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에서 수다쟁이까지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했던 건 단 한 사람이었어. 결국 이 말을 하기 위해 난 이 글을 끄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기미팅 중이었고 늘 같은 멤버에 비슷한 어젠다였다. 특별히 내가 공격당하는 자리도 아니었고 루틴한 미팅을 하다 생긴 일이었다.
잘 돌아가던 기계가 갑자기 고장 나는 것처럼, 내 몸은 갑자기 증세를 드러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하면서 숨쉬기가 너무 불편해졌다. 그냥 이 회의실을 나가서 몸의 이상증세를 가라앉혀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가까운 화장실로 들어가서 부스에서 한 30분을 앉아서 호흡을 다스렸다. 시원한 바람을 쐬어야 할 것 같아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 건물 바깥으로 나가서 열을 식혔다.
자리로 돌아가니 미팅을 끝나 있었고 상사가 괜찮은지 물어왔다. 그냥 숨이 잘 안 쉬어져서요.. 내 몸의 이상반응에 벌컥 겁이 나고 눈물이 났다. 상사는 회사 내 심리상담사가 있으니 예약해서 상담을 받아보라고 권했다. 많이들 받는다고.
물론 스트레스가 쌓여가던 나날이었다. 아무리 일을 해서 넘겨도 협력부서에서는 요구사항이 넘쳐났다. 할 수 있는 툴과 시간은 정해져 있는데 주문량을 다 쳐내기에 늘 역부족이었다. 비난 섞인 메일이 오가고 불편한 표정들이 쌓여가고 아침이 되면 기계적으로 하루를 시작하곤 했었다.
회사 내에 그런 공간이 있는 줄 미처 몰랐었다. 적당히 안락한 소파에 앉아서 마주 앉은 상담사와 대화를 시작했다. 회사 내 현재 업무상황에 대해서 듣더니 잦은 잽을 계속 맞으면 무너질 수 있다며 현재 마음상태를 누구한테 터놓고 있는지 물었다. 아뇨.. 회사생활이 다 비슷하지. 10년차가 넘었는데 이게 힘들고 저게 힘들고 미주알고주알 말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다들 밥벌이의 고단함이 있는 거지 나만 힘들다고 찡얼거리는 것처럼, 미숙아처럼 보이기 싫었다고 대답했다. 원래 말수가 별로 없다고도 했다.
"어릴 때 학교 갔다 오면 수업은 어땠는지. 재밌는 일은 없었는지. 물어보는 사람이 없으셨나 봐요??"
미팅하다 숨이 안 쉬어져서 도움을 받고자 갔던 상담이었는데 상담사가 내 어린 시절을 묻기 시작했다.
다시 울컥하며 눈물이 터졌다. 눈물이 너무 나서 앞에 놓인 크리넷스 통을 반을 비워내고 눈이 퉁퉁 부어올라서 한참을 쉬었다가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스무 살 대학교에 진학하며 혼자 서울로 상경했고 그 이후 20년이 넘게 혼자 살아왔다. 살 집을 알아보기 위해 부동산에 들어가고 이사를 하고 이직을 하고 등등 모든 내 인생의 결정을 혼자 내리면서 살아왔었다.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독립된 성인의 삶을 꾸적꾸적 살아오면서 나는 점점 말이 없는 조용한 사람이 되어갔고 힘든 일이 생겨도 누구한테 내 약함을 내비치고 싶지 않았다. 그 사이에 내 마음은 곪아가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나에겐 지방에 계신 부모님이 있었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사이가 좋지 않고 지금도 좋지 않은. 아빠는 내게 용돈을 주는 사람이었고 엄마는 내게 언어폭력과 물리적인 폭력을 동시에 행사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부모님 탓을 하기엔 이미 너무 나이가 들었다. 내가 스스로 극복해야 했다.
그 이후로 몇 번을 더 상담을 받았다. 내 어린 시절과 살아온 얘기를 가감 없이 얘기하고 눈물 나면 울고 그게 다였다. 하지만 실천하기 시작한 것들은 몇 가지 있었다.
첫번째, 부서를 옮겼다. 끊임없이 요구하고 비난하는 협력부서를 내가 변화시킬 순 없었다. 내가 조금 더 협업이 수월한 부서로 옮겼다.
두번째, 불편한 일이 생기면 불편하다고 표현하기 시작했다.
세번째, 나 자신에게 적용했던 높은 잣대를 조금 느슨하게 낮췄다. 달콤한 걸 먹고 싶어 하면 좀 먹어주고 주말아침에 푹 자고 싶어 하면 그렇게 해주고 내 몸과 마음이 원하는걸 조금 더 들어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실천하게 된 건 내 옆에 새로 자리 잡은 야생마덕이었다.
야생마는 늘 내게 묻는다. 아침은 먹었는지, 뭘 먹었는지, 잠은 잘 잤는지, 꿈은 꿨는지, 회사에서 스트레스받게 하는 놈은 없었는지, 운동할 때 무슨 음악을 들었는지. 나는 끊임없이 대답한다. 응. 그게 말이야 이랬고 저쨌어. 이 한 사람이 내 인생에 들어오면서 비어있던 톱니가 채워진 것처럼 안에서 자신감과 행복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세상에 말하고 싶었다.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고 지지해 주는 사람을 꼭 찾으라고. 당신에게 그 사람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어디에서 어떻게 만난 건 크게 상관없다고. 결국 단 한 사람이라고. 행복해지라고. 그리고 그 단 한 사람과 짧지만 충만한 삶을 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