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렇게 서두르시는 거죠?
윌리엄 셰익스피어 • 맥베스
소크라테스는 정말 술을 잘 마셨다. 플라톤에 따르면, 술에 그리 관심이 없었지만 시합이 붙으면 소크라테스는 테이블 주위의 누구보다 잘 마셨다고 한다. 플라톤의 심포지엄(향연)의 마지막 장면에서, 심각한 술판 끝에 대부분의 동료들이 취해서 쓰러진 상황에서도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평소처럼 철학을 논하고 있다. 그는 두 명의 살짝 취한 극작가들에게 위대한 비극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동시에 위트 있는 희극도 쓸 수 있어야 한다고 즐겁게 설명한다.
이것은 급진적 입장이다. 비극적 시각으로 보면, 모든 삶은 파괴와 죽음으로 쓸려간다. 왕과 여타의 거물들은 큰 열망을 품고 잠시 성공한 뒤 큰 충돌과 함께 무너져 내리고, 무대에는 시체만 즐비하다. 이는 우리의 욕망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드러내 준다. 반면, 희극적 시각으로 보면 삶은 더 과잉의 상태로 이어진다. 꿈이 깨지고 사람들이 죽더라도, 새로운 꿈과 세대가 태어나는데, 이는 산불 잿더미에 피어나는 야생화와 같다. 고전적인 희극은 결혼 축제의 노래와 춤으로 끝나며, 새로운 생명의 약속으로 행복한 재생을 암시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짓궂게 우리를 놀린다. 『향연』의 화자는 술잔을 기울이다 잠들어 소크라테스의 핵심 주장을 듣지 못한다. 즉, 이 두 상반된 비전이 어떻게 한 위대한 극작가의 작품 속에서 공존할 수 있는지를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희극의 웃는 가면과 비극의 우는 가면 뒤를 동시에 꿰뚫는 능력을 말할 것이다. 태어나 온 자궁과 돌아가야 할 무덤, 이 두 신비로운 공간을 넘어서서 그것들이 결국 하나의 공간, 곧 우리가 매 순간 맥동하는 바로 이 공간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원했던 극작가는 아마도 그 자신만큼이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극작가가 등장하기까지는 거의 이천 년이 걸렸다. 그것도 영국에서. 당시 전문 작가라 하면 거리 싸움꾼이거나 정부의 스파이, 또는 “팸플릿 작가”(오늘날의 유료 트위터 트롤의 선구자) 같은 사람이었다. 런던 시내를 벗어난 템스강 건너편의 극장가는 소란스러운 곳이었다. 선술집이 즐비하고, 남녀를 가리지 않고 매춘부의 집들이 늘어서 있었으며, 곰 몰이와 황소 몰이 같은 잔인한 스포츠가 열리던 경기장식 극장들이 곳곳에 많았다. 그곳에서는 연극이 상연되기도 했다. 런던의 엘리트들은 저속하고, 때로는 위험할 수도 있는 쾌락을 찾아 강을 건넜다. 이는 훗날 세련된 뉴요커들이 할렘의 재즈 클럽과 마약 소굴로 향하는 모습과도 닮았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스트랫퍼드라는 외진 곳에서 이런 무대로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배운 것 없는 촌뜨기 취급을 받았지만, 이내 도시에서 태어나 대학 교육을 받은 라이벌을 압도했다. 그가 쓴 창작물은 가히 경이적이었다. 20여 년 동안 해마다 두 편씩 희곡을 쓰면서도, 난폭한 배우들로 구성된 극단을 관리하고, 몇 달간 그들과 함께 험난한 마차를 타고 불확실한 장소를 떠도는 순회공연을 했을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거대한 천재성을 설명하려는 학문적 저서들은 수백 권에 이르지만, 그의 능력을 완전히 규명하기란 여전히 쉽지 않다. 그는 역할에 맞추어 왕은 왕처럼 말하고 느끼게 하고, 숲의 요정은 숲의 요정처럼 말하고 느끼게 하는 재능을 가졌다.
가장 흥미로운 해석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두 페이지짜리 단편, "모든 것과 아무것도(Everything and Nothing)"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제목은 키츠를 연상시키며, 보르헤스는 어린 시절부터 셰익스피어가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추측한다. (이는 불교 용어로 아나타(anatta), 즉 “무아(無我)”를 떠올리게 한다.) 셰익스피어 안에 자신이라고 부를 만한 실체가 없었기에, 그는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무한히 열린 공간을 가질 수 있었고, 그 공간 안에서 왕이나 요정이 되어 그들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키츠의 "네거티브 캐퍼빌러티(Negative Capability)"이다. 셰익스피어는 모든 만들어진 자아와 조건, 모든 가면 너머에 있는 하나의 공간에서 살고 글을 썼다. 그가 다룬 가면은 비극적 가면과 희극적 가면이라는 상반된 것들까지 포함하며, 셰익스피어는 그의 희곡 속에서 이러한 상반된 것들이 결국 동등하다는 암시를 가득 담았다. 예컨대, “뜨거운 얼음(hot ice),” “비극적인 환희(tragical mirth),” “두려운 용기(fearful bravery),” “달콤한 슬픔(sweet sorrow),” “사랑 어린 증오(loving hate),” “차가운 불(cold fire),” “밝은 연기(bright smoke)” 같은 표현들이다.
