쁨과 슬픔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녀는 시간 속에서 지속하며, 세월을 거쳐 이 순간 시인의 눈앞에 나타났지만, 시간에 속하지 않는다. 그녀는 시간과 함께 있지만, 그 기원은 시간 밖의 세계에 있는 "시간이 기른 아이"이다. 또한, 세 번째 줄에서 항아리는 "역사가"로 묘사된다. 비록 침묵하고 있지만, 그녀는 시보다 더 웅변적이다. 이는 항아리의 측면을 장식한 고대 생활과 신화 장면들을 암시한다. 그 장면들에는 신과 인간이 억지로 떠밀며 처녀들을 쫓고, 화가가 그린 음악가들이 배경 음악을 제공하며, 모든 장면이 꽃과 잎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대의 자태를 감싸고도는 잎의 전설은 무엇인가......
신들의 일이던가 인간의 일이던가, 아니면 둘 다인가
템페의 골짜기인가 아니면 아르카디아 언덕인가?
이들은 어떤 사내들과 신들인가? 처녀들은 왜 달아나려 하는가?
이 얼마나 간절한 구애이며 필사적인 도망침인가?
공중을 가로지르는 피리 소리와 북소리
얼마나 미칠듯한 환희인가?
다음에 나오는 몇몇 스탠자에서 우리는 산, 강, 마을, 거리, 암소를 제물로 바치는 사제, 그리고 가장 인상적인 장면인 욕망의 대상을 따라잡기 직전 정욕에 찬 청년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을 보게 된다.
과감한 연인이여,
그녀를 바싹 추격하더라도
결코, 결단코 그녀에게 키스할 수 없으리.
그러나 슬퍼 말라.
그대 비록 크나큰 기쁨은 얻지 못할지라도
그대의 연인은 빛바래는 일 없으므로
영원히 사랑하게 될지니...
그녀는 영원히 아름다울 것이다!
이것이 이 시의 에피파니(깨달음)이다. 항아리의 표면에서 사는 인물들은 소음, 움직임, 추격, 두근거리는 맥박, 욕망의 강탈 등 긴박한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그들의 관점으로 보면 이런 일들은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좋은 일과 나쁜 일, 한 마디로 인생 자체이다. 하지만 여기 항아리 표면 밖의 우리는 더 높은 관조적 위치에서 한꺼번에 조망하기에, 모든 것이 좋으면서 동시에 아름답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서로 반목할지 모르는 암소와 암소를 도살할 사제, 정숙한 처녀와 그녀를 쫓는 발정 난 총각이 모두 조화로운 구성물: 한마디로 예술이다.
이 예술 작품은 모든 의미에서 정물화이다. 인물들은 움직이지 않고,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며, 늙거나 변하지 않고, 젊음을 영원히 간직하고 있다. 심지어 파이프를 불고 북을 두드리는 음악가들조차 모두 침묵하고 있다.
들리는 멜로디는 아름답다. 그러나,
들리지 않는 멜로디는 더욱 아름답다.
그러니... 어서...
부드러운 피리여 계속 불어라
감각의 귀에 불지 말고
사랑의 친밀함에 불어다오...
영혼을 향해 소리 없는 노래를 불러다오...
여기서 다르마에 대해 진지하게 다뤄보자.
예술적 관조라는 높고 선한 관점에서 삶을 경험하면 삶은 달리 보일 뿐만 아니라 더 고양되어 보인다. 고요하게 시간을 초월한 멜로디는 다양한 멜로디가 내는 선율보다 더욱 달콤하고 사랑스럽다. 그 고양된 관점은 그림을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전달될 수 없는 미묘함을 지니고 있다.
이 미학적 관점은 영적 관점과 융합된다. "소리가 없는 노래"와 같은 침묵의 소리는 탄소 기반의 "감각적 귀"로 들을 수 없다. 그것들은 "영혼에게" 연주된다. 예술이 부여하는 시간 너머의 불멸성 — 모든 젊고 활기찬 그리스 청년들과 여전히 정복되지 않은 처녀들의 시들지 않는 아름다움 — 은 깨달은 성인들이 전달해 준 불멸의 영역을 암시한다. 그 영역은 항상 바로 여기에, 당신의 의식 속에 존재한다. 소리가 없는 노래를 듣기 위해 내면을 들어보라. 선이나 색이 없는 그림을 내면에서 보라. 질감이나 형태가 없는 조각을 내면에서 느껴보라.
