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EAR

by 김성연

길가에 낙엽이 뒹굴고 가지가 드러나면서부터 서서히 대문 틈 사이로 냉기가 스며들었다. 차가운 공기는 고원의 발끝에 닿았다. 그는 알람보다 먼저 깨운 늦가을이 미웠다. 부시시한 머리와 눈곱, 왼쪽 뺨을 가로지른 침자국, 잔뜩 주름진 갈색 잠옷에 하얗게 질린 맨발을 양손과 함께 허벅지 안쪽에 꼭 끼워 넣었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오늘 뭘 해야 할지 생각했다. "오늘... 뭐가 있었더라..." 이 원룸의 유일한 장점은 햇볕이 잘 든다는 것이다. 그는 잠시 얼굴을 내밀어 볕을 쬐며 하던 생각을 멈췄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알게 될 테니까. "아.. 생각났다" 종각에서 오랜 친구들을 보기로 했다는 걸 당일 아침에 떠올렸다. 잠이 덜 깬 고원은 몸을 앞뒤로 휘청이며 졸음을 붙들었지만 핸드폰 알람은 빨리 일어나 씻으라고 재촉했다.


멀끔히 씻고 나와보니 거지꼴인 방이 한눈에 들어왔다. 몇 개 있지도 않은 그릇은 전부 나와 싱크대에 쌓여있었고 바닥은 널브러진 옷가지와 헝클어진 이불, 간이 책상과 먹다 남은 배달 음식들로 뒤덮여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위에 먼지와 머리카락, 비듬 가루들도 듬성듬성 있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생기지 않았을 흔적이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방을 보고 새삼럽게도 아직까진 살아 있음을 느꼈다.


그는 달랑 흰 티에 가죽재킷만 걸치고 나온 자신을 원망했다. 양손을 주머니에 푹 쑤셔 넣고 고개를 처박아도 찬바람에 코를 훌쩍일 수밖에 없었다. 빠른 걸음으로 보신각을 지나 3층에 위치한 이자카야에 도착했다. "우리가 언제 다 같이 만났더라..." 그들의 마지막 모임은 고원이 전역한 직후 여름이었다. 반팔과 반바지에 각기 다른 길이와 색깔의 우산을 들고 혜화에 있는 어느 주점으로 모였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한 명씩 친구들이 도착하는데 오랜만에 얼굴을 보니 어색했다. 만나지 못했던 2년 동안 알게 모르게 바뀌었을 테니까.


모두 모이니 열한 명 즈음되었다. 이것도 전부 모인 것은 아니었다. 나이가 들 수록 다르게 돌아가는 삶의 고리를 맞추기가 어려웠다. 고원과 친구들은 오랜만에 만나 서로의 안부와 근황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백의 2년을 메꾸기 위해 질문과 답변을 성실히 짜냈지만, 테이블 위로 안주와 술이 채워지는 것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술집에 어울리지 않게 정적은 흔치 않게 생겼다. 고원은 어색하고도 서먹한 상황을 어떻게든 깨고 싶었지만 스스로 말주변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무작정 건배를 외치는 게 전부였다. 술은 텐션을 올리기 좋은 각성제였다. 고원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세현은 잔잔한 미소와 함께 여유로운 주량을 보였다.


오랜만에 술을 마신 고원은 소주 몇 잔에 금방 술기운이 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몸이 따뜻해지고 귀와 볼이 살짝 달아올랐다. 멈추지 않고 술을 더 들이켜면 이 친구들을 지금보다 훨씬 더 정열적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훗날 후회할까 스스로 끈을 놓지 않았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으니 같이 고생했던 8년 전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입시 전쟁을 치러야 하는 대한민국 열여덟 살 고등학생들이 모여 서로 경쟁하고 협력하고 부딪히며 깨지고 성장했던 말 그대로 푸르게 빛나던 청춘이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있었다. 그는 한수의 연기와 열정, 세현의 자연스러움, 서진과의 갈등과 화해, 유현의 단단함, 여진의 불안과 외로움, 규혁의 우직한 뿌리를 향해 내가 너희를 정말 좋아한다고 온몸을 다해 드러내고 싶었다. 그가 사랑하는 것들은 8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것들이었다. 추억은 위스키처럼 따뜻하게 흘러내렸다.


밤은 점점 깊어지고 누구는 2차를 어디로 갈지 생각할 때 다른 누구는 언제 집을 갈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직 20대 중반이라지만 다들 체력이 예전 같지 않았다. 슬슬 자리를 옮길지 말지 얘기가 오가던 중 뜻밖의 손님이 등장했다. 8년 동안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효준이었다. 모두 유니콘이라도 본 것 마냥 자리에서 일어나고 입을 벌리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눈웃음을 지으며 수줍게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예상치 못한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미리 받은 듯 기쁨과 반가움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야!!!.. 너 뭐야?!!" 규혁은 3시간 만에 자리에서 일어나 효준을 와락 껴안았다. 한 사람의 등장이 이리도 특별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고 오늘이 오늘에서 끝나지 않길 바랐다. 그들은 축제 같은 분위기를 이어가 다 같이 사진을 찍어 기록으로 남겼다. 이 순간도 언젠가 잘 숙성되어 따뜻하게 흐를 테니까.


2차는 술기운처럼 잔잔하게 흘러갔다. 이야기는 여러 가닥으로 나뉘고 왼쪽과 오른쪽으로 갈려 서로의 현재를 공유했다. 변함없는 추억과 달리 현실은 너무나 빠르게 변했고 안주 위로 적응하기 급급한 청년들의 고민이 오갔다. 그들의 가치는 무엇으로 매겨지는가. 나의 쓸모를 걱정하는 이들이 모여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회적 가치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고원은 그들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기만 했다. 순간 저 표정이 내 표정이겠거니 싶었다. 그는 타인의 마음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봤다.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라는 뜻이니까. 그들은 모두 답답함과 막막함을 느끼고 있었다. 철창에 갇힌 곰처럼. 당장이라도 뚫고 나가고 싶은 욕망은 다른 방식으로 뻗쳤다.


처음에는 장난으로 하는 얘기인 줄 알았다. 지금 당장 새벽 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떠나자고. 성심당 빵 얘기를 하다 즉흥 여행으로 번지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한수는 적극적으로 무리를 선동했고 그의 말에 동요하는 이들이 몇몇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쉽게 가겠다는 얘기를 하지 못했다. 왜냐면 그들은 당장 몇 시간 뒤 스케줄에 묶여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수는 포기하지 않고 그들의 마음을 건드렸다. 그것은 자유였다. 무엇하나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는 현실에서 벗어나 지금 당장 즐거운 것에 집중하자는 그의 말은 그들을 설득하기 충분했다. 그렇게 얼떨결에 대전으로 출발할 원정대 5명이 꾸려졌고 그들은 새벽 4시 기차표를 예매했다. 유난히 맑은 새벽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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