가장 명백한 암시는 맥베스의 비극에서, 첫 장면의 끝에 등장하는 어떤 이론적 진술(statement)이다. 이 희곡은 시작부터 강렬하다. 문자 그대로, 천둥과 번개가 터지는 화려한 연출로 문을 연다. 이는 분말 송진을 점화해 만든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특수 효과로, 1606년 글로브 극장에서 이 작품이 초연되었을 때 관객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무대 중앙의 함정문(trapdoor)에서 세 마녀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은 스코틀랜드 귀족 맥베스가 진행 중인 전투를 끝내면 찾아가기로 합의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외친다:
아름다움은 더러움이요, 더러움은 아름다움.
안개와 질펀한 공기 속을 떠다니는.
“아름다움이 더러움이고, 더러움이 아름다운 것이다(Fair is foul, foul is fair)”라는 공식은 대개 맥베스가 곧 빠져들게 될 도덕적 안개의 전조로 해석된다. 이 안갯속에서는 옳고 그름의 경계가 사라지고, 마치 정당한 행위와 부당한 행위를 나누는 선이 지워지며 질서가 혼돈으로 변하는 듯하다.
맥베스가 이 경계를 넘도록 부추기는 인물은 그의 아내다. 그녀는 마치 중세 스코틀랜드판 리얼 하우스와이프에서 튀어나온 듯한, 야망 가득하고 날카로운 발톱을 지닌 인물이다. 지금까지 맥베스는 용맹한 군인이자 충성스러운 신하로 살아왔지만, 2막에 이르면, 레이디 맥베스의 부추김에 따라 그는 몰래 복도를 걸어가 잠든 왕을 살해하려 한다. 그를 인도하는 것은 그의 열병 같은 생각이 만들어낸 환영—그 앞에서 떠다니는 환각이다.
내 앞에 보이는 것은 단도인가?
내 손에 칼자루가 쥐어져 있네?
.... 아닌가 그대는
그저 마음의 단도이던가?
마음에는 언제나 단검이 있고, 달콤한 잘못을 저지르라는 상상이 목전에서 유혹하며, 칼자루는 항상 우리 손에 들려있다. 이봐, 내가 금고에서 20달러를 빼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걸. 그러니 괜찮아: 우리는 생각에는 책임이 없다. 범죄는 우리가 그 생각에 대해 행동하기 시작할 때, 단검을 움켜쥐는 순간 시작된다. "이리 오라, 내가 너를 꽉 움켜쥐리라" 맥베스는 칼에게 말했고, 그로 인해 비극이 일어났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늘 그렇듯 모든 층위는 그 아래에 다른 층위를 드러낸다. 마녀들의 "아름다움은 더러움이고, 더러움은 아름다움이다"는 행운이 불운이 될 수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의미다. 예수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것이다"라고 말했듯 말이다. 그 "될 것이다"는 미래를 위한 약속처럼 들린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논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재 시제를 배경으로 한다. 모든 것은 이미 그 자체로 반대를 포함하고 있고 거기엔 정도 차가 있을 뿐이다. 중국 철학의 태극도 또는 음양도와 같이, 빛은 어둠을 포함하고, 어둠은 빛을 포함한다. 그들은 엄격하게 분리된 것이 아니라 곡선 모양의 유기적 포옹 속에서 함께 흐른다. 절대적인 예와 아니요, 선과 악, 아름다움과 더러움에 선을 긋는 것은 우리의 이원론적 사고뿐이다. 아인슈타인의 E = mc²는 불가능하게 들린다, 그러나 사실 에너지는 물질이고, 물질은 에너지이다. 단지 서로 다른 스텝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을 뿐이다.
대승불교의 핵심 경전 중 하나인 《심경》에서는 이 원리를 더욱 충격적인 용어로 표현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무릇 형상 있는 것은 텅 비어있음이요, 텅 빔이 곧 형상이다
즉, 우리가 소위 자아라고 부르는 것을 포함해서 견고하고 실제처럼 보이는 모든 것은 별반 특별할 게 없고 오히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으로 계속해서 나타난다. 우리가 유치원에서 크레파스로 그린 깔끔하게 구분된 "사물"("이것은 태양이고, 이것은 꽃이고, 이것은 흙이고...")은 실질적이고 지속적이며 개별적인 영원한 정체성이 없는 것으로 밝혀진다. 우리는 사물이 아닌 과정의 세계에 살고 있다. 흙이라는 물질은 태양 에너지와 결합하여 꽃이라는 물질이 되고, 꽃은 다시 흙이라는 물질로 분해된다. 또 꽃은 동물에게 먹혀 복잡한 행동 에너지가 되는 칼로리로 연소된 후, 다시 흙 물질로 분해되는 순환을 계속한다.