이 미학과 영적 융합은 시의 결말에서 명확해진다. 키츠는 다시 항아리에게 말을 걸며, 자신의 세대가 사라진 후에 어떻게 미래 세대들을 고양(高揚)시킬 것인지 생각한다.
이 세대가 늙음에 쇠하게 될 때,
우리 세대보다 더 큰 고난의 한가운데서도
너는 남아 있을 것이다.
너는 인간에게 친구가 되어 말할 것이다,
"아름다움은 진리이며, 진리는 아름다움이라고
-이것이 지상에서 알고 있어야 할 모든 것,
그리고 알아야 할 모든 것이다."-라고
마지막 연에서, 항아리는 마침내 답을 하고, 그 내용은 1819년 이후로 계속해서 논의를 일으키고 있다. 그것은 너무도 포괄적이며 - 상식적으로는 잘못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상식적으로 말한다면 삶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지 않고, 오히려 몹시 추악한 고통과 쇠퇴로 가득하다: 부당함, 질병, 노화, 죽음. (키츠의 삶을 보라.) 그렇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존재하지만 덧없다: 청춘이 사라지고, 꽃이 시들어간다. 아름다운 것은 위대한 능력과 인내심으로 구성될 뿐이다. 정확히 그것들은 실제의 삶이 아닌 가공물이기에 아름다운 것이다.(키츠의 작품을 보라.)
이것은 다르마적인 대답이 필요한 강력한 반론이다. 키츠의 진리와 아름다움이 같다는 등식은 삶을 피상적으로 인식할 때는 잘못된 등식이다. 오직 관찰자의 높은 시선으로 관조할 때만 아름답고 우아한 삶의 완전성이 드러난다. 항아리 곁 표면의 인물들처럼 말이다. 엘리엇이 E.T. 에게 이별 인사를 건네는 장면에서 우리는 그와 함께 운다. 그러나 영화의 결말을 바꾸지 않는다.
고대의 깨달음 공식은 키츠가 말하는 진리의 공식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베단타 철학에서 이 공식을 sat = chit = ananda라고 한다. 첫 번째 용어인 sat는 순수한 실재, 존재, 진리를 의미한다. 세 번째 용어 ananda는 끝없는 행복, 무한한 환희, 즉 삶을 모든 것이 '완벽하게 괜찮은 것'으로 인식하는 행복감을 뜻한다. 그리고 중간 용어인 chit는 순수한 자각, 의식이며, 이 둘을 연결한다. 이 공식은 순수한 자각이 방해받지 않을 때만 작동한다—진리가 아름다움으로, 실재가 행복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키츠의 시들은 이러한 높은, 영원한 시각을 담고 있다. 또한 그의 시들은 표면적으로 그의 인생 사건을 반영하기도 한다. 예컨대, 키츠는 항아리를 '기른 아이' 또는 '다른 세계로부터 온 피난민'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그가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마음이 맞지 않았던 보호자의 손에서 자란 고아로서의 과거를 암시한다. 또 한편으로, 열렬하지만 결코 소유할 수 없는 사랑은 그의 연인 패니 브론에 대한 좌절된 사랑을 반영하기도 한다. 하지만 위대한 예술을 단순히 일기의 형태로 축소하는 것은 실수이다. 키츠는 항아리라는 이미지 속에서 삶의 결정적인 모델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백 퍼센트 바쁘고 시끄럽고 다양한 활동이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백 퍼센트 고요한 상태를 말이다. 이는 이샤 우파니샤드의 구절에서 2천 년 전에 이미 제시된 모델과 동일하다: 옴 푸르남 아다 푸르남 이담. "옴. 저것은 충만하다, 이것도 충만하다." 비가시적 존재는 충만하고, 완전하며, 전체이고, 가시적 우주 또한 충만하고 완전하며, 전체이다.
