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이 선물하는 최고의 선물
밴쿠버에 살다 보면, 사방에 펼쳐진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문득 “오늘은 어디서 하루를 마무리하지?” 하는 행복한 고민이 생기곤 합니다.
지친 하루에 현재와 미래에 대한 상념으로 복잡했던 마음을 씻어낼 공간을 찾을 때 말이죠. 그럴 땐 주저 없이 잉글리시 베이 비치(English Bay Beach)로 향합니다.
다운타운 웨스트엔드에 자리 잡은 이곳은 친구끼리도, 연인끼리도, 가족끼리도 두루두루 사랑받는 밴쿠버의 상징적인 명소입니다.
드넓은 바다와 해 질 녘의 아름다운 풍경은, 어떤 수식어로도 다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을 선사하죠.
하지만 잉글리시 베이에서 완벽한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감수해야 할 ‘밴쿠버식 치열함’이 있답니다.
밴쿠버의 인기 명소가 다 그렇듯, 잉글리시 베이도 주차는 그야말로 ‘전쟁’입니다. 비치 근처에는 'PayByPhone' 앱으로 편리하게 결제 가능한 스트리트 파킹 구역이 쭉 이어져 있습니다. 시스템은 스마트하지만, 문제는 언제나... 자리가 없다는 거죠.
도착 후 10분에서 15분 동안 하이에나처럼 주변 도로를 돌며 눈에 불을 켜야 겨우 빈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동승자와의 대화 톤이 살짝 높아질 수도 있습니다.
“저기! 저기 빠진다!” “아니야, 저기는 장애인 주차 구역이잖아!” 같은 긴장감 넘치는 대화가 오가는 것이, 잉글리시 베이 피크닉의 첫 관문이자 묘미라고 할 수 있죠. (참고: 저희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웃음)
밴쿠버의 해변은 취사와 음주가 금지되어 있지만, 미리 준비해 온 간단한 먹거리나 포장 음식은 언제나 환영받습니다.
돈과 시간을 아끼고 싶다면 미리 집에서 도시락처럼 싸 오는 것이 가장 좋죠. 아니면 비치 근처의 웨스트엔드(West End)를 둘러보며 현지에서 조달해도 훌륭한 맛집들이 꽤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캐나다까지 와서도 한국의 맛을 포기 못하는 사람으로서, ‘무무치킨’에서 바삭한 후라이드 한 마리를 튀겨와서 비치에서 뜯는 것을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바다를 보며 치킨을 뜯는 것. 이건 반칙입니다.
태평양의 시원한 바람, 석양, 그리고 황금빛 바삭함의 조합은 그동안 쌓이고 쌓인 몸과 마음의 피로를 한방에 날려버릴 만큼 환상적이죠.
시간적인 여유가 된다면, 밴쿠버 대표 번화가 중 하나인 랍슨 스트리트(Robson Street)를 따라 올라가 보세요. 랍슨 스트리트 끝에서 덴만 스트리트(Denman Street)를 타고 잉글리시 베이 쪽으로 내려오면, 해변 관광지 식당들의 활기찬 분위기를 제대로 즐길 수 있습니다.
특히, 랍슨에 있는 한남마켓(Hannam Supermarket)에 들러 김밥 한 줄을 사서 해변에 앉아 가볍게 먹는 것도 훌륭한 'K-소풍' 감성입니다.
여름철 밴쿠버는 해가 늦게 지기 때문에, 저녁이라고 방심했다간 큰코 다칩니다. 오후 6~7시에도 아직 태양이 강력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비치에는 그늘이 전. 혀. 없다는 것입니다. 시원한 바람만 믿고 갔다가 강렬한 햇볕 아래 온몸이 익어버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늘막 텐트나 간이 파라솔을 챙겨서 나만의 휴식 공간을 확보하고 앉으면 금상첨화!
캐나다식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 틈에서, 한국에서 가져온 작은 텐트 하나가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지 모릅니다.
조금 더 분위기 있게 식사를 즐기고 싶다면, 비치 바로 옆에 위치한 Cactus Club Cafe는 선셋 뷰 명당 중의 명당입니다. 멋진 음식과 함께 통유리 너머로 잉글리시 베이의 석양을 감상할 수 있죠.
하지만 이 명당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평일 저녁에도 웨이팅이 꽤 있는 편이며, 주말에는 더더욱 경쟁률이 치열합니다.
만약 복잡함 없이 여유롭게 바다를 만끽하고 싶다면 포장 음식과 돗자리를 추천하며, 시간이 넉넉한 분들만 도전해 보시길 권합니다.
잉글리시 베이 방문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해 질 녘입니다. 해질 시간이 되면, 낮 동안 뜨겁게 달구던 태양이 서서히 식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선선하게 몸을 감쌉니다.
그리고 진짜 마법 같은 순간은 해가 지평선 너머로 넘어간 직후 찾아옵니다.
바로 하늘이 붉게, 주황빛으로, 때로는 은은한 보랏빛으로 물드는 그 시간이죠. 수평선부터 하늘 끝까지 번져나가는 장엄한 석양을 보고 있으면, 하루의 피로는 물론이고 해외생활의 소소한 어려움까지도 녹아내리는 기분입니다.
저절로 "아, 이래서 내가 여기 왔지" 싶은, 모든 것이 감사해지는 순간입니다.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져 바다와 도시의 불빛이 조화로운 밤이 될 즈음, 화장실 한번 들렀다가 차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서 집으로 컴백합니다.
잉글리시 베이에서 만난 이 평화로운 석양의 잔상은 힘든 하루의 끝에서 찾는 안정감과 여유로움을 선사합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볍고, 마음은 새로운 내일을 위한 활력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다음 주말에는 또 어떤 밴쿠버의 감성을 찾아 떠나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