이 끊임없는 변형 과정은 시간 속에서 일어난다. 어느 한순간, 우리는 빈번하고 일시적인 형태를 영구적인 것으로 착각할 수 있으며, 부분적인 진실을 전체 진실로 착각할 수 있다. 마치 고전에 나오는 ‘장님과 코끼리의 우화’처럼, 각자는 그것이 뱀이나 야자수 잎, 벽, 나무줄기와 같다고 말한다. 단편적인 장면만을 이해하고, 전체 이야기는 놓치고 만다. 만약 우리가 코끼리의 단면을 본다면, 처음에는 뱀 같은 형태를, 그다음에는 야자수 잎 같은 형태를 볼 것이다. 계속해서 그러한 모습들이 나타날 것이다 —마치 평면 세계를 통과하는 구체처럼 말이다— 그것은 실제로 어떤 특정한 형태가 아니라, 동시에 모든 형태이다. 시간 너머에서만 총체적인 형태가 드러난다.
"아름다움은 더러움이다."라는 말은 모든 것이 결국 다른 모든 것과 하나라는 의미를 암시한다. 우리의 맹목적인 정도에 따라 모든 형태가 드러나기까지 시간이 걸릴지라도 말이다. 이런 변화가 그들 나름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내버려 둔다면 괜찮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주라는 과정에 맞서 싸우게 되고, 그것은 우리가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코끼리가 우리를 밟아버릴 것은 분명하니까. 여기서 맥베스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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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맥베스는 전장에서 막 승리를 거두어 세상을 자신의 의지대로 조종하고 통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맛본 상태이다. 그는 무장한 전우 벤쿠오와 함께 황량하게 탁 트인 초원을 지나다가 마녀들을 만난다. 마녀들은 운명적인 예언을 하며 그를 맞이한다.
맥베스여, 모든 영광은 그대에게, 나중에 그대는 왕이 될 것이다!
마녀들의 예언은 그의 군사적 성공의 심리적 연장이다. 마치 신발 끈을 묶는 법을 배운 아이들이 곧 슈퍼 히어로가 되는 꿈을 꾸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가 언제 왕이 될까? 결국에는 "나중에"(Manana)이다.
맥베스의 가장 큰 결점은 대개 야망이라 생각하지만, 더 정확히 진단하면 조바심이다. 결국 그는 코끼리의 배통처럼 최고의 위대함으로 부풀어 오르다가, 종국엔 꼬리처럼 점차 줄어들 것이다. 맥베스의 실수, 즉 그의 "죄"는, 강렬한 열망에 눈이 멀어, 어떤 형상을 단일한 시간에 기반한 큰 변화의 일부로 보기보다는 궁극적인 것으로 집착하여, 서둘러 그것을 향해 돌진한 것이다. 사실, 예언은 그를 깜짝 놀라게 한다. - 벤쿠오는 말한다, "나의 고귀한 동료는... 황홀경에 빠진 것 같군..."이라고. 우리는 미래의 영광이나 기쁨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현재의 소박한 즐거움을 잃는다. 우리는 서두른다. 마치 눈앞에 매달려 있는 당근을 따라잡으려고 노력하는 당나귀 같다. 당나귀는 그것을 결코 잡지 못한다. 왜냐하면 오직 현재만이 실재이기 때문이다. - 시간은 항상 바로 지금이다. 맥베스가 유령의 단검을 움켜쥔 것처럼, 우리도 미래에 대한 허황된 만족을 움켜쥐느라 현재는 불만 상태다. 맥베스에게 영원히 매달려 있는 당근은 늙은 던컨 왕이었다. 처음에는 던컨의 왕관을 부러워한다. 2막에 와서는, 자신의 조바심과 레이디 맥베스의 감정적인 협박에 이끌려, 던컨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다. 그러나 왕이 되자 그는 불행해진다. 독한 불안과 불면증에 시달려 ("아, 내 마음은 독전갈로 가득 차 있구려, 여보!"), 이제 그는 죽은 던컨의 평온을 질투하게 된다.
죽은 자와 함께 있는 것이 더 낫겠네,
평화를 얻겠다고, 있던 평화를 다 해쳐 버렸으니...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이 평화라는 것을 이해할 만큼의 통찰력은 가지고 있지만, 우리가 그 추구를 그칠 때라만 비로소 참 평화가 시작된다는 것을 이해할 정도로 충분치는 않다.
미래를 향해 안절부절못하는 맥베스의 긴장 상태는, 인생의 조향 휠을 꽉 부여잡고 조종석에 몸을 바싹 기댄 채 빨리 전진하여 마법처럼 이 블록에서 저 블록으로 이동하려고 서두르는 우리와 같다. 실제로는 항상 여기에 있으면서 말이다. 심장내과 전문의인 메이어 프리드먼은 최초로 A 유형 성격이라는 개념을 고안해 냈는데, 그는 환자 대기실의 의자들이 성급한 고혈압 환자가 사용했을 경우 자연스레 뒤쪽이 아닌 앞쪽 가장자리가 먼저 닳아있는 걸 눈치챘다. 이 연극은 전체적으로 앞으로 기울어져 있고 급박하다.
