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얇은 봉투, 두툼한 진심

어느 원장님의 설날 소회

by 혜솔 황보영


아이들에게 설날은 손꼽아 기다리는 날이다. 돈의 가치를 다 알지는 못해도, 복주머니가 달린 봉투와 단정히 포장된 선물을 손에 쥐는 순간 표정이 먼저 달라진다. 특히 건강을 위해 평소 철저히 제한해 왔던 과자와 사탕이 이날만큼은 상 위에 오른다. 그 작은 약속 하나에 아이들은 금세 자세를 고쳐 앉는다.


아이들은 짐짓 진지한 얼굴로 무릎을 꿇는다. 아직 예절의 깊은 뜻을 다 알지는 못한다. 다만, 고개를 숙이면 선생님들이 웃어준다는 것,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면 칭찬을 받는다는 것을 몸으로 익힌다. 절은 그렇게 흉내에서 시작해 습관이 되고, 습관은 언젠가 태도가 된다.


교실에는 가래떡과 도마, 안전 칼이 놓인다. 그러나 떡국의 ‘미래의 맛’보다 아이들에게 더 급한 것은 눈앞의 말랑하고 쫀득한 ‘지금의 맛’이다. 썰기가 무섭게 입으로 가져가는 아이들 덕분에 교실은 어느새 왁자지껄한 작은 잔칫집이 된다. 서툰 손으로 가래떡을 잡고 썰어보는 그 순간, 아이들은 설명 보다 먼저 명절을 경험한다. 무병장수의 뜻은 몰라도 “이건 새해에 먹는 거야”라는 말을 들으며 한 해의 시작을 몸에 얹는다.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의 국민학교 시절 설날이 떠오른다. 그 시절은 모두가 배고프고 부족했다. 세뱃돈은 받을 수 있을지 기대조차 하지 못했고, 일 년에 한두 번 입는 새 옷의 깔끔함과 평소보다 조금 더 오른 고기반찬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돈의 액수보다 ‘새것’이 주는 설렘에 취해 동네를 누비던 그 소박한 기쁨이 오늘날 나를 지탱하는 정서적 뿌리가 되었음을 느낀다.


그러나 이제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자리에서 맞는 명절은 가볍지 않다. 명절은 기쁨이지만, 동시에 책임의 얼굴로 다가온다. 챙겨야 할 것들을 하나씩 헤아리는 순간, 마음속 계산기가 조용히 돌아간다. 숫자는 생각보다 냉정하다. 곁에서 고생하는 선생님들과 고마운 이들에게 더 넉넉히 전하고 싶은 마음은 넓은데, 현실은 그만큼 따라오지 못한다. 빈 장부를 덮으며 나는 문득 부모님이 건네주시던 작은 봉투를 떠올린다. 나의 얇은 봉투가 부끄러워질 때마다, 그 시절 부모님의 더 얇았을 봉투 안에 담겨 있었을 무게를 이제야 조금 헤아린다.


그래도 명절은 온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준비한다. 아이들에게는 어른의 사정을 들려줄 이유가 없으니까.


“엉덩이는 하늘로, 마음은 낮은 곳으로.”

만 1세 영아의 귀여운 세배 연습

절을 하다 옆으로 데굴 구르는 아이, 머리만 콕 박고 엉덩이를 번쩍 든 아이, 인사보다 먼저 손을 내미는 아이. 그 무해한 풍경 앞에서 무겁게 짓누르던 현실의 계산기가 잠시 멈춘다. 아직은 어설픈 몸짓이지만, 그 안에는 어른에게 고개를 숙여보는 첫 연습이 담겨 있다.


아이들의 명절과 어른의 명절은 다르다. 아이들은 받는 기쁨을 배우고, 어른은 감당하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그 사이 어딘가에서 우리는 같은 온기를 찾는다. 고개를 숙이고, 감사를 건네고, 함께 음식을 나누는 순간들. 아이들이 하루의 주인공이라면, 어른은 그 무대를 지켜내는 사람이다. 여전히 현실은 가파르지만, 아이들이 절을 마치고 환하게 고개를 드는 순간 나는 다시 스스로에게 말한다.


괜찮다.

잘 될 것이다.


나는 다시 얇은 봉투 속에

숫자로는 다 적지 못할

두툼한 진심을

꾹꾹 눌러 담는다.



#설날 #세배 #브런치수필 # #얇은봉투 #두툼한진심 #어른의설 #혜솔황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