이것은 또한 삶의 충만함을 깨우치는 명상의 결정적인 모델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생각을 억누르는 방식으로 명상을 시도한다. 자신의 감정과 열정을 억누름으로써 깨달음을 얻거나 영적인 존재가 되려고 한다. 하지만 생각들은 인생의 음악, 그 파이프와 울림이다. 실수는 파도를 때려 눌러 바다를 고요하게 만들려는 것처럼 고요를 인위적으로 창조하려는데 있다. 파도는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파도는 수면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심연의 본질은 수면이 아무리 요동쳐도 항상 고요하다. 따라서 명상은 표면을 있는 그대로 두고 근본적인 고요함이 우리를 끌어당기도록 내버려 두는 것을 의미한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고요함을 발견했다면(창조한 것이 아니라), 눈을 뜨고 소음 속에서 고요함을 찾는 것도 점점 쉬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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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과 고요함을 추구하는 키츠의 아이디어는 1818년 그가 형제들에게 보낸 편지로 확인할 수 있다.
바로 그때, 문학에서 특히 중요한 업적을 이루는 사람의 자질, 특히 셰익스피어가 매우 많이 지니고 있던 자질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즉, 반 능력(Negative Capability)을 의미한다. 이는 한 사람이 불확실성, 신비, 의심 속에서도 사실과 이성에 대해 성급하게 탐구하지 않은 채 거기에 머무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키츠가 불확실성을 수용하는 능력을 발견한 것은 서양의 주요 창작 예술가가 동양의 관조 예술의 중심 전략을 독자적으로 발견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중국 도교에서는 이를 “하지 않음”을 뜻하는 무위(無爲)라고 한다. 우리는 그런 능력을 가졌고 기꺼이 그렇게 될 수 있어야 한다. 예측하지 않고, 해석하지 않고, 무엇이든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것, 익히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경험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키츠가 종종 매우 ‘감각적인’ 시인으로 여겨지는 이유이다. 그는 감각에 과도하게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하는 마음을 흐릿한 필터로 우회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색과 소리, 질감과 맛을 인식하며, 다른 사람들이 고조된 감각(초현실적이거나 환각적 경험)이라 부르는 것도 그대로 인식한다. 그는 그것을 아름다움이라 부른다.
네거티브 캐퍼빌리티(negative capability)는 명상하는 방법이며, 키츠가 설명한 것처럼 “통달한 사람”이 되는 방법이다. 물론 시를 쓰든 주식 포트폴리오를 관리하든 자기 분야의 기술을 습득하고 적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기술만 습득한다. 무위는 기술과 천재성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특별한 소스이다. 살리에리와 모차르트, 또는 키츠와 종종 함께 묶이는 다른 낭만주의 시인들 사이의 차이일 수도 있다.
정의하면, 이미 자신의 예술이나 철학, 투자 전략에 동화되어 있는 것은 익숙해진 것이고, 이미 지나간 이야기다. 한 번도 가본 적 없고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으로 가려면 ‘미스터리, 불확실성, 의심’에 빠져들고 그곳에서 휴식을 취해야 한다. 그러한 신비가 마치 폴라로이드 필름처럼 눈앞에서 사진으로 현상되면, 그 신비를 자신의 시스템에 동화시킨 다음 새로운 땅에 발을 딛고 다시 도전할 수 있다.
숭산 스님의 말씀처럼 “오직 모를 뿐”이다. 제인 구달은 야생 침팬지의 행동에 대한 획기적인 발견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른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에 만족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상사인 루이스 리키 박사의 사무실에서 비서로 시작했는데, 과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그녀를 탄자니아의 정글로 보낸 것은 바로 루이스 리키 박사였다. 그녀는 선입견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인내심을 가지고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혼자 고요히 앉아 침팬지들을 먼발치에서 그저 존재 자체로 관찰하다가 침팬지들이 스스로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자신들의 삶으로 맞이할 때까지 기꺼이 기다렸다. 이를 통해 그녀는 침팬지의 행동을 미리 짜진 이론에 맞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고 기록할 수 있었다.
물론 시인이나 모든 예술가는 과학자보다 한 가지 큰 장점이 있다. 키츠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위대한 시인은 아름다움의 감각으로 다른 모든 생각을 날려버리거나, 모든 생각을 일소에 지워버린다
큰 아름다움은 사소한 생각들을 날려버리고 지워버린다.