맥베스의 전우인 벤쿠오는 B유형이다. 어떤 면에서 그는 맥베스의 또 다른 모습, 더 나은 자아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우리의 더 나은 자아를 상징한다. 그는 중심이 잡혀 있고, 통찰력 있으며, 조급해하지 않고 고요한 상태로, 삶이라는 운전석에 몸을 기대어 엔진의 말들이 달리도록 그대로 두고 있다. (누가 무대에서 찰리 파커나 미소 짓는 에디 반 헤일런만큼 침착할 수 있을까? 그들의 손가락이 불타오를 때조차?) 한마디로, 벤쿠오는 인내심이 강하다. 불교의 가르침에서 인내, 즉 크샨티 바라미타는 깨달음을 지탱하는 여섯 가지 초월적 덕목 중 하나이다. 나는 수감자들과 함께 일하며 크샨티 바라미타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것은 초조함 속에서 속을 끓이거나, 감방 동료의 지루한 이야기가 끝나기를 손가락을 두드리며 기다리거나, 30년 형이 끝나기를 바라며 초조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초조함을 인식하고, 그에 대한 집착을 풀어내며 지금 순간 그대로의 무한한 열린 공간으로 자신을 쉬게 하는 것이다. 무한한 존재 속에서 쉼을 얻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을 향해 내달리거나, 혐오스러운 것을 걱정하지 않는 인내의 상태에서, 벤쿠오는 마녀들에게 말한다:
그러니 나에게 말하라,
나는 그대들의 호의도 미움도 바라지 않으니
별일 아닌 듯, 그냥 좀 궁금해서였다. 마녀들은 벤쿠오에게 왕이 되지는 않겠지만 왕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것으로 벤쿠오는 충분히 만족한다. 맥베스와 달리 그는 전체적인 그림을 보고 있으니, 진정으로 삶의 연회에 초대된 후계자라고 할 수 있다. 던컨은 죽기 직전 벤쿠오의 고귀한 품성을 "연회"에 빗대어 농담을 하고, 이는 벤쿠오가 자신의 정당한 후계자임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맥베스는 벤쿠오의 덕성을 그리 반기지는 않는다. 왕이 된 뒤 편집증에 시달리며, 그는 옛 친구의 "자연스러운 왕의 자질"을 위협으로 느껴 그를 죽여 시신을 도랑에 버리게 한다. 이것은 우리의 최악의 모습이다. 삶의 연회가 주는 즐거움을 느긋하게 기다리는 법을 잊고, 시간과 변화가 우리의 성공을 일시적으로 만들 것이라는 두려움(정확히 맞는)에 빠져, 더 큰 비전을 포기하는 것 말이다.
그러나 그 비전은 죽지 않는다. 벤쿠오의 유령은, 시기적절하게도, 극의 중심부에 위치한 연회 장면에 나타난다. 이 장면은 마침내 왕이 된 맥베스가 연회 자리의 맨 앞에 앉아, 진지한 얼굴로 모인 귀족들에게 "각자의 자리 앉으시오"라고 말하며 시작된다. 자신이 폭력으로 질서 있는 "계급" 또는 위계 체계를 깨트려 놓고, 이제는 모두가 그것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이는 매우 인간적인 충동이다. "죄의 대가가 없는 마법의 영역"에 들어가 이번 한 번만 저지르고 말겠다는 생각이다 — 이번 한 번은 아주 부적절한 사람과 관계를 맺거나 할머니의 유산에서 약간의 돈을 빼돌리고, 그렇게 원하는 것을 얻은 후에는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죄의 대가 없는 마법의 영역"에서 일어난 일은 거기서 끝난다고 믿는다. 맥베스는 부정한 방법으로 당선된 후, 법과 질서를 외치며 영원히 권력을 잡으려는 꿈을 꾸는 정치가와도 같다. 다행스럽게도 폭군은 영원히 권력을 유지하지 못한다. 삶의 흐름과 단절된 그들의 꿈은 결국 불모가 되기 때문이다. 맥베스는 자식이 없다. 그는 벤쿠오의 자손이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는 예언을 두려워하며, 마녀들이 자신에게 "열매 없는 왕관"과 "불임의 홀"을 줬다고 저주한다. 그의 편집증은 자멸적인 예언이 되고, 권력을 위협할 수도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살해하고, 심지어 그들의 아내와 자식들까지 죽이기 시작하면서, 그는 점점 더 많은 반란군을 자극하게 된다.
마녀들은 맥베스의 저주를 받을 만한가? 우리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있나? 맥베스는 마녀들이 자기의 야망에 아첨할 때는 선이라고 말하지만, 그가 아름답다고 여긴 것이 더러운 것으로 판명되자 그녀들을 사악하다고 말한다. 맥베스가 "이렇게 아름답고도 추악한 날을 본 적이 없었어"라고 말한 첫 대사는 날씨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인간의 운명이 해와 구름의 교차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고 불가피하게 변해감을 암시한다. 모든 것은 크고 복잡한 시스템의 일부이며, 우리의 조야한 선악의 결과보다 훨씬 크고 복잡하다. (햄릿은 "착하거나 나쁜 것이라는 것은 없다. 생각이 그것을 만든다."라고 말한다. 우리의 편견, 우리의 애착과 혐오가 그것을 만든다.) 맥베스는 날이 궂다고 마녀들을 저주하고, 그런 날씨를 탓한다.
