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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음악이 문학을 만날 때

순례자처럼 노래한 사람들

by 아침햇살영


"라디오가 들려준 노래와 문장, 청춘의 울림을 다시 만나다."



회색 구름이 낮게 드리우고 비가 올 듯 공기가 묵직하던 날이었다.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고 강의장으로 향하는 길 위로 간헐적으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음은 바빴고 발걸음은 급했지만 그날만큼은 꼭 놓치고 싶지 않은 강의가 있었다.


여름 명사 특강으로 마련된 인문학 강의. 강연장을 찾은 이들은 단정한 옷차림에 예의를 갖추고, 낯익은 얼굴들과 인사를 나눈 뒤 차분히 자리에 앉았다. 무대 앞에는 '구자형 작가가 들려주는 방송문학 이야기'라는 문구가 시선을 끌고 있었다. 마이크를 타고 퍼져 나오는 목소리가 강연장을 가득 채우자, 나도 모르게 귀를 열고 마음을 기울였다.


구자형 작가는 <별이 빛나는 밤에>, <밤을 잊은 그대에게> 등 깊은 밤의 공기를 물들이던 전설적인 라디오 프로그램 대본을 써온 사람이다. 불 꺼진 방 안, 라디오에 마음을 기대던 수많은 청춘들,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한 줄의 문장에 위로받던 그 밤의 청자들. 그들을 위해 그는 심혈을 기울였다고 했다.


진행자의 한 마디 애드리브조차 허락하지 않을 만큼 치열하게 대본을 빚어냈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단순한 대중음악사가 아니었다. 방송 뒤편에서 묵묵히 빛을 만들어온 작가의 프로정신, 그리고 가수들의 고통과 노력, 치열한 서사가 단숨에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문학과 음악의 시대를 풍미한 방송문학 이야기는 '작가로서의 삶'보다는, 한 시대를 빛낸 가수들과의 생생한 만남, 그리고 무대 뒤에서 피어난 예술적 투혼을 담담하고도 깊이 있게 전해주었다.


조용필, 이문세, 이승환, 신승훈, 김현식, 김광석, 이수만... 그들은 단지 대중의 인기를 좇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수많은 유혹과 갈림길 앞에서도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지키기 위해 싸워온 이들. 긴 무명의 시간을 지나 스타가 되었고 다시 견디기 힘든 슬럼프 속에서도 음악의 생명력을 믿으며 끝까지 나아갔던 순례자들이었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내 마음을 사로잡은 인물이 이수만이었다.

SM엔터테인먼트를 세운 그는 가수로 활동하던 젊은 시절에도 이미 시대를 꿰뚫는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대중의 관심이 비틀스와 마이클 잭슨 같은 외국 음악에만 열광하던 때, 그는 현실을 비판하며 한국 음악이 세계로 나가야 한다는 확고한 비전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가수였던 사람이 어떻게 거대한 엔터테인먼트를 세울 수 있었을까? 그동안 품었던 궁금증이 단번에 풀렸다. 앞을 내다보는 선견지명과 남다른 혜안이 그를 더욱 빛나게 했다. 그 꿈은 결국 K-POP의 토양이 되었고, 오늘날 BTS와 같은 세계적인 그룹이 탄생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이수만의 이야기에 이어 신승훈의 삶 또한 인상 깊게 다가왔다. '미소 속에 비친 그대', '보이지 않는 사랑' 같은 감미롭고 서정적인 발라드로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린 가수. 하지만 그는 자신만의 음악 색깔을 지키기 위해 사랑조차 멀리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나를 크게 놀라게 했다. 수많은 인기를 한 몸에 받던 시절, 주변의 권유와 유혹에도 끝내 흔들리지 않은 그의 고집은 음악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빼놓을 수 없다는 듯 음악의 가왕 조용필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의 노래는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강렬한 울림을 준다고 했다. 나 역시 콘서트에서 그 열기와 감동을 직접 느낀 적이 있다. 각 방송사의 수상을 거절할 만큼 명예에 연연하지 않았고, 방송 출연이 확정되면 시작 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해 무대를 점검할 정도로 철저했다고 한다. 최고의 자리를 지키는 스타였지만 인간적으로는 소박하고 따뜻한 예술가였다.

조용필의 음악은 내 청춘의 한 장면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연애하던 시절,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허공' '바람의 노래', '그 겨울의 찻집', 같은 수많은 히트곡을 따라 부르며 그 감성 속에 빠져들곤 했다. 지금도 그 노래를 들으면 그때의 설렘과 뜨거웠든 감정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듯하다.


가수들의 음악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그 무대를 글로 빚어낸 한 사람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작가는 그 시절 모든 방송사의 인기 프로그램 대본을 쓰며 쌓아온 연예인들과의 인연, 그리고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철학을 들려주었다. 좋은 대본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끝없는 노력이라고 했다. 잠을 줄여가며 수많은 책을 읽고,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언제나 깨어 있었으며, 작은 것도 예사로 보지 않고 세심하게 관찰했다고 한다. 남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태도 속에서 자부심이 묻어났고 세월이 흘러 노년의 길을 걷고 있었지만 여전히 품격이 느껴졌다.


강연에는 문학, 음악, 방송 철학이 어우러져 있었고 그 속에는 깊은 성찰과 단단한 겸허함이 배어 있었다.

유난히 가슴에 새겨진 한 문장을 떠올렸다. 그의 이야기는 곧 문학이었다. "글을 쓰는 것은 글이 대답해 주기 때문이다. 글이 길이다. 길은 가장 낮은 곳에서 밟힌다." 나는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의 위대함 앞에 고개를 숙였다. 성공은 화려한 무대 위에서만 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묵묵히 쌓아 올린 시간, 고독 속에서 다져진 철학, 그리고 영혼을 불살라 넣은 노력이 있었다.


예술가들의 삶을 바라보며 우리는 깨닫게 된다. 예술은 단순한 재능의 산물이 아니라, 삶을 깊게 들여다보는 눈과 끝없는 연마에서 비롯된다. "문학은 영혼을 살찌우고 음악은 그 영혼에 숨을 불어넣는다."


그날의 강연은 80년대 청춘을 달궜던 추억의 노래 '창밖의 여자'를 내 마음속에 다시 불러왔다.

문학과 음악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 울림 속에서 나는 시대의 나를 비춰보았다.

예술은 결국 삶을 빛나게 하는 또 하나의 언어인 것을.


그들의 빛은 끝없는 연마와 고독, 자신만의 세계를 지켜내는 소신에서 비롯 된 것이다. 연예계에서 활동하는 이들을 바라보던 나의 고정관념이 사라졌다. 요즘 젊은 이들 중에는 무대 위의 화려함만 보고 꿈을 좇기보다 그 이면에 숨겨진 노력과 철학을 먼저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아니면 적어도 그 빛이 어떤 희생과 집념 위에 서 있는지 깊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들의 삶은 깊은 울림을 남겼다.

그 울림이 우리에게 인생을 더 깊고 넓게 바라보는 인문학의 시선을 일깨우고 행복을 말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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