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꽁 얼어붙은 청자정 위로 비단길 따라 마디가 걸어다닙니다
요즘 국립중앙박물관의 의궤실이 핫하단다. 전시 꽤나 본다는 사람들이 많이 다녀간 듯 하다.
조선시대 역사를 보지 않은지 벌써 10년정도 지났다. 프랑스에 빼앗겼던 외규장각이 돌아왔다는 소식도 얼핏 들었던 것 같은데, 이미 기억 저편에 있던 내용이었다. 외규장각은 뭐고, 규장각은 뭔지. 의궤를 보관하면 지금의 책방이나 도서관같은 곳이려나, 라는 얄팍한 지식으로 컴퓨터를 켰다.
의궤란 요즘으로 말하면 '국가 행사 기록물 책자'였다. 국가적인 의례나 행사를 치른 후 기록들을 정리한 보고서인데, 책 형태로 잘 엮어서 보관해두던 것이다. 나중에 비슷한 행사를 할 때 그 내용을 활용하거나 전대의 기록을 남겨두어 구체적인 행사를 이행할 때 좀 더 편리하게 참고할 수 있도록 만든 것들이다. 마치 공공업무의 거대한 답안지랄까. 그래서 생각보다 의궤에는 그림도, 글자도, 표도 많다. 왕이 앉을 의자를 만드는 데에 얼마나 긴 나무가 얼마나 필요했는지, 외신들이 행사별로 몇명이 참석했었는지, 장인은 누구누구가 참여했는지, 준비기간과 예산은 물론 행사를 진행할 때 사용한 기계들까지도 상세하게 기록되어있다.
이런 기록들은 실용적인 차원을 넘어서 유교 문화권에서 기념비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국왕의 전횡을 견제하기도 하고, 투명성을 자부하는 기록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기록은 그 자체로 정치적 활용성을 갖기도 했다. 이런 기록물의 뿌리는 불교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기부터 '의궤'라는 이름이 사용되었고, 조선 후기부터 적극적으로 의궤가 제작되었다고 한다.
의궤에서 흥미로운 점은 어람용과 분상용으로 그 용도가 나뉘어져있었다는 점이다. 왕이 읽기 위해 만들어진 '어람용'이 있고, 일반 열람을 위한 '분상용'이 그 종류다. 왕이 읽는 의궤인 만큼 어람용은 그 표지와 내지도 분상용과 다르다. 분상용보다 더 판판하고 부드러운 '초주지'라는 내지를 사용하고, 목판이나 석판으로 찍어내는 탁본이 아닌 사람이 직접 손으로 쓴 필사본으로 내용이 작성되어 있다. 표지도 '책의'라는 녹색비단으로 감싸 마치 옷을 입은 듯한 모양새다. 물론, 100여년이 지난 지금 책의는 의궤에 그대로 붙어있지는 않다. 다행히 국립중앙박물관이 최근 개방한 외규장각 의궤실에 그 표지들을 보존해두었다. 어찌 보면 의궤의 현대판 옷방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있는 비단의 흔적들을 찾으러 길을 떠나 보았다. 이촌역에 도착해 표지판을 따라 지하도를 걷다 보면 박물관에 도착한다. 청자정 호수가 아주 꽁꽁 얼어있었다. 나도 비단옷이 간절했다!
전시장은 따로 마련되어있지는 않고, 상설전시장의 2층 서화관 입구쪽에 위치해있다. 서화관에서는 과거에 사용되었던 종이와 책, 글자들과 그림들을 전시해둔 공간이다. 양 옆으로 늘어선 책의들이 고고하게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책의를 자세히 살펴보면 동그란 모양의 작은 스티커 같은 게 붙어있다. 프랑스에서 관리를 위해 붙여둔 표식인듯 하다. 표지의 무늬가 각각 다른게 눈에 띈다.
의궤의 표지는 원래 이런 모양이다. 오른쪽은 황동으로 철하고 녹색 비단으로 표지를 만든다. 책의 제목은 흰 비단에 따로 적어 위에 붙인다. 외규장각에 있던 의궤 297책 중 291책이 어람용이라고 한다. 의궤를 만들 때 주로 2개에서 9개정도를 한번에 만드는데, 그 중 하나는 어람용으로 만든다고 한다.
왕이 사용하던 문서 대부분은 비단을 사용한다. 누에를 치고 명주실을 뽑아 풀을 먹이고 베를 짜는, 수많은 노동력으로 만든 옷감이라는 걸 감안하면 왕과 비단 사이의 관계성을 슬쩍 이해할 수도 있겠다.
서울 곳곳에는 왕실에 비단을 공물로 바치던 지역들이 남아있다. 성북구의 선잠단지, 롯데월드가 있는 잠실이 그런 장소였다. 과거에는 뽕나무를 기를 수 있는 장소들이 정해져 있었고, 선잠, 즉 명주실을 뽑고 비단을 만드는 일이 꽤나 중요하게 여겨져 이 내용 또한 의궤로 기록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