마녀들은 모태 자연의 대리인일 수도 있다. 상상 속의 승리와 미래를 향해 곧장 직진하는 전통적인 A유형의 남성에게 모태 자연은 절대 협조하지 않는 완강한 고집스러운 태도를 고수한다. 만약 신의 웃음소리를 듣고 싶다면, 계획을 말해보라. 아니면 마이크 타이슨(Mike Tyson)이 말한,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하지! 처맞기 전까지는-이라는 말을 음미해 보라. "더블, 더블 토일 앤 트러블(두 배, 두 배의 수고와 고통), " 마녀들은 마법의 솥에 미래를 요리하며 외친다. 번성하는 가능성의 활기찬 자궁으로, 세포 분열의 2-4-8-16처럼 두 배로 늘어나는 복잡성이 넘쳐흐른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셰익스피어는 우리에게 여러 겹의 층위를 제공한다. 아름다운 것이 추악한 것인 이 세상에서 여성은 또한 남성이다. 이 성별의 유동성을 가진 마녀들은 수염이 나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마녀라 부르지 않고 앵글로색슨어로 운명을 지칭하는 ‘웨이워드 자매’라고 소개한다. 이것은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의 운명을 창조하는 세 명의 여신을 암시한다. 그러나 맥베스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한다. 여기서 운명에 관한 셰익스피어의 이해는 그리스의 개념보다는 카르마(업보)의 개념에 더 가깝다. 산스크리트어로, 카르마는 문자 그대로 "행위"를 의미하며,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리 자신의 행위 때문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카르마는 ‘무결과’라는 마법적 사고를 압도하여, 원인과 결과를 절대 피할 수 없게 옭아맨다.
맥베스 자신도 이 인과응보의 원리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공평한 정의가
독이 든 성배 한 모금을
우리의 입술에
권하는 도다
연회장 장면에서, 그의 업보는 벤쿠오라는 유령의 형태를 취한다. 우리의 더 나은, 더 현명한 자아는 아무리 그것들을 물리치려 해도 정당한 자리를 요구한다. 이것은 마치 테이블 정상인 왕좌를 떡 차지한 벤쿠오의 유령을 보고 놀라 녹아내리는 맥베스의 모습과 같다. 유령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손님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맥베스의 모습에 아연실색한다. (그것은 그들의 업보가 아니기에). 온유한 자들이 땅을 상속받는다. 편협한 이기심의 불이 활활 타오르다 꺼진 후에는 거시적인 시각을 가진 인내심 있는 벤쿠오가 왕국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그의 광대한 내면 공간으로 맥베스의 관점과 벤쿠오의 관점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었다. 벤쿠오의 넓은 시야를 통해 사물의 진정한 모습과, 그 반대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었으며, 그래서 희곡을 쓸 수 있었다. 맥베스를 통해, 성공은 얻었지만 모든 것이 빠져나가 버린 고통과, 붙잡으려다 실패한 사투의 "용맹한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관객은 이 두 가지 관점 모두에 분명 조금이라도 공감할 것이므로, 이 극은 보편적 호소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이 희곡은 링컨 대통령의 애독서였으며, 보좌관들은 종종 책상 위에 이 책을 펼쳐 놓은 채 잠들어 있는 그를 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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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가 엉망이 된 후, 맥베스는 마녀들에게 다시 한번 운을 시험해 보기로 결심하고 그녀들을 찾아 황야로 나선다. 이번에는 더 멋진 특수 효과가 등장한다! -마녀들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가마솥에서 세 가지 유령을 불러내어 맥베스와 운명에 관한 세 가지 예언을 한다.
첫 번째 예언은 간단하다: “맥더프를 조심하라.” 맥더프는 맥베스가 그의 가족을 도륙한 후 결국 전투에서 그와 맞붙어 맥베스의 목을 벨 거라는 내용이다. 이 경고는 폭력이나 질병, 음주 운전의 희생자로 우리가 처음 친구를 잃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을 반추하여 결국 우리 자신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암시한다. 우리는 젊음이나 아름다움을 영원히 유지할 수 없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불교의 표준 공식) 과정을 겪어야 한다. 어른이 되어 일터에 발을 들여놓을 때, 우리는 자신이 겁 많고 연약한 어린아이처럼 느껴진다. 맥베스가 왕좌를 노리는 가식적인 인물인 것처럼, 우리는 그들 사이에서 가짜처럼 느끼며, 결국 누군가가 우리의 위선을 드러내고, 약점을 찾아내어 몰락시킬 거라고 생각한다.
끔찍한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고, 어떤 구체적이고 치명적인 사건에 우리 이름이 연루되기도 한다. 맥더프 같은 몇몇 사람이 저 밖에서 우리의 현관 번호를 일러줄 수도 있다. 극 중에서 그는 던컨 왕이 암살되자마자 마치 어떤 운명이 치밀하게 방어하는 성문을 두드리듯 맥베스의 성문을 두드리며 처음 등장한다. 맥베스는 필사적으로 왕의 피를 손에서 씻어내고 냉정하게 행동하려 애쓴다. 마치 죽음이 다가올 때, 자신의 행동을 정리하고 대담하게 맞서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다.
