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은퇴여행
내게 프로젝트를 블레임 했던 상사가 그다음 날 한직으로 날아갔다. 내 직속상사는 스트레스가 그렇게 심하면 다른 업무로 옮기는 것도 가능하다고 붙잡았다. 하지만 내 시간을 월급쟁이가 아닌 나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오롯이 쓰겠다는 마음을 먹고 나니 미련이 남지 않았다. 한 달의 노티스를 주고 남은 시간은 미소진 연차로 대체하는 걸로 해서 퇴직일자를 정했다. 인사팀 엑시트 인터뷰는 형식적이었다. 어차피 재택 중인 상태여서 실감도 잘 나지 않았다. 남편은 은퇴여행 계획을 짜자고 했다.
마음 떠난 회사에서 한 달간 더 업무를 마무리하고 인수인계를 한 후 모든 업무 채널에서 나왔다. 이젠 주말오후에 긴급으로 오는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된다. 막판 변경사항을 가지고 씨름하느라 애쓰지 않아도 된다. 400만 원짜리 노트북이 느려질 정도의 과도한 데이터를 가지고 돌을 굴리지 않아도 된다. 9년간 애 많이 썼다.
내가 좋아하는 아벨라워 위스키 대자를 사고 독서와 산책만 할 요량으로 패드 한 장만 챙긴 단출한 여행짐을 싸고 이박삼일 동안의 먹거리를 챙겨서 드디어 여행당일 두둥! 소백산 휴양림에서 연락이 왔다. 지난밤 폭설로 휴양림으로 올라오는 도로가 결빙되어서 캔슬해도 전액환불되니 참고하라는 연락이었다. 사륜구동이 아니지만 스노우 스프레이를 믿고 가보기로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취소한 듯 불 켜진 숙소가 두 개밖에 없었다. 이박삼일 베짱이가 해주는 삼시 세끼를 먹고 낮에는 뒹글거리며 책을 읽고 밤이면 침낭을 들고 마당에 나가 누워서 아벨라워를 마시며 별을 보았다. 취기가 돌면 침묵이 내려앉은 산길을 베짱이와 손잡고 산책했다. 눈이 뽀드득 밟히는 적막한 산에 우리 둘만 남은 것 같았다.
산이 좋은지 바다가 좋은지 늘 반반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여행으로 우린 깨달았다. 우린 산을 더 좋아해. 청명한 공기와 아파트가 보이지 않는 스카이라인. 인적 없는 호젓함. 그 속에서 느끼는 행복감이 어마어마했다.
서울로 돌아와서 며칠 지나 올랐던 관악산에서 마음이 정해졌다. 이제 서울을 떠나 자연에 가까운 곳에서 살고 싶다고. 전세계약 만기가 3개월 남은 시점이었다. 재계약 의사 없음으로 임대인에게 연락을 하고 시간도 많겠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곳을 고르고 싶어서 왕초보 아파트 고르는 법 같은 유료강의도 들은 후 경기도 숲세권 아파트란 키워드를 치고 하나하나 검색해 나갔다.
그리고 지금 사는 곳을 찾았다. 평일 낮에도 와보고 저녁에도 와보고 근처 상권도 살펴보았다. 인구밀도가 낮지만 있을 건 다 있는 동네였다. 남향에 거실에서 산이 보이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탈 서울 했다.