무위(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야말로 창의적 천재성을 발휘하는 열쇠이다.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키츠는 또 다른 편지에서 시인은 “자아도 없고” “성격도 없고” “정체성도 없고”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자신의 신념을 밝힌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불교에서는 우리 안에 견고하고 분리된 ‘나’가 없고, 작은 운전대를 잡은 운전자도 없으며, 그저 빛나고 열린 인식의 공간만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인식을 ‘무아’라고 부른다. 이것이 바로 자유의 공간이다. 한 가지 색을 고집하지 않고 언제든 주변 환경에 어울릴 수 있는 카멜레온처럼, 시인 키츠는 “비천하든 고귀하든, 높든 낮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그 누구와 무엇이든 자유롭게 즐기고 공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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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로 향하는 한 달간의 끔찍한 항해 중에 병마에 시달리던 키츠는 셰익스피어의 시집의 빈 페이지를 이용해 패니 브론을 향한 그리움의 소네트 마지막 본을 필사했다. 그녀를 더는 소유할 수 없고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하던 때, 그들은 비공식적으로, 그리고 절망적으로 약혼을 했고, 그는 몇 달 전부터 시를 쓴 듯하다. 아마도 시를 적을 곳이 필요했을지 모르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나란히 놓여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탁월하다.
이 시는 사랑하는 사람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마치 너무 괴로운 일인 것처럼 말이다. 대신 굳건하고 밝은 별을 향해 말한다. 키츠는 북극성 폴라리스를 염두에 두었을지 모른다. 북극성은 하늘에서 움직이지 않는 유일한 천체로, 길을 잃은 여행자를 집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폴라리스는 꽤 희미하다. 어쩌면 달을 제외하고 밤하늘에서 가장 밝은 천체이자 사랑의 여신인 금성, 아름다운 저녁별을 의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녁별은 해가 진 후 서쪽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기 전 잠시만 빛나며, 평범한 인간의 사랑과 아름다움처럼 덧없는 것이다. 키츠는 금성과 북극성의 특성을 결합하여 인간의 한계를 넘어 영원히 지속되는 눈부신 행복, 즉 아름다움과 사랑이라는 시적 이상을 표현했다.
밝은 별이여, 네가 그러하듯 나도 변치 않는다면 좋으련만 ―
고독한 빛으로 밤하늘에 높이 걸려
영원히 눈꺼풀을 열어두고 지켜보는
인내심 강하여 잠들지 않는 자연이라는 은둔자처럼,
물결이 제사장과 같은 임무를 수행하고
인간의 해안을 맑게 정화하는 것을,
혹은 산과 황야 위에 새롭게 떨어진
부드러운 눈의 가면을 응시하면서.
이 시의 여덟 줄(옥타브)은 명백히 반 능력(negative capability)의 산물이다. 이 이미지들은 키이츠의 과장된 현실감으로 그려져 있으며, 생각하는 마음으로는 발명할 수 없을 정도로 영감이 넘치고 생생하다. 별을 자연 속에 불면의 은자처럼 묘사하고, 인간으로 북적이는 세상이 물로 깨끗하게 씻겨지고, 부드러운 눈으로 덮일 산과 황야를 묘사한다. 키이츠는 그의 투명한 직관 속에서 지구를 우주에서 본 것처럼, 마치 아폴로 우주비행사들이 150년 후에 그것을 보고 사진으로 찍듯이 본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지구의 빛나는 아름다움을 보게 할 뿐만 아니라, 우주 밖에서의 고독하고 먼, 차가운 느낌까지 느끼게 한다.
그래서 첫 번째 줄에서 “않는다면”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래, 나는 별처럼 한결같기를 원하고, 별처럼 냉담한 고독은 원하지 않아― 여기서 키츠는 자신의 시와 의식적인 작별을 고하고 마침내 그리스 항아리의 관찰자 또는 "용감한 코르테즈"가 산봉우리에서의 내려보는 시각을 포기한다. 이제 내려올 때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굳건하게 남는다. 어째서?
이것이 아래 있는 마지막 연의 주제이다. 매우 섬세하고 정교한 언어 장난으로, 시의 시작부인 "아니다"를 "아니―아직"으로 끌어 늘리면서 말이다.