두 번째 예언인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자는 맥베스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는 첫 번째 예언과는 사뭇 다른 류의 예언이다. 삶이라는 경험을 조금이라도 쌓으면, 우리는 결국 안전하다는 것에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 우리를 두렵게 하는 어른들도 여자의 몸에서 나왔으며, 우리와 같이 두려워하고 취약한 엄마의 자식들이다. 우리는 모두 출생, 노화, 질병 및 죽음에 속박되어 있다.
세 번째 예언도 낭보로 들린다.
맥베스는 절대 패배하지 않으리라
거대한 버넘 숲 던시넨 언덕이
그를 향해 다가올 때까지.
버넘 숲은 맥베스의 성이 있는 던시넨 언덕에서 몇 마일 떨어진 숲이다. 숲은 당연히 움직일 수 없으므로, 이것은 마치 맥베스가 지옥이 얼어붙을 때까지 안전하다는 것과 같다. 던시넨은 맥베스의 억척스러운 요새이다. 요새는 우리를 세상의 혼돈으로부터 지켜주는 어떤 형태의 절연체일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국경 장벽, 폐쇄된 커뮤니티, 우리의 부풀어 오른 주식 포트폴리오, 장갑차 같은 SUV(어떤 모델은 실제로 아르마다라고 불린다), 우리의 질긴 종교 등이다.
하지만 시간은 우리 모두를 잡아먹는다. 열역학 두 번째 원칙에 따르면, 시간이 지나면 엔트로피라는 혼돈이 지배하게 된다. 모든 것들은 해체된다. 분자들은 더 체계적인 배열에서 덜 체계적인 배열로 이동한다. 나의 화학 교수 중 한 분은 이 법칙을 설명할 때 (특유의 독일 사투리로), "당신이 반짝거리는 새 메르세데스-벤츠를 길가에 주차하고 오백 년이 지나면, 그것은 녹슨 쓰레기 더미로 변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오백 년 동안 쓰레기 더미를 길가에 주차한다면, 그것은 메르세데스가 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버넘 숲에 관한 예언을 듣고 맥베스는 환희를 표한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틀렸다. 결국 그렇게 될 테니. 영원히 지속할 거라 상상하는 모든 것은 붕괴할 것이다: 우리의 몸, 우리의 집, 우리의 문명마저도 말이다. 열역학 법칙은 머지않아 지옥의 모든 것도 얼어붙을 거라 보장한다. 맥베스를 물러나게 하려는 반란군은 버넘 숲에 이르자, 군대의 강함을 위장하기 위해 각 병사에게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를 잘라 몸에 붙이고 행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묵묵히 전진하는 숲의 섬뜩한 비전은 자연의 야성이 다시금 자신을 펼쳐내며 우리가 정돈한 개척지에 세력을 과시하는 특정 종류의 엔트로피를 암시한다: 셰익스피어 이전 세대에서, 영국 숲의 대부분은 헨리 8세의 해군을 설립하기 위해 벌목되었고, 잠잠했던 중세 사회는 초기 자본주의와 도시의 번잡함에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다. 셰익스피어의 많은 희곡은 새로운 질서에 대한 불안을 반영한다. 버넘 숲의 행진은 산업 사회로의 부상이 맥베스의 부상과 마찬가지로 찬탈임을 경고하는 녹색의 복수임에 틀림없다. 언젠가 나무들은 다시 주차장을 차지할 것이고, 셰익스피어는, 우리 중 많은 사람처럼, 그것을 얼마쯤은 받아들이는 듯 보인다.
마지막 막이 오르면, 엔트로피의 궁극적인 승리를 볼 수 있다. 처음부터 레이디 맥베스는 이 작품의 두뇌 역할을 해왔다. 이제 반란군이 공격을 준비하면서, 그녀의 교활한 마음은 혼란에 빠진다. 셰익스피어는 그녀의 연설을 깔끔한 5음절에서 갑작스레 조잡한 산문으로 전환함으로써 그 점을 강조하는데: 우리는 그녀의 뇌에서 나오는 들쭉날쭉한 뇌파를 볼 수 있다. 그녀는 비참한 몽유병 환자로 전락하여 끝없이 살인을 재연하면서, 보이지 않는 죄책감에 손에서 피를 씻어내려 한다: "씻겨라, 저주받은 얼룩아, 씻겨라, 내가 말했잖아!" 이제 잠은 걷혔고, 교활함은 광기가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그녀의 마음을 더욱 비통하게 하는 대사는, "행해진 일은 취소할 수 없다"였다.
그녀의 고통을 마주한 맥베스는, 조만간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우리를 엄습했을 때 우리가 의사나 약사, 바텐더에게 할 질문을, 그녀의 주치의에게 던진다.
병든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느냐,
뿌리 깊은 슬픔을 기억에서 뽑아낼 수 있느냐,
뇌에 기록된 고민을 지우고
달콤한 망각의 해독제로
마음을 짓누르는 흉터로 가득 찬 가슴을 정화할 수 있느냐?
