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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티시 컬럼비아] 조프리 레이크

고된 발걸음 끝에 허락된 세 가지 쪽빛

by Mr 언터처블

밴쿠버에서 차를 타고 북쪽으로 3시간. 스키의 성지 휘슬러를 지나 꼬박 한 시간을 더 달려야 닿을 수 있는 곳, 바로 조프리 레이크(Joffre Lakes)다.


https://maps.app.goo.gl/vgN2n2ZQXuEf8n6S6


단순히 거리만 먼 것이 아니다. 이곳은 자연을 보호하기 위한 '사전 패스(Day Pass)' 예약이 필수인데, 사이트가 열리자마자 순식간에 매진될 만큼 경쟁이 치열하다.


밴쿠버 로컬들에게도 귀한 장소이자, 그만큼의 수고를 들일 가치가 충분한 곳. 호수 근처에 다다를 즈음, 차는 가파른 산길을 힘겹게 오르며 이제 곧 시작될 여정이 만만치 않음을 예고한다.


#1. 첫 번째 만남: 록키의 축소판, 로어 레이크 (Lower Lake)


주차장에 차를 대고, 어렵게 구한 패스를 직원에게 보여준 뒤 숲으로 들어선다. 조프리 주립공원은 고도에 따라 전혀 다른 색을 뽐내는 세 개의 빙하 호수를 품고 있다.


입구에서 5분 남짓 걸었을까, 첫 번째 호수가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다. 밴프나 재스퍼 같은 록키 산맥에서 보았던 그 웅장함의 축소판이다. 맑은 빙하수 뒤로 키 큰 침엽수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고, 그 너머엔 만년설을 이고 있는 거친 산봉우리가 위엄 있게 자리 잡고 있다.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탄성을 지르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진짜 조프리의 속살을 보려면 이제부터 신발 끈을 단단히 조여야 한다.


#2. 고행의 길에서 만난 쉼터, 미들 레이크 (Middle Lake)


첫 번째 호수와 작별하고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성인 걸음으로 두 번째 호수까지는 약 1시간 반. 평탄한 숲길도 잠시, 대부분의 구간은 가파른 경사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바닥은 나무뿌리와 돌들이 엉켜 울퉁불퉁하니, 발목을 접질리지 않도록 온 신경을 발끝에 집중해야 한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쯤, 등 뒤로 시원한 폭포 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면, 내가 올라온 높이만큼 시야가 트이며 광활하고 푸른 산자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 풍경에 위로받으며 다시 걸음을 옮긴다.

"두 번째 호수는 모든 이들에게 고마운 휴게소와 같습니다."


드디어 도착한 두 번째 호수는 앞서 본 것보다 훨씬 짙고 깊은 에메랄드빛을 띠고 있다. 멀리서만 보았던 빙하 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와 있다.

이곳은 산행의 피로를 씻어내는 활기찬 피크닉 장소다. 사람을 겁내지 않는 새들이 간식을 얻어먹으려 손바닥 위에 사뿐히 내려앉고, 사람들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인생 사진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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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은 보통 이곳에서 여정을 마무리한다. 충분히 쉬고, 웃고, 에너지를 채운 뒤 하산을 선택하는 것도 지혜로운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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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요한 영적 공간, 어퍼 레이크 (Upper Lake)


하지만 조금 더 욕심을 내본다. 여기서 30분 정도 더 오르면, 최후의 비경인 세 번째 호수를 영접할 수 있다. 가는 길목에 만나는 계단형 폭포는 물줄기가 시원하게 층을 이루며 떨어져 또 다른 장관을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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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정상에 도착했을 때, 공기부터가 달라짐을 느낀다. 두 번째 호수의 시끌벅적함은 사라지고, 마치 종교 사원에 발을 들인 듯한 엄숙하고 고요한 공기가 감돈다.

가장 가까이서 마주한 빙하와 투명하리만치 차가운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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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적한 돌턱에 걸터앉아 멍하니 호수와 빙하 산맥을 바라본다. 머릿속을 꽉 채웠던 잡념들이 사라지고, 거대한 자연 앞에 서니 문득 '인생무상'이라는 단어가 스쳐 지나간다.


고요 속에 압도되는 기분이다.

내려오는 길은 만남의 역순이다. 세 번째 호수와 작별하고, 다시 두 번째 호수의 활기를 지나, 마지막으로 첫 번째 호수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주차장으로 향한다.


예전, 아이들을 앞뒤에서 밀고 당기며 올랐던 날은 풍경보다 힘듦이 더 컸었다. 하지만 최근 등산 전문가와 함께 페이스를 조절하며 오르니, 비로소 산이 보이고 호수가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쉬운 길은 아니다.


여전히 숨이 차고 다리가 뻐근하다.


"왜 호수의 감동은 산의 높이, 그리고 산행의 고됨과 비례하는 걸까."


돌아오는 차 안에서 다시 한번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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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곳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쉽게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면, 이토록 짙은 쪽빛 감동이 가슴에 남았을까.


쉽게 허락되지 않기에, 그 풍경이 더욱 찬란하게 기억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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