아니 - 아직 굳건하고, 아직도 변함없이,
내 사랑스러운 연인의 성숙한 가슴을 베개 삼아
머리를 기대고
그 부드러운 떨림과 부풀어 오름을 느끼며
달콤한 안달 속에서 영원히 깨어 있다면.
아. 해결책이 있다. 밝은 별의 천체의 불멸성은 주되, 지상으로 내려오게 하는 것이다. 하늘에서 사랑하는 연인의 가슴에 머리를 얹고 거기서 영원히 있는 것이다.(실제로는 물론, 15분 후에 당신의 팔은 저리게 되겠지만, 이것은 시다) 별이 행성의 움직이는 물과 차갑고 "부드럽게 떨어진 눈의 가면"을 지켜보듯이, 그녀가 자는 동안 그녀 숨결의 움직임, 따뜻한 가슴의 "부드러운 떨림과 부풀어 오름"을 지켜보는 증인이 되게 해 달라는. 내리는 눈은 물론 떨어지기만 한다; 여기에 "부풀어 오름"이라는 덧붙은 단어는 죽어가는 시인에 대한 일종의 부활에 관한 소망을 암시한다. 불멸성을 여기서 찾게 하라. 사랑의 숨결을 "영원히 느끼게" 하고, "영원히 깨어" 되도록, 서서히 약해지던 숨이 어떻게든 그녀의 숨에 의해 유지되도록 말이다.
아마도 이 감동적인 호소는 실제 들을 때만큼 환상적으로 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깊은 의미에서의 사랑은 단지 순간적인 인간의 감정이 아니다. 감정으로 인식되는 것은 관계의 창문을 통해 초월적인 것을 힌트 삼을 때다. 우리가 그것의 '후우우시' 소리에 감격할 때, 어느 정도로는 시간과 몸에서 휩쓸려 나와, 필멸이라는 운명 밖으로 벗어난다. 우리는 분리감을 벗어나, 사랑하는 이와 나의 거리가 제로로 줄어드는 시점보다 더 가까운 친밀감속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이 친밀함을 소네트의 결말 커플릿에서 볼 수 있다:
고요히, 고요히 그녀의 연약한 숨소리를 듣고 싶어,
영원히 그렇게 살거나 – 그럴 수 없다면 기절하듯 죽으리.
"고요히, 고요히." 여기 다시 한번 그 중요한 단어가 등장한다. 이제는 절박하게 반복되며, 모든 단어의 의미가 농축된다. 고요함: 침묵하고, 나의 사랑하는 이의 섬세한 숨소리를 듣기 위해 고요히 있다. 정지: 움직이지 않고, 그녀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움직이지 않고, 그리고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 지금까지: 나는 가만히 여기에 있다, 젠장 - 아직 죽지 않았고 항상, 영원히: 죽음에 도전한다, 우리를 떼어 놓은 잔인한 운명에 도전한다, 삶의 한계에 도전한다. 시의 초월적인 마법을 통해, 그리고 초월의 시적인 마법을 통해, 당신과 함께 여기 있고, 당신과 융합되어 있으며, 항상 여기에 남을 것이다. 고요히, 여전히.
이 부분은 정말로 가슴 아픈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키츠의 격정적이고 비극적인 짧은 삶이 마지막에 "죽음"이라는 단어로 끝난다는 것은 깊은 감정을 자아낸다. 그러나 이것은 이야기의 절반에 불과하다. 키츠는 "아름다움이 진리이고, 진리가 아름다움이다"라는 대담한 등식과 마찬가지로, "그래서 영원히 살거나 — 아니면 기절하듯 죽어버리리"라는 말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키츠는 사랑이나 아름다움에 깊이 몰입했을 때, 우리가 충분히 고요해지면 초월적인 상태에 이른다는 것을 알고 경험했다.
그곳에서는 나와 너의 경계가 사라지고, 가까움과 멀어짐, 얻음과 잃음, 기쁨과 절망, 삶과 죽음의 구분이 모두 녹아 없어진다. 모든 구분이 사라지는 그곳으로 "기절"하듯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살아있든 죽어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으며, 우리는 그저 하나의 거대한 "기절" 속으로 빠져들고, 그 기절은 곧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