여기서 우리는 세 번째 고귀한 진리, 고통이 마침내 끝날 것이라는 확답을 듣고자 한다. 의사의 대답은 폭탄이다: "환자 스스로 치료해야 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아주 좋은 소식이다. 약사도,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고, 우리는 스스로를 도울 수 있을 뿐이다. 모든 고통을 해결하는 니르바나는 우리 자신의 존재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왕국은 우리 안에 있다. 맥베스는 외부의 권력과 명성의 왕국에서 평온과 만족을 찾고 있는 동안 내면의 왕국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는 이솝 우화의 개와 비슷하다. 입에 뼈를 물고 작은 다리를 건너다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더 맛있는 뼈를 물고 있는 다른 개로 착각하여 짖다가 진짜 뼈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그때쯤 맥베스는 완전히 환멸에 빠진다. 레이디 맥베스도 마찬가지이다. 3막에서, 여왕이 된 후 처음으로 솔직하게 자기 깨달음에 입각하여 그녀가 하는 말은 이제껏 쓰인 문장 중 가장 비통하다.
모든 걸 다 탕진했건만, 얻은 건 아무것도 없네,
만족은 하나 없고 욕망만 남았구려...
왕좌의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 그녀는 마음의 평화와 만족감, 그리고 자비로운 여성의 마음까지 내던졌다. 어두운 영혼들을 불러 여성성을 지워버리고 무자비하게 만들어달라고 요청까지 했다. 행복해지려는 열망으로 단 한 가지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는데, 그것이 그녀를 만족시키지 못할 때, 그다음엔 무엇이 남을까? 그녀는 자신이 나쁜 거래, 악마와의 거래, 결국 아무 의미 없이 물에 비친 뼈다귀만 얻었다는 걸 깨닫는다. 반란군이 성문 앞에 도착하고, 급박한 통치가 막바지에 이를 무렵 맥베스는 아내의 자살 소식을 듣는다. 그는 무심하게 반응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녀는 나중에 죽었어야 했는데;
죽었다는 말을 들을 시간은 반드시 올 텐데.
내일, 그리고 내일, 그리고 내일
“그녀는 나중에 죽었어야 했는데”라는 말은 종종 오해를 받는다. 이것은 그녀가 더 나은 시기를 선택해서 죽어야 했다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죽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 오늘이 아니라도 수많은 내일 중 하나에 말이다.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모든 것이 헛된 일이니까.
이것은 환멸에 대한 맥베스의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진술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통찰력이 떠오르자, 그는 이제껏 말한 것 중에서 가장 뛰어난 독백을 이어간다. 셰익스피어는 단순히 화려하고 의미 없는 언어적 불꽃으로 독백을 쓴 것이 아니라 캐릭터의 가장 비밀스러운 내면의 심층적 탐구로 그것을 사용했다. 절망 속으로 깊이 침잠하는 것이다. 왕위 대관식에서 몰락까지, 코끼리의 풍요로운 복부에서 볼 것 없는 꼬리까지로의 빠른 진행은, 맥베스에게 마침내 시간을 초월한 온전한 깨달음과 환희심을 가져다주는 비전을 엿보게 한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영원히 풍요로운 복부를 움켜잡고 싶기에, 그 비전을 쓰라린 눈물로 바라본다.
"내일, 그리고 내일, 그리고 내일"
하루하루가 예정된 시간의 마지막 음절까지
천천히 기어오르네;
우리의 모든 어제는
어리석은 자들을
뿌연 죽음의 길로 밝히는 도다.
꺼져라, 꺼져라, 짧은 촛불이여!
인생은 단지 걸어 다니는 그림자일 뿐,....
맥베스의 어두운 시각 속에서 인류 전체는 "내일, 그리고 내일, 또 내일"이라는 지루한 리듬에 맞춰 끊임없이 터벅터벅 걸어가는 고통스러운 강제 행군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저 제자리를 맴돌 뿐이다. 영광에 대한 꿈이나 찬란한 미래로 우리를 투영하려는 작은 희망적 시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아니면 되려 거꾸로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셰익스피어가 ‘내일’에서 ‘오늘’로, ‘오늘’에서 ‘어제’로 이어지는 미묘한 시간의 역류로 암시하듯 우리는 거꾸로 간다. 모든 역사("기록된 시간")는 우리 같은 바보들이 그저 먼지투성이 무덤을 향해 거짓된 빛을 따라가는 것에 불과하다: 흙으로 돌아가고 먼지로 돌아간다. 차라리 그 빌어먹을 짧은 촛불을 꺼버리는 게 낫다. 레이디 맥베스, 당신 말이 맞았다. 이건 어두운 생각이지만, 셰익스피어는 더 어두운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제 그는 이미지의 초점을 촛불의 희미한 빛에서 그 빛이 만들어낸 그림자로 옮긴다. 만약 "삶이란 걷는 그림자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단지 덧없을 뿐만 아니라 실체도 없고, 실체 있는 현실의 조롱 섞인 모방일 뿐이다. 그림자는 평평하고 생명 없는 사람의 모조품이며, 그럼에도 좀비처럼 허망한 내일을 향해 무겁게 걸어가고 있다. 이후 셰익스피어는 모방의 개념을 더 발전시키며, 이미지를 또 한 번 바꾸어 배우로 비유한다.
"... 불쌍한 배우,
무대 위에서 자신이 맡은 시간을 뽐내고 애면글면하다가,
나중에 더는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는... “
둔탁한 음절로 된 "뽐냄"과 "애면글면"은 맥베스(그리고 우리)의 자랑스러운 상승과 급격한 몰락을 잔인하게 요약한다. 울려 퍼지는 자음은 이 두 단어가 같이 위조된 동전의 양면, 즉 처음에는 선한 표정을 짓다가 나중에는 더러운 표정을 짓는 조롱의 존재임을 암시한다. 배우의 "무대 위에서의 시간"은 셰익스피어 시대에 연극이 보통 두 시간 동안 진행된다는 점에서 짧은 시간, 즉 절반으로 줄어든 시간이다. 게다가 그 배우는 무대에 있을 때도 별로이다. 그는 과장되게 연기하고, 뽐내거나 걱정하며 연기한다. 이는 우디 앨런의 영화 "애니 홀"에서의 음울한 농담을 떠올리게 한다. 캣츠킬스 리조트에서 두 명의 나이 든 여성이 대화하는 장면에서 한 여성이 "여기 음식 정말 끔찍하네요."라고 말하자 다른 여성이 "그러게요, 양도 적어요."라고 응답한다. 그게 인생이다....
그것은 어리석은 자의 이야기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차 있건만,
아무런 의미도 없다.
우리의 명멸은 여기서 끝을 낸다. 지친 행군부터 꺼져가는 촛불, 어두운 그림자, 엉터리 연기, 미치광이의 고통스러운 외침까지, 결국 모든 것은 무(nothingness)로 끝난다. 이것이 독백의 결론이자 인생에 관한 마지막 한마디이다. 쓰라린 농담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기도 하다.
셰익스피어 시대에 "nothing(무)"은 여성 성기인 질에 대한 속어로 영국인들이 지금도 ‘헛소리’라는 의미로 쓰고 있는 "Bollocks(똥)!"과 비슷한 맥락의 어구였다.
하지만 이 농담의 켜켜에는 맥베스의 절망을 넘어선 다른 비전도 있다. 제로 상태인 인생의 맨 밑바닥, 모든 형태의 무덤은 무한이면서 공허의 결실이기도 하다. 우리의 소란과 안달, 행동이 안정을 찾으면 텅 빈 존재의 광활한 공간만 남게 된다. 내 스승인 마하리시가 언젠가 설명했듯이, "그냥... 무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매우 좋은 것이 있다."
이 ‘무’는 우리가 무언가를 부여잡으려 안간힘을 쓸 때 결핍으로 나타난다. 맥베스는 집착의 전략을 끝까지 추구함으로써,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결핍되었다는 것을 깨닫지만, 그는 결코 집착을 버리지 않고 무엇인가에 끊임없이 매달린다. 행함을 놓고 존재에 침잠하면 달콤한 것을 얻게 된다. 그것이 바로 아난다, 무의 맛, 원인 없는 기쁨, 황금 거위의 알, 버크스 알라 모드(bubkes a la mode)이다. 맥베스가 그토록 부단하게, 그토록 대가를 치르며 추구한 것 중 영원하고 만족스러운 것은 없다. 아무것도 신성하지 않다. 위대하다면 위대하고 소소하다면 소소할 수 있는 이 한 발짝의 행보로 맥베스가 알아낸 것은 추구할 만한 신성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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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의 끝에 이르면, 드디어 절망이 승리한다. 맥베스는 왕위를 쟁취하지 못한다. 허무하게 결론이 나자, 깨진 꿈들과 계략으로 가득 찬 그의 머리는 맥더프에 의해 잘리고 왕위는 벤쿠오의 자식들에게 넘어간다. 그들의 계보는 500년 동안 이어져 바로 이 연극의 첫 번째 관객인 제임스 왕까지 이어진다. 적자생존의 비전이다.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리면 즐길 수 있는 인생의 비전, 벤쿠오의 유전자만이 가난한 배우들과 조롱하는 그림자가 있는 연극에서 튀어나와 실제 세계, 우리 세상에서 번성한다.
맥베스는 자신이 부풀려서 큰 가치를 투여한 형상이 다름 아닌 공허함(emptyness)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고뇌에 빠져 죽는다. 그러나 그것은 이야기의 절반에 불과하다. 공허함이 맛있는 향연의 형태를 띤다는 것을 알면, 의자를 바싹 당기고 비 이원성의 향연을 즐길 수 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만 고정되고 영원해야 한다고 분별하여 애착하지 않는다면, 인생은 경이로움과 기쁨을 보여주는 만화경의 향연이 될 것이다. 누구나 어린 시절 현재를 온전히 누리는 충만한 자유의 느낌을 받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때는 구름은 구름일 뿐이고 나뭇잎은 나뭇잎일 뿐이지 그것들이 영원하거나, 다른 어떤 것으로 이어지기를 고대하지 않았다. 예수가 천국에 가려면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이 아닐까 한다. 맥베스가 사는 세상과는 달리 우리는 모두가 왕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